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향기를 간직한 만년필가게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이 종영되었다. 시청률‧수익률 면에서 새로운 기록을 쓰고서다. 최고 시청률은 18.3%, 직‧간접 수익은 250억원에 달해 출연진과 제작사를 웃게 했다. 시간을 27년 전으로 돌렸기에, ‘지나치게 옛날로 간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기우(杞憂)였다. ‘속편은 전편보다 못하다’는 소포모 징크스(sophomore jinx)도 깼다.
<응팔>의 인기가 한 단면을 보여주듯 세상은 복고(復古)열풍이다. 경기침체와 ‘결코 밝아 보이지 않는 미래’ 속에서 사람들은 ‘옛것’에 대한 향수는 점점 더 커져만 가는 듯하다. 경제학자들은 고되고 팍팍한 삶, 경기침체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 심화로 인하여 생긴 현실에 대한 불만족의 탈출구로 복고열풍이 분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복고열풍 속에서 ‘스마트폰 없이는 하루도 못 살듯 하던’ 검지족들도 아날로그 돌아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손글씨 쓰기 유행이다. 필사(筆寫) 붐도 만만치 않다. 사람들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필사 수도사처럼 『성경』을 베끼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명작들을 베끼며 정화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필사책’은 이미 새로운 출판 장르로 자리 잡았다. 단순 ‘베껴 쓰기’에 만족하지 못 하여 보다 예술적이고 독창적인 ‘나만의 글씨’를 원하는 사람들은 캘리그라피(Calligraphy)의 세계로 입문하기도 한다.
검지족들에게 불어온 손글씨 쓰기 유행 속에서 볼펜, 사인펜에 밀려나 한동안 찬밥 신세였던 만년필도 인기를 더하고 있다. 상승곡선을 그리는 만년필 업계 매출액 그래프가 이를 증명한다. 만년필도 이른바 잘나가는 아저씨들이 안주머니에서 꺼내던 ‘시커멓고 번쩍이는’ 중후한 옷을 벗고 파스텔톤의 화사한 색깔로 바꿔 입었다. 무게도 가격도 한결 가벼워졌다.
젊은 세대들이 가장 아날로그적인 필기구라 할 수 있는 만년필을 다시 사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힘을 빼고 써야만 하기에 장기간 필기해도 손에 부담이 없다. 더불어 펜촉의 두께, 잉크, 종이 질, 등에 따라 모양도, 글씨 번짐도 달라지는 만년필은 ‘나만의 글씨’를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최적의 필기구라 할 수 있다. 사용자의 필기 습관, 필압(筆壓) 등에 따라 펜촉의 모양이 달라지는 이른바 ‘길들이는 과정’을 거쳐 만년필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펜’이 된다. 관리만 잘 해주면 만년(萬年)은 못 써도 수 십년, 수 백년을 쓸 수 있다.
무엇보다 만년필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아날로그적 매력이 넘치는 필기구다. 각 브랜드, 제품별로 저마다의 특징이 있고, 만년필 몸체 재질, 도장방법 등에 따라 쥐었을 때 느낌이 다르다. 만년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촉도 스테인리스 스틸이냐, 이리듐(iridium)이냐, 금이냐에 따라 서로 다른 필감을 준다. 얇은 펜촉은 글씨를 쓰면 빙판 위 스케이트처럼 날카로운 매력이 있고, 두꺼운 펜촉으로 쓸 때에는 설원(雪原)에서 스키를 타는 듯 한 부드러움이 있다. 이러한 매력 때문에 스마트폰 터치에만 익숙하던 검지족들도 만년필 필기 특유의 사각거림을 즐기며 손글씨 쓰기의 재미에 빠져들고 있다.
