<홀로>
둘째 날은 혼자였다. 그 사람은 뜻 밖의 사정으로 오늘 하루 육지로 가야했다. 계획에는 없던 당황스런 일정이다.
종일 바다를 감상했다. 그래도 될 것 같은 날이었다. 밀려오는 물결, 다가가길 망설이듯 다시 돌아가는 물결. 누군가는 일을 하는 나른한 오전이다. 내가 애월읍의 한 카페에서 식은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낯선 곳에 덩그러니 있다.
지금은 웃으면서 떠들 수 있는 그 사람도 없다. 그간 쌓인 피로, 점차 짙어지는 상실감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태 생각하고 싶었지만 생각하지 못한 생각들을 생각한다.
파도가 차츰 옅어진다.
요즘들어 차츰 옅어지는 무언가를 보며 홀로 있을 때는 숙모가 떠오른다. 몇 년 전 숙모가 그렇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숙모의 숨소리는 어느 바람 하나 없는 날의 파도처럼 옅어지더니 이내 잔잔해졌다.
췌장암이었다. 그 시간을 얼마나 길었을까. 나는 모른다. 숙모의 죽음을 생각하면 어색한 말밖에 안 떠오른다. 맞지도 않는 말, 완전히 반대인 말 뿐이다. 적절한 말이 담장 뒤에서 빙그르르 도는 느낌이다. 고쳐 말하려면 이내 혼란에 빠져 내가 무슨 표현을 하려 했는지도 잊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숙모는 내 기억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다. 사람은 그렇게나 작아질 수 있는 존재였다. 그때 나눈 대화는 기억조차 안 난다. 짧은 시간 숙모는 내 눈을 바라봤고, 이내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아버지는 한밤 중 전화 한 통을 받곤 다급히 뛰었다.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나는 직감했다. 우리 둘은 약속이나 한듯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자리엔 흰 천을 덮은 숙모가 누워있다. 나는 숙모의 영정사진을 들고 장례식장 안을 터벅터벅 움직였다. 병원에서 수많은 관을 달고 있던 자그마한 숙모가 아니었다. 내가 어렸을 적 자주 보던 숙모였다. 바쁜 엄마 대신 내 손을 잡고 집까지 바래다주던 그 많은 날이 떠올랐다. 살아 계신 동안 "고마워요"라고 말해야만 했다. 그러지 못했다. 나는 숙모가 한평생 곁에 머무를 줄 알았던 것이다.
파도가 더욱 옅어진다.
그 이를 잃을 줄 몰랐기에 무심코 대한 옛 순간의 내 모습을 떠올리는 것. 누군가를 잃은 사람이 가장 비참할 때다.
나를 떠난, 내가 떠난 사람들의 걸려오는 전화 한 통을 왜 반갑게 받지 못했을까. 밥 먹자는 그 말을 왜 으레하는 인사처럼 던졌을까. 사는동안 사람들이 옅어진다. 선생님이 말했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 나는 식어빠진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내게 속삭였다.
파도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던 내게 아무 생각이나 하게끔 내버려둔다.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좀 더 이대로 아프고 싶었다.
그렇게 내 감상이 뒤룩뒤룩 살쪄갈 때쯤 맞춰 카메라가 눈에 들어온다. "나 없는 동안 사진 몇 장 찍어줄래요?"라고 건넨 필름 카메라다. 슬슬 움직일 때다. 등뼈를 곧추세우고 카메라를 목에 건다. 옅은 바닷바람도 목덜미로 들어오는 듯하다.
나는 사진 안에 담기는 데 영 소질이 없다.
사진 속의 나는 열이면 열 자본주의 미소조차 찾아볼 수 없을만큼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으로 렌즈를 살펴보고 있다. 카메라를 보는 순간 표정이 굳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힘을 빼고 더 웃어봐요"라고 하면 나는 되레 입꼬리가 굳어 거의 사후경직 같은 단계에 빠져들곤 한다.
내가 주로 찍는 일을 하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럴 땐 대학생 때 잠깐 보도사진학회에 몸 담으며 배운 짧은 지식을 십분 활용한다.
