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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esar Choi Aug 31. 2017

하이에크 [노예의 길] 대신 읽기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사람 때문에 이 세상은 정확히 천국으로 떨어진다.” 

이 한 문장이 바로 ‘노예의 길’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고전은 하이에크가 쓴 ‘노예의 길’ 입니다. 


이 책은 하이에크가 1944년, 2차 대전 기간 중,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변화가 전체주의의 흐름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여 경종을 울리고자 쓴 책입니다.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즘의 사상적 발원은 모두 전체주의입니다. 

전체주의를 기반으로 다들 나름의 극단으로 간 생각들입니다. 

하이에크는 전 세계가 전체주의로 가는 흐름 자체에 대해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책을 썼습니다. 


하이에크가 전체주의의 대치되는 개념으로 소중하게 내세운 가치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는 자유는 어떠한 이유로든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설파합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유’란 무엇일까요? 


개인의 자유에 대한 하이에크는  

“인간으로서의 개별 인간에 대한 존중. 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견해와 선호를 최고로 인정함과 동시에,  

각각의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과 취향을 발전시키는 것이 좋다는 신념’ 

이 바로 ‘자유’라고 이야기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자신이 그 잘못의 원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합니다. 

그래서 외부, 즉 사회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하고 그 사회를 개조, 통제함으로써 해결책을 찾으려 하죠. 


자유주의는 문제를 점진적이고 천천히 해결해 나갑니다. 사회주의자들은 그것을 장애물로 인식합니다. 

통제를 통해서 즉각적인 결과를 얻기는 쉽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확실히 이득이 되죠. 

하지만 문제 하나를 통제로 해결함으로써 다른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보지 못 합니다. 

사회 통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당연히 야심이 커진다. 

대중도 그 성공으로 인해 예전 같으면 참았을 문제들을 인내하게 됩니다. 

조급증, 특권을 방어하기 위한 자유주의를 향한 공격, 물질적 진보의 확대를 위한 야망 등이  

점점 커지면서 거대한 특권, 권력을 지닌 집단, 사회가 생겨납니다.
  

사회주의는 유토피아를 약속하며 진보주의자들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사회주의는 ‘새로운 자유’라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꾸며 부의 동등 분배를 이뤄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과연 이런 것을 누가 어떻게 해줄 수 있겠는가?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그 누군가’가 해주려면 그 누군가가 권력을 쥐게 됩니다. 

결국 자유의 길을 찾아가는 듯하고 따르지만 예속의 길. 노예의 길로 가는 겁니다. 


 

사회주의는 또한 계획경제를 주장하며 경제 전체를 어떤 공공의 선,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조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그 계획경제가 다른 수단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계획경제의 목표가 아니라 그 수단 그리고 방법이 초래할 결과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계획과 사회주의의 계획은 다릅니다. 

우리의 계획은 앞으로 어떻게 할까에 대한 합리적 고민에서의 계획이지만,  

사회주의는 중앙 계획, 통제를 통해 “무엇이 최선이다”에 대해 자기들이 방법을 자신들이 짜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커다란 힘이며 권력이며 강제력을 필요로 한다.  

그 힘을 국가가 보유하게 된다.  

경쟁에서 이기는 자는 착취하는 자로 치부되고 공정한 경쟁이라도 경쟁 자체를 죄악시하는 풍토가 조성됩니다. 


 

경쟁에 대한 적개심으로 경쟁을 파괴되고, 자본가/노동자와 결합된 독점행위를 초래하고,  

급기야는 이 독점 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선동하게 됩니다.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국가가 다시 개입해야 합니다.  

경쟁 시스템을 복귀시킨다는 미명 하에 통제는 더욱 늘어나게 됩니다. 


계획 열광자들에게는 자기들이 이루고 싶은 이상이 있다. 

계획/목표를 성취하려면 오직 ‘중앙 계획/통제’만이 가능한 수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계획’을 주장한다.  

그들은 자기의 가치관이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모든 개인은 다 다르죠. 

개인의 목적을 모두 모아서 하나의 사회의 목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공통되는 가치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 전체의 필요들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어떠한 조직에서도 제한된 영역 외에서는 어떤 최고의 선 따위는 있기가 어렵다. 

그 영역 밖에 나가면 더 이상 최고의 선이 아니다. 

국가가 자신의 밖을 통제한다는 것이 결국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는 각 개인이 정할 일입니다. 