만년필이라 부르는 필기구의 원이름은 ‘fountain pen’이다. 이전의 펜이 글씨를 쓸 때 마다 매번 잉크를 찍어서 사용했던 것에 비해, 몸체(배럴)에 잉크를 저장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한 펜의 탄생은 일대 혁신 이었다. ‘잉크가 영원히 넘쳐나다’를 시적인 표현으로 ‘샘처럼 솟아오르다’라고 표현하여 ‘샘’ 또는 ‘분수’의 뜻을 지닌 ‘fountain’과 'pen'이 합쳐져 ‘fountain pen’이라는 새로운 고유명사가 탄생하였다. 이후 ‘만년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워터맨(Waterman)은 모세혈관 원리를 응용하여 잉크가 알맞게 흘러나오도록 만든 근대 만년필의 원형을 만들었다. 여기에 쉐퍼(Sheaffer), 파커(Parker) 등 만년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이 저마다의 기술과 노하우를 추가,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만년필로 진화하였다.
구미(歐美)가 원향인 이 혁신적인 펜은 아시아로도 전해졌다. 이를 두고 처음에는 영어를 직역한 ‘천필(泉筆)’, ‘잉크(먹)를 토해낸다’ 하여, ‘토묵필(吐墨筆)’ 등으로 불리다, 훗날 ‘잉크만 넣어 오랫동안 쓸 수 있다’는 뜻에서 ‘만년필(萬年筆)’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메이지(明治)유신 무렵 일본에서다. 다만 중화권에서는 이를 ‘강철로 만든 펜’이란 뜻의 ‘강필(鋼筆)’으로 불리고 있다.
만년필은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필기구다. 만년필을 사랑한 사람들에는 글쓰기를 밥벌이 수단으로 삼아온 사람들이 빠지지 않는다. 만년필은 작가들의 손에 쥐어져 ‘창작의 도구’가 되어왔다. 『마음(心)』이란 작품으로 세대를 뛰어 넘어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주로 사용한 만년필은 영국 오노토(Onoto)사 제품이었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탄생시킨 추리소설의 대가 아서 코난 도일(Sir Arthur Ignatius Conan Doyle)은 만년에 파커 만년필로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들 중 만년필을 사랑한 대표적인이로는 마크 트웨인(Mark Twain)을 들 수 있다. 그는 콘클린(Conklin) 브랜드를 특히 사랑하였고, 몸소 광고에 출연하기까지 하였다.
한국 작가들 중 이병주는 쉐퍼, 박경리‧최명희‧최인호는 몽블랑(Montblanc), 박목월‧박완서는 파커 만년필을 사용, 숱한 명작들을 세상에 선보였다. 이태준은 수필 「만년필」에서 아끼던 무어(Moore) 만년필을 잃어버린 애틋한 심정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나의 만년필』이라는 수필집을 남긴 박완서는 시조시인 이영도로부터 선물 받은 파란색 파커 만년필로 1970년대~80년대 주옥같은 작품들을 썼다. 그러다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려 만년필이 고장 나자, 상심한 나머지 ‘앞으로는 글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미신에 빠지기도 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만년필 마니아였다. 이처럼 작가들과 인연이 깊은 존재였고, 이에 몽블랑, 몬테 그라파(Monte Grappa) 등에서는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모티프로 한 ‘작가 에디션’을 발매하기도 한다.
작가는 아니지만 만년필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고상하게 만년필 애호가 내지는 마니아, 속되게는 ‘만덕(만년필 덕후)’이라 불리는 이들이다. 이른바 만덕들은 ‘덕후의 기본자세’에 충실하여 각양각색의 만년필을 수집하는 것은 물론, 서로 다른 브랜드, 제품, 서로 다른 펜촉(nib)과 잉크를 비교해가면서, ‘쓰는 즐거움’과 ‘손맛’을 공유한다.
서울의 10년 전 혹은 20년 전 모습을 보는 듯한, 아날로그 분위기가 물씬한 도시 타이베이, 그중에서도 <응팔>에 나올법한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뒷골목에 한국 만덕들의 구미를 한껏 당기게 하는 만년필 가게가 자리하고 있다. 이름 하여 ‘소품아집(小品雅集)’, ‘작은 물건들의 아담한 모임’이라는 예쁜 뜻을 지녔다.
