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근대화 물결이 넘실대던 단수이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와 부(富)를 지배한다.” 대영제국의 서막을 연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의 총신(寵臣) 월터 롤리(Sir Walter Raleigh)가 남긴 말이다. 그의 말처럼, ‘대항해시대’ 개막 이후 바다는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국가와 사람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바다를 통해서 이른바 서구식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들었고, 항구는 그 통로였다.
신베이시(新北市) 단수이구(淡水區). 오늘날 이곳은 타이베이 근교의 소항(小港)에 불과하지만, 150년 전 이곳은 대만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오던, 번창하던 항도(港都)였다. 이국타향(異國他鄕)에서 온 벽안(碧眼)의 사람들이 타이완섬에 발을 디디던 교두보였고, 대만특산품들이 팔려가던 곳이기도 했다.
‘짠맛 없는 맑은 물’이라는 뜻을 담아 단수이(淡水, 담수)라 불리는 도시의 옛 이름은 ‘후웨이(滬尾)’다. 타이완어(閩南語)로는 ‘호베(Hō͘ -bué)’라고 한다. 대만북부 지역에 터를 잡고 살던 원주민 케달갈란(凱達格蘭)족의 말에서 유래하였다. ‘후(滬)’는 어민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한 어망을, ‘웨이(尾)’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河口)라는 뜻이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원주민들의 물고기 잡이 터전이던 이곳이 ‘단수이’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바꿔 불리게 된 것은 청(淸)대 부터다. 이 시절 한인(漢人)들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개척민들은 원래 섬의 주인이던 타이완원주민들을 점차 산지로 내몰며 개척지를 넓혀 나갔다. 이 속에서 지명도 종전의 원주민식에서 중국식으로 바뀌게 되는데, 후웨이도 그중 하나였다. 청대만 하더라도 후웨이라는 원주민어 이름과 단수이라는 한자어 이름이 같이 쓰였다. 그러다 1912년 타이완총독부는 지명 사용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단수이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통일해서 사용하기로 결정,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단수이에 첫 발을 디딘 벽안의 사람은 남만인(南蠻人)으로 불리던 스페인인이다. 1571년 마닐라를 건설, 아시아 통상‧선교 사업의 거점으로 삼은 스페인은 동방교역로상에 자리한 타이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후 1626년 필리핀 총독의 명령을 받은 발데스(Antonio Carreno de Valdes)가 14척의 함선에 300명의 병사로 대만북부를 점령하였다. 스페인 원정대는 1626년 대만북부 지롱(雞籠, 오늘날의 지룽基隆) 허핑다오(和平島)를 점령, 산 살바도르(San Salvador, 聖薩爾瓦多城)요새를 구축하였다. 이후 1628년 단수이를 점령,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聖多明哥城)요새를 쌓았다.
지룽과 단수이에 거점을 마련한 스페인은 이 두 도시를 중개무역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다만, 스페인 본국의 쇠퇴, 영국과 네덜란드 등 대항해시대 후발주자들의 도전, 일본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의 쇄국정책 등으로 인하여 뜻하던 바를 이루지 못 했다. 자연 타이완의 전략적 가치는 낮아졌다. 대만주둔군 숫자도 400명 내외로 줄어들었다. 그러다 1642년 8월, 타이완에서 스페인 세력 축출을 꾀한 네덜란드 원정대가 지룽과 단수이로 출병하자, 전력 열세를 절감한 스페인군은 투항, 스페인의 16년 대만부분 통치는 종지부를 찍었다.
단수이에서 스페인 세력을 몰아낸 네덜란드는 산토 도밍고 요새 부근에 안토니오(Fort Santo Domingo)라는 성을 쌓았다. 훗날 이는 네덜란드요새 또는 붉은 머리칼(紅毛)의 사람들이 쌓은 성채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단수이 홍모성(紅毛城)이다.
