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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가벼움과 무거움≫ #3.

③위기 : 촛불집회

by 이원율
박원순 사진.jpg


3. 위기 : 촛불집회 (2016. 10~)


자기만의 길이 있어야 한다. 세상이 비웃더라도 자신의 길이 옳다고 믿어야 한다. 허허벌판에 표지판을 세운다고 한들, 그래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기에는 물론 자신감이 필요하다. ≪호아킴 데 포사다≫


갈증 때문에 바닷물을 마시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은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닷물 속 염분은 또 다시 물을 찾게 한다. 이 때문에 갈증은 더욱 심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2016년 10월 26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외친 1차 촛불집회가 열릴 무렵 박원순 시장은 그런 상태였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 그럼에도 때때로 상상한다.


박원순 시장이 이때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며 분주하게 움직이지 않고, 서울시장으로 정치와 벽을 친 채 시정(市政)에 더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나를 비롯, 그를 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눈 앞 바닷물을 있는대로 들이켰고 그럴수록 더욱 깊은 갈증을 호소하는 듯했다.


박원순 시장에게 '최순실 게이트'는 더할나위 없는 호재였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로 최순실 씨가 국정에 개입했다는 의혹 보도와 함께 파헤쳐진 일로, 추후 대통령 탄핵과 구속을 이끈 사건이다.


누구나 짐작 가능했다. 하야든, 탄핵이든 박근혜 대통령 시대의 막 내림이 시작됐다는 것을. 이에 따른 왕좌의 게임도 예고된 상태였다.


의지는 칭찬받아야 할 성향이다. 허나 의지가 심해지면 집착, 이를 넘어서면 망집이 된다. 망집은 비극만 낳는다. 운명을 끝까지 제 마음대로 좌우하려는 태도는 겸손을 잃게 한다. 이 때문에 신들에게 복수를 당한다. ≪호메로스, 오딧세이아≫


박원순 시장은 이런 가운데 과욕을 부리고 만다.


차기 대선주자로 뜬 그는 광주와 제주 등 전국 지방자치단체를 다니며 특강이란 명목 아래 정치적 발언을 쏟아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연일 정권교체를 주장했다. 그가 광주 전남대를 찾아 대학생과 시민 400여명을 상대로 한 특강에서 "뒤로 숨지 않겠다. 역사 대열에 앞장서 역사의 부름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하겠다"고 한 말은 대권을 시사한 것 아니냐는 추측을 일으켰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려올 때까지 촛불 집회에 수차례 참석하고, 현 정권을 비판하는 길거리 특강도 몇 번씩 가졌다.


그런 그의 지지율은 10%보단 5%에 가까운 한자릿수였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물론, 그 스스로 아우라고 칭한 이재명 성남시장보다 훨씬 낮은 수치였다. 구의역 사고의 멍에가 낫기도 전 또 다른 아픔이 찾아왔다. 서울시장으론 말이 안 되는 처참한 상황에 더욱 정치활동에 열중했지만 지지율은 하염없이 제자리를 맴돌았다.


당시 김주명 서울시장 비서실장에 따르면, 박원순 시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 아닌 탄핵을 외친 첫 사람이다. 문제는 이를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미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은 이재명 시장으로 지목되던 상태였다. 박원순 시장이 늦게나마 행정가 면모를 지킨답시고 '낮에는 행정, 밤에는 나랏일'이란 콘셉트로 주로 밤에만 정치적 행보를 한 것 또한 기억하는 이는 없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건 궁지에 몰린 그가 문재인 대표를 두고 적폐라며 내거티브에 나선 순간 뿐이다.


박원순 시장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메르스 사태와 청년수당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적수라는 인상은 굳혔으나 실질적인 맞수라는 이미지는 옅은 상태였다. 그에겐 ▷정치 경험, 즉 내공이 없다는 점 ▷스스로를 표현할 확실한 이미지가 없다는 점 ▷친박원순계 사람이 적다는 점이 최대 약점으로 작용했다.