타이베이시 다안취(大安區) 루이안제(瑞安街), MRT 다안역에서 내려 5분쯤 뒷골목으로 들어간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한 소품아집은 이미 그 명성이 바다 건너까지 알려졌다. 해외 직구족들이 인터넷 상점을 통해 구매하는 것은 물론, 좀 더 극성스러운 애호가들은 ‘성지순례’하듯 들리곤 하는 곳이다.
지상과 지하, 2개 층으로 이루어진 소품아집은 이름그대로 아담하다. 진열장에는 몽블랑, 파커, 워터맨, 쉐퍼, 몬테그라파, 오로라(Aurora), 펠리칸(Pelikan), 카웨코(Kaweco), 듀폰(Du Pont), 크로스(Cross) 등 구미 저명 브랜드 뿐만 아니라, 일본 3대 브랜드로 꼽히는 파이롯트(Pilot), 세일러(Sailor), 플래티넘(Platinum)에 더하여 한국인들에게는 다소 생경한 라이프(Life), 미도리(Midori) 톰보우(Tombow) 등 제품들이 가득하다. 여기에 한국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를 더해가는 파버카스텔(Faber-Castell), 라미(Lamy), 대만고유브랜드 트위스비(TWSBI, 三文堂)도 빠지지 않는다. 각종 펜 뿐만 아니라, 잉크, 노트, 펜 파우치 등 현대판 문방사우(文房四友)들로 가게가 빼곡하다.
굳이 가격표를 보지 않아도 그 이름만으로도 보는 이 기죽게 하는, 이른바 명품 브랜드 만년필들의 우아하고 오만한 자태를 보면서 ‘언제쯤 저런 걸 한번 손에 쥐어 보나?’라고 생각하는 사이, 여느 대만사람처럼 친절하기 그지없는 점원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대만‘트위스비’ 만년필을 찾는다.”고 하자, 옆 진열대로 안내해 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이봐요, ‘일본인’ 손님 오셨어요.” 내가 “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에요.”라고 하자, 미안하다며, 일본인인줄로 오해했다며, 웃었다. 다만 외국인이 대만브랜드 만년필을 찾자 싫지는 않는 눈치다. 나를 인계받은 직원은 여러 종류의 제품들을 진열대 위로 꺼내서 한번 시필(試筆)해 보라며, 종이를 권했다. 만져도 보고, 써 보면서 “이러 이러한 제품 보여 주세요.”라고 하니, “어떻게 그걸 다 아느냐?”며 놀랬다. “제 선생님께 드릴 선물용 만년필을 사고 싶다.”며, 선생님 연세 등을 설명하니, “이게 좋을 듯 하다.”며, 만년필들을 보여준다. 한 10여분 동안 이것저것 꺼내서 요모조모 비교해 보고, 직원에게 묻기도 하면서 마지막으로 구입할 만년필을 결정하였다.
이것으로 1차 목표는 달성하였고,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갔다. 여기에 온 진짜 목적을 설명하며, 혹시 “라오반(老板, 사장)이세요?”라고 물어보니, 웃으며 손사래 친다. “제가 이렇게 젊은데 무슨 사장이겠어요?” 그러면서 한 중년남자에게 안내했다. 리타이잉(李台營)사장이셨다. 후덕한 인상의 그는 탁자에 자리를 권하며, 커피를 내 오셨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소품아집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고 하니, “안그래도 한국에서 오시는 손님들도 많아요.”하며, 반색한다.
탁자 위에는 나도 아는 일본 플래티넘과 이탈리아 펠리칸, 그리고 ‘이름 모를’ 브랜드의 낡은 만년필 한 자루가 놓여있었다.
“실례지만 한번 써 봐도 되나요?”라고 하니, 흔쾌히 “그럼요.”라며, 시필지를 권한다. 고급 브랜드 만년필답게 부드럽게 잘 써졌다. 그중 칠이 벗겨지고, 흠집이 나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이름 모를 브랜드 만년필도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잘 써졌다. 잉크 흐름도 좋았다. “이건 처음 보는 브랜드인데 어디건가요?”라고 묻자, “‘스완(Swan)’이라는 브랜드인데, 예전에 정말 유명했죠. 영국 브랜드에요. 130년 전쯤 만들어진 만년필이에요.”라며, 외국인인 내가 혹시나 못 알아 들을까봐 ‘England’를 힘주어 말하신다. 그러며 “내가 좋아하고 늘 지니고 다니는 만년필이죠.”라며, 스완 만년필이 설명된 도록도 보여주셨다.