1661년 ‘타이완의 영웅’ 정성공(鄭成功)은 네덜란드 세력을 축출, ‘대만400년사’의 제2장에 해당하는 명정(明鄭)시대를 열었다. 정씨왕조 치하에서 중국 본토와 인접한 단수이는 타이완과 대륙을 이어주는 교역장으로 발전하였고, 한인과 원주민 간 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683년 청 강희제(康熙帝)는 정성공-정경(鄭經)-정극장(鄭克塽)으로 이어지는 정씨왕조를 멸망시키고, 타이완을 복속 시켰다. 청 통치기 타이완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마주한 대만북부지역으로 대규모 한인 이주가 시작 되었다. 1787년 청 정부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 오늘날 단수이, 타이베이, 신베이(新北), 타오위안(桃園) 등 대만북부 일대를 관할하는 단수이청(淡水廳)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단수이’는 공식 행정명칭에 등장하였다.
단수이가 본격적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19세기다. 1840년 ~ 1842년 제1차 아편전쟁, 1857 ~ 1858년 제2차 아편전쟁(1857~1858의 결과, ‘잠자는 호랑이’로 평가받던 청의 약체가 여실히 드러났다. 이후 영국‧프랑스를 필두로 한 서구열강들은 침략의 손길을 뻗어 오기 시작하였다. 그 일환으로 각종 불평등조약 체결, 개항(開港) 등을 요구하였다. 그중 제2차 아편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1858년 체결, 1860년 비준한 ‘톈진조약(天津條約)’ 내용 중에는 중국 본토와 대만내 항구 추가 개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단수이는 본격적으로 벽안의 사람들에게 문을 열었다.
이른바 ‘개항(開港)시대’ 단수이에 가장 분주하게 발을 디딘 것은 영국인들이다. 톈진조약 체결 이후, 청 개항장에는 외국인 총세무사(總稅務司)를 임명, 통관‧관세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단수이 주재 첫 총세무사믐 영국인 하월(John W. Howell)이었다. 1862년 공식 업무를 시작한 단수이 주재 총세무사는 홍모성 근처에 세관을 겸한 집무실을 두었다. 이후 1870년 단수이 총세무사관저를 세웠다. 총 3개 동으로 이루어진 스페인풍 건축으로 ‘해가지지 않는 제국’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1865년 다거우(打狗, 오늘날 가오슝(高雄))에 첫 대만주재 영사관을 연 영국은 단수이, 지룽, 타이난 등에 영사관을 개설하였다. 그중 1867년 청 정부와 ‘홍모성영구조차조약(紅毛城永久租約)’을 체결, 홍모성을 국제법상 대만내 영국 영토로 보장받았다. 이후 경내에 영국영사관을 건립, 총세무사관저와 더불어 영국 세력의 근거지로 삼았다.
개항 이후 단수이는 일약 대만최대 무역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단수이하(淡水河)를 통해 운반된 차(茶), 장뇌(樟腦), 유황(硫黃) 등 대만특산품들이 수출 되었고, 서양식 일상용품들이 수입되었다. 이속에서 ‘양행(洋行)’이라 불리던 서양 무역상인들의 발걸음은 분주해졌고, 단수이의 활기도 날로 더해갔다. 무역항 단수이의 황금시대였다.
‘대만제1 무역항’ 단수이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 했다. 단수이하가 실어 나른 퇴적물들로 인해 항구의 수심이 낮아져 선박 접안이 어려워졌다. 반면 선박은 점점 크고 무거워졌다. 이에 일본 식민당국은 타이베이 인근 지룽(基隆)에 대규모 항만시설을 확충, 단수이를 대체할 무역항으로 육성하였다. 이로써 단수이는 길지 않은 황금시대를 접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비록 찬란했던 시절은 옛일이 되어버린 작은 항구도시지만, 오늘날 단수이는 교육‧문화‧관광도시로 이름 높다. 인구 16만명의 도시임에도 국정(國定)‧시정(市定) 고적만 20개,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이 27개에 달한다. MRT 단수이선 개통 이후, 편리해진 접근성으로 인하여 단수이를 찾는 이들은 나날이 늘고 있다.