도로에서 각  개인에게 어디로 가라고 까지 명령을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국가는 도로를 만들고 교통 규칙만 정하면 됩니다. 


이 외에도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들이 소개 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통제, 통제하는 사람/통제당하는 사람, 무차별 보장, 전체주의 체제에서 히틀러 같은 사악한 인간들이 권력을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 진리의 종말 등 다양한 챕터가 있습니다. 


사회주의/전체주의를 따르다 보면 국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되며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독재의 길, 나치즘/스탈린 공산주의/파시즘 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보여주는 ‘노예의 길’ 


 

시간나실 때 한번 읽어보시면서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보시는 계기가 되셨으면 합니다.




협상의 전략에서 끌어올린 몇 가지 문장을 소개한다.


<1장 버려진 길>

유럽 현대사의 전 기간에 걸쳐 사회발전의 일반적 방향은 각 개인들이 일상적 활동을 할 때 관습이나 정해진 방식을 따르게 한 속박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개인의 에너지가 족쇄로부터 해방되자 나타난 가장 큰 결과는 아마도 과학의 경이로운 성장일 것이다.




<2장 위대한 유토피아>



민주적 방법에 의해 성취되고 유지되는 사회주의란 유토피아의 세계에서나 존재한다.

...


지난 몇 세대의 위대한 유토피아였던 민주사회주의는 달성할 수 없다.





<3장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자유주의는 경쟁이 대개의 경우 알려진 방법 중 가장 효율적이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더 크게는 강제적이고도 자의적인 간섭 없이도 우리의 행위들이 서로 조정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경쟁을 우월한 방법으로 간주한다.





<4장 계획의 '불가피성'?>


만약 우리가 산업체제의 성장을 위해 의식적인 중앙집권적 계획에 의존했어야 했더라면, 경쟁을 통해 실제로 도달했던 수준의 다양성과 복잡성, 그리고 유연성은 결코 실현되지 못 했을 것이다.

...중앙지시 라는 (얼핏 보기에는) 더 명백한 방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툴고, 원시적이며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


경제학자가 원하는 것은 바로 '전지한 독재자'가 필요 없으면서, 그와 같은 조정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그 어떤 방법이다.





<5장 계획과 민주주의>


개인주의 입장의 본질은 바로 개인을 자기 자신의 목적에 대한 최종적 재판관으로 인식하는 것, 즉 가능한 한 자신의 견해가 자신의 행동을 지배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른바 '사회적 목적'이란 단지 많은 개인들의 동일한 목적에 불과하다.

...개인들이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있어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대신 그 보답으로 기꺼이 그 달성에 기여하고자 하는 공동의 목적에 불과하다.


그 뿐만 아니라 불행하게도 우리는 공동행위의 영역을 무한정 확장시키면 개인들이 자신의 영역 안에서도 자유롭게 남겨질 수 없다.


권력을 자의적이지 않도록 방지해 주는 것은 권력의 '원천'이 아니라 권력의 '제한'이다.

...비록 민주적 절차를 통해 어떤 일을 하기로 결정하였더라도, 그 일의 달성을 위해 권력의 사용이 반드시 필요하며, 권력의 사용이 확고한 규칙들에 의해 제약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권력은 틀림없이 자의적이 될 수 밖에 없다.





<6장 계획과 법의 지배>


국가는 단지 일반적 유형의 상황에 적용되는 규칙을 확립하는 일에 그 자신의 임무를 제한하여야 하며,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에 따라 변화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각 개인들에게 사적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진보적 사회들의 추세는 지금까지 신분에서 계약으로 가는 운동"


이런 식으로 민주주의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독재조차 합법적 제도로 만들 수 있다.


경제활동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시도하는 국가에서는 개인의 권리와 소수의 동등한 권리에 대한 형식적 인정조차도 의미를 잃어버린다.





<7장 경제적 통제와 전체주의>


현대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에게도 불과 몇 세대 전 부자에게만 열려 있던 것 보다 더 크고 놀라울 정도로 넓은 선택의 범위를 가능케 해 준 것이 바로 화폐이다.


경제 계획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더 이상 개인으로서 무엇을 한계적으로 여기는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경제적 통제는 우리의 모든 목적들을 위한 수단의 통제이다.


독점자와 대면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의 자비를 바랄 수 밖에 없게 된다.