그와 만년필을 주제로 한담을 나누는 사이, 내 또래 젊은 손님이 탁자에 앉았다. 필객(筆客)내지는 필우(筆友)였다. 손에 든 화사한 무늬의 파우치에서 마치 보물을 꺼내듯 조심스레 만년필들을 꺼냈다. 나도 아는 일본 브랜드, 미국 브랜드의 만년필과 더불어 또 다른 낯선 만년필이 있었다. 자그마한 은색몸체의 제품이었다. “이건 어디서 만든 건가요?”라니, 일본 무인양품(無印良品, MUJI)거란다. 한번 써 보고 싶다니, 바로 오케이. 미끄러지듯 잘 써진다. 필감이 좋아서 “비싼거죠?”라고 『어린왕자』의 ‘어른들의 질문법’으로 물어보자, “아니에요. 전혀 비싸지 않아요. 380NTD(14,000원)정도 밖에 안 해요.”라며 웃는다.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천량지(陳亮吉)씨는 리사장의 필우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대로 가게를 찾아 한담도 나누고, 만년필에 관한 정보도 교환한다고 한다.
사실, 리타이잉 사장은 소품아집을 열기 전부터 인터넷 상에 펜동호회를 결성하였다. 동호회 이름은 ‘필각(筆閣)’이다. 이를 중심으로 만년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오프라인 아지트’겸 영업장으로 소품아집을 개업하기에 이른 것이다.
리타이잉 사장께 언제부터 소품아집을 시작하셨냐고 물어보니, 1981년 타이베이시
랜디스호텔(都麗緻大飯店) 뒤편에서 연 ‘소품아주(小品雅廚)’라는 식당에서 가게이름이 유래했다며, 스마트폰으로 식당 사진을 보여준다. 식당영업시간이 저녁~밤 시간 대였기에 자연 낮 시간은 비었기에 그동안 만년필도 사고, 동호인들도 만나면서 활동의 폭을 넓혀 왔다. 그러다 필각을 만든데 이어, 만년필가게를 열게 된 것이다.
이런 리타이잉사장이 그동안 모은 만년필은 무려 10,000자루가 넘는다. 만년필이 결코 싼 물건이 아니기에 단순 금액으로 따져도 엄청난 가치다. 게다가 뒷골목이라고는 하지만 타이베이 시내 중심부에 직원도 여럿 둔 번듯한 상점까지 가지고 있고, 주로 파는 물건도 만년필이다. 자연, 리타이잉 사장에게서는 지적이고 부유한 분위기가 넘쳤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건 어쩜 자연스런 일이었다.
“집안이 부유하셨나 보네요?”라는 질문을 하자, 돌아온 대답이 의외였다. “나는 본래 3무(無)의 사람이에요. 집안배경, 가산, 학력 모두 없는 사람이죠.” 그러면서 만년필은 단지 아름답고, 실용적이기에 좋아하고 모으는 대상이지, 투기나 재산 증식의 수단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만년필을 수집할 돈을 부동산이나 주식 사는데 썼다면, 지금쯤 큰 부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죠.”
1951년생인 그는 집안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였다. 그 시절 대만대부분 사람들이 그러했듯 가난했기에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고, 한때 미국으로 건너가 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모은 돈으로 자신의 식당을 열고, 만년필 수집과 공부도 병행하였다.
리타이잉 사장이 태어나고 자란 시대는 ‘필기구의 역사’에서 ‘볼펜 시대’ 도래 이전의 ‘만년필 시대’였다. 예나지금이나 결코 싼 가격은 아니지만 만년필은 대표적인 필기구였고, 쉽게 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지금의 볼펜과 스마트폰 못지않게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이기도 했다. 리타이잉 사장의 회고에 따르면 야채시장 한켠서도 만년필을 팔았을 정도로 흔하다면 흔한 물건이었다.
