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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가벼움과 무거움≫ #2.

②맞수 : 청년수당

by 이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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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맞수 : 청년수당 (2016. 8~)


관대든 교활이든 평판을 만든다. 하나만 부각되면 사람들은 당신 이야기를 한다. 평판은 삽시간에 퍼진다. 무시 당하기보단 비방하고 공격하라. ≪로버트 그린, 전쟁의 기술≫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의 적이 누구인지 보면 된다.


로마시대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BC 100~BC 44)는 청년 시절부터 권력가인 원로원을 대상으로 온갖 설전을 벌였다. 이기고 지는 건 나중 문제였다. 가진 게 없던 그는 당시 최대 권력자로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을 공격하며 명성을 쌓았다. 로마 시민은 어느 순간 카이사르를 원로원과 동급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런가하면 미국 제16대 대통령인 링컨(Abraham Lincoln·1809~1865년)도 큰 유명세를 떨치지 못했을 때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노련한 정치가인 쉴즈(Gerneral James Shields)를 비난하는 글을 뿌리기도 했다.


적 설정(設定)은 중요한 전략 중 하나다. 적이 정해질 시 최소한 그와 동일 선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라틴 격언 중엔 '내 적은 나를 인도하는 북극성이다'라는 말도 전해진다.


기삿감이 될 만한 두 사람이 적수로 매칭되면 그 다음은 언론이 알아서 한다.


기자는 거물급의 편 가르기를 좋아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기사의 생명력은 '재밌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기자는 기자이기 앞서 월급을 받아 삶을 꾸려가는 샐러리맨이다. 기사가 죽으면 그 날은 허탕만 친 꼴이다. 기자들은 안다. 불 구경과 싸움 구경이 가장 재밌다는 옛말처럼, 싸움을 중계하는 기사가 높은 확률로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박원순 시장은 자기자신을 위해 급(級)이 맞는 적이 필요했다. 또 그와 적이 되기 위한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서울시장 이력을 가진 이명박 전 대통령 이후 서울시장이 가진 소통령(小統領) 이미지는 더욱 강해진 때였다. 이 덕분에 박원순 시장은 장관급보다도 더 높은 이를 적으로 해도 이상한 눈초리를 받지 않았다. 그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을 적으로 겨냥했다.


무기는 '청년수당'(청년활동지원사업)이다. 물론 애초 이 정책이 그런 목적으로 추진된 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박원순 시장이 2015년 11월에 내놓은 이 정책은 미취업 청년의 구직활동을 돕기 위한 차원에서 고안됐다. 청년에게 최대 6개월간 50만원씩 무상으로 돈을 준다는 게 핵심이다. 무상이란 말은 당시 청와대와 여당,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철학에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청년수당은 실효성 논쟁이 이어졌고 자연스레 찬성 측은 박원순 시장, 반대 측은 박근혜 대통령이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적 설정에 성공한 모습이다.


기사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진다. 청와대·정부와 일개 지방자치단체의 싸움이다. 박원순 시장이 실행력을 얻기는 힘들었다. 청년수당 추진은 수개월째 지지부진했다. 그에겐 이 구도를 굳힐 한 방이 필요했다.


갑옷에 대한 실험은 대개 실패했다. 갑옷을 보호 수단으로 하는 생명체의 움직임은 둔했다. 이들은 육식동물과 떨어진 곳에서 몸을 떨며 식물을 먹고 살아야만 했다. ≪로버트 그린, 전쟁의 기술≫


청년수당 발표 9개월 뒤인 2016년 8월은 기자들도 당황한 달이었다.


박원순 시장은 이달 4일 1기 청년수당 대상자를 발표하며 1차분 50만원을 기습 지급했다.


당시 서울시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기습 지급이 이뤄지기 직전 서울시와 보건복지부는 구두(口頭) 합의를 끝냈다. 지난한 싸움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객관성 부족 ▷공공재원으로 지원하기에 부적절 등 말을 바꾸더니 반대노선에 올라섰다. 보건복지부에 대한 청와대의 압박이 있었다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박원순 시장이 기습 지급을 한 것 또한 이런 계산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보건복지부는 같은 날 오전 9시 직권취소처분을 내렸다. 이미 3000명에 대한 지급은 끝난 상태였다.


어떤 일에 대해선 놀라울만큼 입 단속을 못하는 서울시가 어떤 사안을 두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첩보작전을 펼치곤 한다. 이번 청년수당 기습지급 사태가 그런 사례였다.


박원순 시장은 이미 보건복지부 안을 최대한 받았으니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처분에 불복하고 대법원에 제소·가처분신청을 하기 이르렀다.


싸움의 불씨가 당겨졌다. 탄력받은 그는 굳히기에 들어간다. 청년의 아픔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을 뿌리면서 한편으론 박근혜 대통령을 아낌없이 언급했다.


같은 달 8일에는 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청년수당은 2년 넘는 시간동안 청년이 스스로 만든 정책"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이 정책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겠다"고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보건복지부·고용노동부 등 관계부처를 건너뛴 노골적인 말이었다.


그 말은 받아들여질 리 없었으나 손해없는 장사였다.


면담이 이뤄지면 대통령과 논쟁을 이어가는 급이란 이미지만 굳어진다. 안 이뤄진다 해도 신문·방송에서 나란히 노출된다. 자신은 타협을 원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말을 듣지 않았다는 대칭되는 이미지도 더욱 다질 수 있다. 추측과 해석, 충돌과 갈등. 이런 관계는 모두 언론으로 가공됐다. 기자들이 다루기에 참 좋아하는 구도였다.


박근혜 대통령과 관계가 정립되며 박원순 시장의 평판은 좌파를 중심으로 더욱 좋아지는 듯했다.


음악판에서 곡을 뽑는 과정을 떠올리면 더 쉽다. 작곡가는 모두가 밋밋하게 좋아하는 곡을 타이틀로 두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은 확실히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확실히 싫어하는, 선명한 곡을 타이틀로 둔다.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1469~1527)가 쓴 ≪군주론≫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현명한 자는 친구보다 적에게 더 큰 이익을 얻는다. 마땅한 적이 없으면 적을 만들어야 한다'. 적이 있다는 건 이에 대응하는 또다른 적이 있다는 뜻이며, 적의 적은 내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싫어하는 상당수가 알게 모르게 박원순 시장을 응원하기 됐다는 이야기다.


우여곡절 끝에 2017년 4월께 보건복지부는 다시 말을 바꿔 청년수당을 재허가했다. 라이벌을 만들어준 데 이어 이슈몰이를 하고, 정책 추진 자신감도 심어준 정책이다.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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