계획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아도 합리적이거나 효율적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진정한 경제적 자유란 선택의 권리를 가진 상태에서 그 권리에 불가피하게 따르는 위험과 책임을 함께 동반하는, 우리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의미할 따름이다.





<8장 누가, 누구를?>


그러나 경쟁 시스템에서는 가난하게 출발한 사람도 큰 부를 쌓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큰 부가 자신에게만 달려 있을 뿐 권력자의 선처에 달려있지 않다. 경쟁 시스템은 아무도 누군가가 큰 부를 이루려는 시도를 시도를 금지할 수 없는 유일한 시스템이다.


불평등은 의도적 설계에 의한 것일 때보다 비인적 힘들에 의해 결정되었을 때에 훨씬 더 기꺼이 용납될 것이며, 그 사람의 존엄성에 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완전한 평등에 목표를 두었던 어떤 사회주의 운동도 미미한 수준을 넘어서는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한 적이 없다. 사회주의가 약속한 것은 절대적으로 평등한 것이 아니라 더 정의롭고 더 평등한 분배였다. 절대적 의미에서의 평등이 아니라 '더 큰 평등'이 심각하게 달성하려고 했던 유일한 목표였다.


극소수의 몇 사람이 모든 사람의 중요성을 균형 있게 재어서, 그 몇 사람의 즐거움과 판단에 따라 누구에게는 더 주고 다른 이에게는 덜 준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들을 초인간적 존재라고 믿고 있고, 초자연적 테러에 의해 지지되지 않으면 (결코) 용인되지 않을 것이다.





<10장 왜 가장 사악한 자들이 최고의 권력을 잡게 되는가?>


단호한 행동 자체를 하나의 목표로 만든 것은 민주적 절차의 느리고 번거로운 과정에 대한 불만이었다...

...군대식으로 조직된 새로운 유형의 정당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이다.


최대의 사람을 연합시키는 것은 가장 낮은 수준의 공통된 분모이다.


잠재적 독재자는 자기 자신의 강한 확신이란 전혀 없지만, 이미 만들어진 가치체계를 귀에 대고 충분히 크게 자주 틀어주기만 하면, 이를 쉽게 받아들이는 모든 순종적이고 잘 속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막연하고 불완전하게 형성된 자신의 사상들이 쉽게 흔들리고, 열정과 감정이 금방 일어나 전체주의 정당의 크기를 부풀리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사람들이 긍정적 과제보다는 적에 대한 혐오, 더 잘사는 사람에 대한 질시와 같은 부정적 강령에 대해 더 잘 합의에 이르기 쉽다는 것은 거의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집단주의 철학의 내재된 모순 가운데 하나는 집단주의가 개인주의가 발전시킨 인본주의적 도덕들에 근거를 두는 반면, 비교적 소규모 집단에서만 실천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론에 머무는 한 사회주의는 국제적이지만, 실제로 적용되는 순간 러시아에서이건 독일에서이건 사회주의는 과격한 민주주의가 된다.


한 개인이 그 집단의 구성원으로서만, 즉 그가 잘 인지된 공통의 목적들을 위해 일하는 한에서만 존중받는다는 것은, 그리고 그가 전반적 존엄성을 단지 인간이라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이런 구성원이란 사실에서만 도출한다는 것은 이 집단주의 사고방식의 필연적 결과이다.





<11장 진리의 종말>


사회계획이 지향하는 하나의 목적체계에 모든 사람이 봉사하도록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모든 사람이 이 목적체계를 신봉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억압받는 느낌이 자유주의 국가의 사람들 대부분이 상상하는 것보다는 일반적으로 훨씬 덜 두드러지는데, 이것은 전체주의 정부가 아주 성공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전체주의 정부의 정책을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사회에서는 완전한 윤리규범에 대한 동의, 하나의 경제계획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전체를 포괄하는 가치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존재하지 않는 이런 가치규범은 필요하면 만들어야 하지만, 계획자가 그런 필요성을 인지하면서 경제계획 문제에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되며, 혹시 그가 이 필요성을 인지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포괄적 윤리규범을 미리 창출할 수 있다고 가정해서도 안 된다. 그는 단지 일을 하면서 서로 다른 필요들 사이의 충돌에 대해 알게 될 뿐이며, 그런 충돌간에 결정을 내릴 필요성이 생길 때마다 결정을 해야 할 뿐이다. 그의 의사결정을 안내하는 가치규범이 결정이 내려지기 이전에 이미 추상적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특정한 결정들과 함께 창출되어야 한다.