이런 단수이에는 서양인들이 남긴 자취들이 도시 곳곳에 남아, 사람들을 옛 시간 속으로 안내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홍모성이다. 붉은 외벽의 성채는 그 자체가 외세의 침략으로 이어지는 대만역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홍모성에는 그간 소유‧관리했던 국가들의 국기가 꽂혀있다.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스페인, 네덜란드, 정성공(동녕왕국), 청, 영국, 일본, 미국, 호주, 중화민국이다. 처음 스페인인들이 쌓은 성채 옆에 네덜란드인들이 오늘날의 홍모성을 쌓았다. 이후 정성공의 대만정복 이후 성채는 정성공의 소유가 되었고, 청 강희제(康熙帝) 재위기인 1654년 5월 4일, 타이완은 중국으로 복속 되었다.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인 1867년 영국은 청과 ‘홍모성영구조차조약’을 체결 법적인 소유권을 보장 받았다.
1894년~1895년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체결,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하였다. 다만, 국제법상 영국의 홍모성 소유는 인정받을 수 있었고, 1902년 체결한 영일동맹 하에서 영국의 홍모성에 관한 권리는 재차 보장 받았다. 그러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 되었고, 독일, 이탈리아와 더불어 주축국의 일원이 된 일본에 있어 영국은 적국이었다. 일본은 홈모성에 대한 영국의 소유권을 박탈, 유니언 잭을 뽑고 일장기를 꽂았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타이완을 수복한 중화민국 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인 영국의 권리를 인정, 1946년 홍모성은 다시금 영국 품으로 돌아왔다.
중국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홍모성의 운명도 요동친 것은 1949년이다. 그해 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天安門)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중화인문공화국 성립’을 선언하였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蔣介石)의 중화민국 정부는 같은 해 12월, 타타이완으로 천도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영국은 이듬해 타이완의 중화민국 정부와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 본토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차지하였고, 무엇보다 ‘동방의 진주’ 홍콩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이완과 단교로 인해, 홍모성 소유권을 행사하기 어려워진 영국은 영연방(British Commonwealth)의 일원인 호주에 관리권을 위탁하였다. 이로써 홍모성에는 영국을 상징하는 유니언잭 문양에 남십자성이 더해진 호주국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1971년 10월 타이완의 중화민국 정부는 유엔에서 퇴출 당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전세계 거의 모든 국가들이 타이완과 단교, 중국과 수교하였다. 호주도 이 대열에 합류하여, 1972년 12월, 타이완과 공식 외교관계를 청산하였다. 호주와의 단교 이후 홍모성의 위탁관리권은 미국으로 넘어갔고, 성조기가 호주국기를 대신하였다. 그러다 1979년 1월 1일부로 미국도 타이완과 단교하였고 한동안 홍모성은 단교 이후 대만주재 미국대표부 기능을 수행하는 미재대협회(American Institute in Taiwan, AIT)로 넘어갔다. 그러다 미국정부와의 협상으로 1980년이 되어서야 홍모성은 대만정부 소유가 되어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휘날리게 되었고, 1984년부터 민간에 개방하고 있다.
홍모성에는 당시 네덜란드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포대(砲臺) 등 방어시설을 비롯, 본디 방어시설로 세워진 건물의 용도를 알려주는 시설물들이 남아 관람객들을 400년 전 치열한 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홍모성 옆의 영국영사관, 그 옆의 총세무사관저는 근래 수차례 복원 공사를 거쳐, 옛 모습을 거의 되찾았다. 그중 영국영사관 내부는 영사와 가족, 직원들의 당시 생활상을 재현, 150년 전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 관리의 호사스런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총세무사관저는 건축 당시 호사스런 건축물로 이름 높았다. 건물 외부가 백악(白堊, chalk)회랑(回廊)으로 둘러쳐진 식민지풍 건축양식으로 인하여, ‘작은 백악관’이라는 뜻의 ‘소백궁(小白宮)’이라 불린다. 일제강점기에도 세관으로 사용되었으나, 세관이 이전한 후에는 방치되어, ‘도깨비집’으로 불리기도 했다. 1996년 대만재정부 총관세국(국세청 해당)은, 대만‘관세’ 역사에서 의의가 있는 건물을 복원하기로 결정, ‘소백궁 복원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2004년 본관 건물은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찾았다. 다만, 본디 3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던 건물 중 2개 동은 복원되지 못하여, 1개 동만 남아 있다.