문재인 전 대표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실장, 대통령 출마 이력도 있을만큼 내공이 다분했다. 친노 좌장이란 선명한 이미지가 뒤따랐다. 무엇보다 당내 최대 계파인 친노(親盧)계의 지원을 등에 업으면서 삽시간에 친문(親文)이란 말이 생길만큼 자기 사람도 만들었다. 세 조건을 모두 갖춘 상태였다. 당시 대권주자 라이벌로 거론된 안희정 충남지사도 친노에 어느정도 입지가 있었으며, 이재명 성남시장은 전투력이 높은 행정가라는 확실한 이미지로 자리매김했다. 이들 또한 최소 1~2개 이상 조건을 잡은 것이다.


박원순 시장은 재선 서울시장이란 경력 외 정치 경험이 없었고,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속시원한 이미지가 없었으며, 기동민·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으로 대표되는 친박원순계 외엔 원맨쇼로 칭해질만큼 당 입지도 적은 편이었다. '원순씨'와 밑창 뜯긴 구두, 빚 수억 원을 필두로 내세우던 서민 이미지는 모든 행정가·정치인이 앞다퉈 선점하려던 일종의 트렌드에 불과했다.


다른 이의 무기, 갑옷은 당신에게 잘 맞지 않거나, 부담되거나, 움직임에 제약을 주기 쉽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그렇다고 아주 불리한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 수도의 지도자로 서울시장 위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대부분 기자들은 박원순 시장이 이럴수록 공석·사석 구분없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오직 시민만 보겠다'는 말에 따라 시정에 집중하길 바랐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를 향한 비난은 문재인 대표와 안희정 지사, 이재명 시장 등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어수선한 정국에서 1000만명의 도시를 문제없이 잘 이끌어가 추후 재조명받을 수 있는 기회는 서울시장에게만 주어진다. 매 주말마다 격한 시위가 이뤄지던 때였다. 다른 라이벌들이 선택한 길처럼, 박원순 시장도 '그만 할 수 있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한 것이다. 사심없는 행정가로, 오직 나라 안위만을 염려하며 주춧돌을 쌓을 기회였다.


기자들도 처음에는 이슈를 따라가기 바빴을테지만, 언젠가는 조용히 서울시정에 집중하는 박원순 시장을 조명했을 것이다. 이때 그의 장기인 문학적인 표현으로 "사상 초유 사태로 어수선할 수 있는 서울을 제가 다독여야하지 않겠느냐"라는 식의 말을 차츰 흘렸으면 그때보단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으로 확신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기자들이 본 그는 의욕과다에 놓인 초선 구청장이었다. 이슈마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박원순 시장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소모했다. 조급해진 그는 문재인 전 대표를 적폐로 규정하고 공격에 나섰지만, 이 또한 부작용만 일으킬 뿐이었다.


조급한 비판은 집 비둘기와 같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집 비둘기는 언제나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로버트 그린, 전쟁의 기술≫

박원순 시장은 결국 2017년 1월26일 국회 정론관에서 대권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시장 두 번이 그리 어렵지 않게 됐던 일 때문에 아마 정치라는 것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다"며 "저 개인의 준비도 많이 부족했다"고 했다. 직후 안방 서울시청을 찾아서는 기자들을 두고 "몇 달간 긴 여행을 했던 것 같다"며 "민심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스스로 추스르며 새 미래를 구상하겠다"고 했다.


기자들은 그의 말을 두 번 서울시장 선거에선 무난히 승리했지만, 대선에선 흐름을 읽지 못했다는 데 따른 반성으로 해석했다. 그의 최측근인 당시 하승창 서울시 정무부시장도 "그간 열심히 했지만 낮은 지지율도 그렇고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하다"고 풀이했다. 이런 분위기에 누구 하나 토를 달지 않았다. 전날 불출마를 결심했다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이 또한 소수였다. 이미 한참 전에 계산을 끝낸 듯한 분위기여서다.

대단한 시행착오였다. 그러나 정치란 끊임없이 밑그림을 그려가는 과정이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서울시장 3선이란 큰 그림을 그릴 때 든든한 밑바탕이 된다.


정치는 아이러니다. 박원순 시장은 불출마를 기점으로 진짜 정치인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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