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綠陰)>
"그건 로망이야."
많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습관처럼 한다. 로망은 꿈이나 소망이란 말로 해석되기 쉽다. 그런데도 이들 단어와는 달리 씁쓸하게 다가오는 감이 있다. 묘한 간극이다. 이 말에는 '이뤄질 수 없는'이란 수식어가 몰래 스며든 것 같다.
그래서일까. 꿈과 소망보단 로망을 살려야 훨씬 더 잘 팔리는 느낌이다.
카페 행온은 내외부의 인테리어를 활용, 소년·소녀의 로망으로 둥지 틀기 쉬운 '피크닉'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우린 소풍 바구니를 받아 햇빛이 잘 떨어지는 한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바구니 안에는 딱딱한 빵과 커피·홍차, 비스킷, 과일 등이 들어있다. 툭툭 털고 일어나 동화 속 주인공처럼 네잎클로버를 찾아야 할 분위기다.
일정을 큰 덩어리로 다닥다닥 붙여놓아서인지, 이 시간에 꼭 이걸 해야한다는 건 없다. 그저 여유를 느낄 뿐이었다. 느꼈든, 느끼지 않았든 지난 한 달은 우리 둘에게 어떤 의미에서 혹독했다. 함께 있다는 데 집중하며 숨을 다독이는 시간이다.
시골에서 보낸 시간이 많은 탓인지, 나는 어릴 때부터 몸을 쓰는 일에 익숙했다.
그 중 가장 싫어한 건 고추밭에 받침대를 하나하나 박는 일이었다. 말그대로 망치를 들곤 내 키만한 장대 수십개를 일정 간격으로 박아두는 일인데, 한 두시간만 지나면 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 기간에 가장 행복한 일 중 하나는 솜이불을 덮고 곤히 잠들 때였다. 눈 감으면 꿈, 눈 뜨면 현실인 시절이다.
그러던 날이 계속되던 중 어느 새벽날에 심상찮은 경험을 했다.
마치 알람소리를 들은 듯 눈을 반짝 떴다. 세상은 아직 곤히 잠든 상태였다. 나는 내 몸이 기분 좋은 미열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찢긴 창호지 틈 사이로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환한 달빛 아래 바람결을 따라 풀이 흔들린다. 대기를 맴도는 온갖 기운들이 내게 스며드는 느낌이다. 그 날 닭이 울기전에 개운하게 눈을 떴다. 한참 나이를 먹은 후 충전기에 꽂힌 전자기기를 보니 그 생각이 났다. 나는 그때 자연의 기운으로 충전되는 중이었구나.
이번에도 그렇게 충전 중이었다. 그 사람을 더해 대기를 맴도는 온갖 기운 속에서.
단단하던 몸이 물러졌다.
다른 걸로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가 고개를 드는 느낌이다. 우린 빵을 먹고, 커피와 홍차를 홀짝였다. 중요한 전화 한 통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
숲 산책은 살아가는 데 당연한 일이다.
이는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늘 하던 말로 ,그는 우리 유전자 내 녹색을 갈망하는 인자가 있다고 설명했다. 목 마르면 물을 찾는 것처럼 회색도시에 있으면 본능적으로 자연을 찾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나는 때때로 숲 내지 공원으로 몸을 풍덩 던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물론 수풀이 그득그득해야 한다. 몸 속 어떤 '숲 에너지 할당량' 같은 게 똑 떨어져서 다시 100으로 가득 채워야하는 느낌이다. 나는 이를 숲 채우기라고 표현한다.
나란히 비자림을 걸었다.
숲 에너지가 30쯤 남았을 때였다. 숨을 쉴 때 온갖 좋은 기운들을 빨아들인다고 생각하고, 숨을 내뱉을 때 온갖 나쁜 기운들을 빼낸다고 생각했다. 비자림을 걷다보면 쇼팽이나 모차르트 음악을 통통 튀는 건반으로 치고 있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코지마 마사유키 감독의 '피아노의 숲'(2007)이 생각나는 풍경이다.
"곳곳에서 유자향이 나."
그 사람이 말했다. 숲에서는 유자와 탱자향이 새어나왔다. 비자나무 줄기를 똑 자르면 새어나오는 냄새라고 한다.
숲을 마주하면 으레 포리스트 카터의 책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2003)도 떠올리곤 한다. 숲과 함께 사는 인디언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기 때문이다.
카터는 부모님이 없는 어린 인디언 '작은나무'가 인디언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숲 속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책에 담는다. 노부부는 작은나무에게 인디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법을 가르친다.
체로키 인디언들에게 사랑은 이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랑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또한 사랑할 수 없다. 즉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를 진실로 사랑한 게 아니라는 지론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사랑과 이해는 같은 것이었다.
할머니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랑할 수 없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더더욱 없다,
신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 이해하고 계셨다.
그래서 두 분은 서로 사랑하고 계셨다.
할머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두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하나의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마음이다.
몸을 위해서 잠자라나 먹을 것을 마련할 때는 이 마음을 써야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과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
할머니는 이 마음을 영혼의 마음이라고 부르셨다.
만일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교활한 생각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칠 일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이익 볼 생각만 하고 있으면…영혼의 마음은 점점 졸아들어서 밤톨보다 더 작아지게 된다.
몸이 죽으면 몸을 꾸려가는 마음도 함께 죽는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영혼의 마음만은 그대로 남아 있는다.
새초롬한 비자향 속에서 내 주변을 돌아본다.
다시 무거운 추 하나가 가슴 밑바닥을 긁고 지나가듯 여린 통증이 스쳐간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혹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이해하려 했던가. 갑작스레 생이별을 고한 사람에게 나는 좀 더 깊은 친절을 보여줘야한 게 아닐까.
나는 어쩌면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을 것일지도 모른다. '내 사람들'이 생겼다는 허영심이 만든 착각일지도 모른다. 짧은 생을 살며 느낀 것은 '내 사람들'의 대부분은 내가 멋대로 그어버린 울타리 안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체로키 인디언이 보면 역정을 냈을 생각이다.
앞에선 손 흔들며 보내주고, 뒤에선 이제 이 관계는 끝났구나하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가슴을 긁어댄다.
비자림은 크고 넓다. 비자나무는 곧고 향긋하다. 이에 비해 내 그릇은 한 없이 작고 초라해보인다.
에너지를 충전한다는 건 없던 것을 채우는 일만은 아니다. 실컷 울면 속이 시원하듯 실컷 되새기고, 종종 자책하면 되레 청량해질 때가 있다.
이런 서툰 나와 나란히 길을 걷는 그 사람이 사뭇 고맙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