그가 만년필과 사랑에 빠진 것은 어언 40년 전이다. 우연히 접하게 된 만년필을 보고서 사랑에 빠졌다. 후로 열렬한 수집가를 거쳐 유명 만년필 가게 사장으로, 나아가 만년필 문화 전도사로까지 변해왔다. 20대 홍안(紅顔) 청년의 만년필에 대한 순애보가 바꾼 인생역정이랄까?
이런 그에게 ‘우문(愚問)’인줄 뻔히 알면서도, 만년필의 매력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만년필은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라 할 수 있죠. 몸체(배럴), 촉(닙)이 각 브래드 마다, 제품마다 개성 있고 아름다워요. 게다가 시대마다 특징도 있죠. 무엇보다 만년필은 필기구이기에, 글자를 썼을 때 아름다움을 빠트릴 수 없어요. 만년필로 쓴 글씨는 살아있고, 글쓴이의 개성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 옛 제품 중에 특히 아름다운 만년필이 많다고 한다.
리타이잉사장에게 가장 아끼는 만년필은 뭘까? 족히 10,000자루가 는 만년필을 가진 그였기에, 단 한 자루만 고르라는 것은 확률상 ‘0.0001% 포인트’, 통계학적으로 ‘0’인 셈이다. 그가 가장 아끼는 만년필은 프랑스 듀퐁의 체어맨(Chairman)이라고 한다. 십 수년 전 경매에서 우여곡절 끝에 낙찰 받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한국이나 대만등에는 몽블랑이나 파커 듀오폴드(Duofol) 등이 고급 만년필로 알려져 있지만, 듀퐁 만년필도 성능이 우수하고 아름답다고 ‘만년필 세계 의 초보자’인 내게 자세히 설명해 준다. 한국에 돌아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실제 듀퐁 만년필은 최고급으로 꼽히고, 지난해 한불 정상회담 후 프랑수아 올랑드 (Francois Hollande) 프랑스 대통령이 한국정부에 선물한 제품도 듀퐁의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였다.
만년필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리타이잉 사장은 시필지에 자신이 좋아해서 늘 지니고 다닌다는 스완 만년필로 ‘석 삼(三)’자를 연달아 3번 썼다. 중산(中山) 쑨원(孫文)의 삼민주의(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가 떠올라, 민족‧민권‧민생을 이야기하자, “삼민주의를 아냐?”며 반긴다. 그러면서 지금은 평가가 엇갈리지만 중화민국의 국부(國父)로 불리어온 쑨원의 사상은 위대하다며, 중화민국과 쑨원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드러냈다.
“대만만년필 브랜드 트위스비에서 ‘중화민국 건국 100주년 기념판’으로 타이완(중화민국) 국기인 청천백일만일홍지기(靑天白日滿地紅旗)의 백색, 청색, 홍색을 사용한 제품을 만들기도 했더군요 라니, ‘맞다’면서, 사무실로 들어가 잡지 한권을 가져다 보여준다. 「타이완의계(臺灣醫界)」라는 의료계 소식지다. ‘의료계 잡지를 왜 보여 주시지?’라는 생각을 잠시 하는 사이, 잡지 중간 싣은 낸 소품아집 광고를 펼쳐 보여 주었다. 시리즈 광고였는데, 본디 의사였던 쑨원의 ‘구세의국(求世醫國)’ 정신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은 쑨원 사진이 들어간 광고가 실려 있었다. 더하여 트위스비의 중화민국 건국 100주년 기념판 만년필과 독일 잉크전문제조사 디 아트라멘티스(De Atramentis)에서 만든 역사인물 기념 잉크 중 ‘쑨원 기념판’ 잉크병 사진도 있었다. ‘사회단체, 학교, 회사 등의 무료 펜글씨 교육 요청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있어 “펜 글씨 교육도 하시나 봐요?”라고 묻자, 올바른 펜 문화 정립과 확산 차원에서 요청이 있을 경우 ‘올바르게 펜 잡는 법’, ‘펜글씨 쓰는 법’ 등을 무료 강의로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타오위안(桃園) 중위안대학(中原大學)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왔다고 한다. 디지털문명의 파고는 타이완도 비껴가지 않아, 대만젊은세대들 역시 손글씨를 직접 쓸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다 보니 철자법 틀리는 일이 잦아지고, 악필(惡筆)도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전통의 번체(繁體)자를 쓰는 타이완이기에, 손글씨를 쓰는 것은 더 어렵기도 하다.