따라서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공개적 비판이나 혹은 의심의 표시는 공공의 지지를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억압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사상의 자유는 없다. 왜냐하면 대중들의 의견이나 선호는 정치선전, 광고, 상류계층에 대한 모방에 의해서 형성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하여금 불가피하게 판에 박힌 관례에 따라 생각하게끔 강요하는 여타 환경적 요인들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이런 통제력을 의도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서로 다른 지식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다양한 개인들의 이러한 상호작용이 바로 사상의 생명을 구성하는 전부이다. 이성의 성장은 그와 같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근거한 사회적 과정이다.





<13장 우리 속에 잠재된 전체주의>


주지하다시피 특히 새롭고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데 있어 지도자는 바로 자신들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시끄럽게 소리치던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그 어떤 여타 계급보다 더 자진하여 새로운 독재에 굴종하였다.


독점이란 기구는 국가라는 기구와 동일하게 되며, 국가 그 자체가 일반국민들의 이해보다는 점점 더 일을 경영하는 자들의 이해와 밀착하게 되어 정책 수립의 독립성은 약화되기 때문이다.


단지 독점자의 지위를 다시 한번 경제정책의 매를 맞는 자가 되게만 하라. 그러면 보다 유능한 기업가들 대부분이 얼마나 재빨리 경쟁이라는 긴장이 감도는 상큼한 공기에 대한 자신들의 취향을 다시 발견하는가를 보고 당신은 놀랄 것이다.





<14장 물질적 조건과 이상적 목표들>


우리 주변의 세계가 더 복잡해질수록 우리가 이해하지 못 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우리의 개인적 꿈들과 계획들에 영향을 주는 힘들이 있게 되며, 이런 힘들에 대한 우리의 저항심도 커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문명과 같은 복잡한 문명은 필연적으로 각 개인이 그 원인과 속성에 대해 그 자신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변화에 그 자신을 적용시키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왜 그가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가져야 하는지, 왜 그가 다른 직업으로 옮겨야 하는지, 왜 그가 원하는 어떤 것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얻기 어려워야 하는지, 이런 의문들은 언제나 도저히 어떤 한 사람의 정신으로는 그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는 그런 무수한 상황들과 맞물려 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최소한이 확보되도록 하자.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기본적 최소한의 보장과 함께 특정 계급의 특권적 보장에 대한 모든 권리주장은 소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자.






<15장 국제질서의 전망>



그래서 경제계획은 불가피하게 사람과 재화의 이동에 대한 산더미 같은 규제를 낳게 된다.


계획규모를 국제적 수준으로 확대하면, 국가적 규모의 계획이 야기하는 명백한 위험의 일부는 회피하게 되겠지만, 그런 야심적 국제수준의 계획을 주창하는 이들은 그런 계획이 창출할 훨씬 더 큰 어려움과 위험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국제적 규모의 계획은 국가적 규모로 계획할 때보다 더 심각하게 물리력의 벌거벗은 지배일 뿐이다. 즉, 소수의 집단을 대변해서 계획자가 나머지 사람들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생활 수준과 고용을 강제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필요하고 달성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책임한 국제경제당국의 손에 더 많은 권력을 쥐어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경제적 이해관계들을 억제할 수 있고, 스스로 경제적 게임에 휩싸이지 않기 때문에 이해관계 사이의 충돌에 대해 진정으로 판정을 내릴 수 있는 상위의 정치적 권력이다...

...국제 기구에 위임해야 할 권력은...본질적으로 초자유주의적 '자유방임' 국가의 권력이다.


우리는 대규모 단위에서 문명을 재건하려 해서는 안 된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므로, 오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숙한 문제들에 대해 책임감을 배우고 실천해 볼 수 있는 곳에서, 오직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라기보다는 나의 이웃이 있다는 의식이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 주는 뜻에서 그들은 공공의 문제에 대해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결론>

우리는 전쟁발발 이전에 이미 '진보를 계획'하기 보다는 진보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특정한 단계에 다시 한 번 도달했었다.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만들어졌던 우리의 길을 막았던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개인들을 '지도'하고 '명령'하기 위한 또 다른 기구들을 고안하기보다는 개인의 창의적 에너지를 분출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만약 자유로운 사람들의 세상을 창출하려는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했다면, 우리는 다시 시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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