사람 머리를 한 가운데 두지 말되, 팔 다리도 함부로 끊어내지 마라. 사람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공간을 넓게 둬라. 사진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다…. 어디서 주워담은 온갖 말이 한 통에 푹 고아진다. 그 결과, 잘 찍었단 말은 잘 못들어도 '이건 너가 찍은 사진이구나'란 말은 자주 듣곤 한다.
애월의 길을 파고든다.
이름 모를 가족, 연인, 친구들과 함께 걷다 이내 멀어진다. 나는 '관광코스' 아닌 보통 길을 걷고 싶었다. 사람이 없는데도 외롭지는 않다. 투명하고 긴 끈이 육지와 이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걷고 있는 길은 바다를 곁에 둔 마을이면 하나쯤은 자랑처럼 갖고 있는 산책길 같다.
내가 좋아하는 느낌을 담아 사진을 찍어본다. 큰 사물을 담기보단 그 분위기를 녹이려고 한다. 눈에 띄는 큰 특징은 없다. 예쁘다는 말보다는 평화롭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길이다.
어릴 때의 나는 지금 사는 곳이 농촌 아닌 어촌이면 어땠을까하고 자주 생각했다. 마젤란과 바스코 다 가마, 콜럼버스 전기를 읽으면서 아마존과 버뮤다 삼각지대, 아틀란티스의 역사를 공부하던 시절이다.
머릿 속 어촌은 지금 카메라 렌즈에 넘실대는 이런 마을이다.
동그랗게 말린 동네에는 스튜가 주 메뉴인 레스토랑, 파르페를 파는 카페, 모든 이의 사랑방인 낡은 교회가 우뚝 솟아있다. 달걀과 산딸기를 살 수 있는 식료품점, 옷과 책을 훑어볼 수 있는 잡화점도 자리한다. 언덕에는 벽돌로 된 큰 저택이 있다. 가장 시끄러운 곳은 항구와 그 근처 술집이다.
경비원은 참견하길 좋아한다. 말 없는 등대지기는 맥주만 마시면 옛 시절의 모험담을 늘어놓는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할아버지는 내게 배를 고정할 때 써먹어야 하는 십자매듭 짓는 법을 알려준다. 모든 사람들은 감사할 줄 알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나는 내일 내가 무슨 일을 해야할지 안다.
늦은 오후 도두동에 있는 도두봉(道頭峯)에 올라서니 하늘과 땅 탁 트인 모든 곳이 바다 같다.
내가 생각하는 어촌이면 이쪽은 이름 모를 들꽃들이 곳곳 놓여있는 묘지가 있기 딱 좋은 공간이다. 마치 그 마을에 사는 사람처럼, 잠깐 산책 나온 느낌으로, 이제 곧 집에 들어가면 다정한 가족과 따뜻한 음식이 있는 것처럼, 눈을 잠깐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쉰다.
전쟁 같은 삶이 뒤로 물러난다.
코 끝이 찡긋하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준다. 그런 생각들은 꿈일 뿐. 기억나지 않는 책 속 한 구절이 내 머리를 감싸는 듯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 마을은 없고, 절대 실현될 수 없다. 걱정 없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일평생 사는 것은 원래 가능하지 않다.
몇 명 살지 않는 작은 마을에도 다툼이 생기는 게 현실이다. 좋고 나쁨의 가치 판단은 필요하지 않다. 인간의 본성일 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마음가짐이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러야만 분수를 지키면서 모든 일에 상처받지 않을까. 얼마나 큰 경험을 해야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을까.
우주는 잠들어 있다
그리고 우주의 거대한 귀는
별들이라는
진드기들로 가득한
이제 그 앞발에 놓여있다
마야코프스키
하늘을 본다. 푸른 별, 붉은 별, 노란 별이 반짝인다. 먼 별, 가까운 별, 밝은 별, 흐린 별이 내게 다가온다.
그건 내게 아무 말도 않는다. 하늘은 언제나 말이 없다. 나는 내 내면으로 눈을 돌린다. 깊은 우물의 바닥을 내려다본다. 거기에는 내 성격이 보인다. 완고하고 냉정하다. 독하지만 나약하다.
나는 이날 하루 딱 숨이 찰때까지 움직였다. 요정의 터널 같은 곳을 지나 카페에서 그 사람을 기다렸다. 우리가 다시 마주한 건 서로 간 상실감이 적당히 무르익었을 때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