이런 세태 속에서 리타이잉 사장과 필우들은 중화문화의 정수(精髓)이기도 한 한자를 제대로 쓰는 일에 발벗고 나서, 전통문화 계승에 이바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자에 대해 이리 말한다. “번체 한자는 그 자체가 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하나에 고유한 유래와 뜻이 담겨있고, 무엇보다 그 자체가 아름답죠. 이는 조상들이 물려준 중화문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소중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손글씨 쓰기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필법을 가르치는 것은 단순히 기술 차원을 넘어 문화 계승과 발전 차원에서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이 연장선상에서 일본 겐코사(玄光社)에서 낸 『만년필 교과서(万年筆の敎科書)』의 번체(繁體) 중국어판인 『강필교과서(鋼筆敎科書)』의 번역·]발행시 ‘소품아집’ 명의로 감수를 맡기도 하였다.
나도 나름 직업적으로 글쓰는 일을 하고 있지만, 필적(筆跡)이 좋지 못한 것은 사실, 나름의 콤플렉스이기도 하다. 게다가 나 역시 스마트폰과 컴퓨터, 인터넷 없이는 하루도 못 살 듯한 검지족의 일원이기도 하다. 다만 한가지 반가운 것은 복고 열풍 속에서 엄지족들도 손글씨 쓰기와 만년필을 다시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리타이잉 사장에에게 ‘지구상에서 한국과 가장 비슷한 나라’라는 타이완에서 만년필 이용 사정이 궁금하여, 근래 한국에서 젊은 세대들의 만년필 사용 열풍을 설명하며 물으니 이런다. “칭 칸(請看 : 보세요)!” 그가 가리킨 곳을 보니, 진열장 앞에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교복차림의 중‧고등학생들도 보였다. 게다가 그들이 호기심 반 물욕(物慾) 반으로 서 있는 브랜드도 근래 한국 젊은 층에게 인기 있는 것과 같은 브랜드. ‘역시 형제의 나라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완의 만년필 문화에 대해 좀 더 캐묻자 숫자를 이렇게 말한다.
“전체 가구 중에서 만년필을 사는 곳은 약 25% 정도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만년필을 사 놓고 제대로 사용하는 비율은 다시 25% 정도로 줄어들죠죠. 여기에 만년필로 제대로 된 글 한편이라도 쓰는 사람은 다시 25% 정도 됩니다. 다소 어폐가 있지만 ‘마지막 25%’에 속하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만년필을 제대로 쓰고 있는 것이고, 만년필 입장에서 본래 용도대로 유익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죠.”라며 웃었다. ‘만년필 사용 25%의 법칙(?)’인 셈이다. 덧붙여 만년필은 장신구가 아니라, 필기구라며, 만년필의 외관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필감(筆感)이며 비싼 만년필을 장식용으로 사 놓고 사용하지 않는 것 보다도, 적당한 가격대의 나에게 맞는 만년필을 사서, 잘 길들이고, 열심히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이처럼 40여 년째 ‘만년필 순애보’에 빠져 인생행로도 바뀐 한 남자, 그가 사랑하는 만년필이 가득한 소품아집. 이곳은 아날로그 분위기 가득한 도시 타이베이의 한적한 뒷골목에서 은은한 묵향(墨香)과 정겨운 사람의 향기로 만년필 애호가들의 발길을 끌어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