단수이를 찾은 벽안인 중 맥케이(George Leslie Mackay)를 빠트릴 수 없다. 중국어 이름 ‘마셰(馬偕)’로 더 잘 알려진 그와 그의 후손들은 단수이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삶은 아펜젤러‧언더우드 목사의 삶에 비견될 만하며, 중국공산혁명기 활약한 캐나다 출신 의사 노먼 베쑨(Henry Norman Bethune, 白求恩)의 삶과도 일면 유사점이 있다.
1844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옥스퍼드카운티에서 태어난 맥케이는 ‘맥(Mac)’ 이라는 성에서 알 수 있듯, 하이랜드라 부르는 스코틀랜드 고원지대가 원향이다. 신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맥케이는 토론토사범학교 졸업 후 교직의 길을 걸었다. 후에 하느님의 뜻을 받들기로 결심, 토론토대학 신학대학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과 영국 에딘버러대학 신학부를 졸업, 목사가 되었다.
선교사업에 뜻을 품은 맥케이는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회에 청원, 동방선교의 길을 들어섰다. 1871년 동아시아로 파송된 맥케이는 홍콩, 광저우를 거쳐, 다거우(오늘날 가오슝)에 도착, 대만땅에 첫 발을 디뎠다. 이듬해인 1872년 단수이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대만복음화에 앞장섰다. 당시 장로교의 선교사업은 대만중부를 가로지르는 다자시(大甲溪)를 중심으로 남부는 영국장로회, 북부는 캐나다장로회의 선교구역으로 양분하였다. 맥케이는 타이난(臺南)을 근거지로 하였던 맥스웰(James L. Maxwell)가 더불어 기독교 선교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목사‧의사‧교육자였던 맥케이의 활동은 크게 3분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목사로서 맥케이는 단수이를 중심으로 타이베이, 지룽, 이란(宜蘭), 신주(新竹), 먀오리(苗栗) 등 대만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벌였다. 1872년 세워진 대만북부 첫 교회인 단수이교회도 그의 손을 거쳤다.
의료방면에서 처음 맥케이는 자택에서 무료 진료를 시작하였다. 이후 휴식차 캐나다로 돌아갔을 시기, 자신의 고향에서 모금활동을 벌여 미화 2,500달러를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단수이에 북부 대만첫 서양식 의료기관 해의관(偕醫館 : 맥케이의원)을 세웠다. 초기 작은 무료진료소로 시작한 해의관은 타이완의 대표적인 사립 종합병원 맥케이기념병원(馬偕紀念醫院)으로 성장하였다.
복음전파와 더불어 의술제세(醫術濟世)를 실천한 맥케이는 교육방면에도 공헌하여, 1882년 7월 대만최초의 근대식 고등교육기관 이학당대서원(理學堂大書院, Oxford College)을 단수이에 세웠다. 오늘날 진리대학(真理大學)의 전신이다. 이후 1884년 단수이여학당(淡水女學堂)을 세워 근대 여성교육에도 이바지하였다.
타이완을 너무 사랑하였던 맥케이는 타이완인 부인과 결혼, 1남 2녀를 두었고, 자녀들은 모두 아버지의 뜻을 이어 선교사업과 의료‧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1901년 맥케이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의 유업은 유일한 아들 조지 맥케이(George William Mackay, 偕叡廉)에게로 이어졌다. 캐나다 토론토대학을 거쳐 미국 클라크대학에서 교육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단수이로 돌아온 그는 1914년 3월 9일, 그의 아버지가 42년 전 단수이에 처음 발을 디딘날을 기념, 단수이중학교를 설립하였다.
단수이 곳곳에 깃든 맥케이 일가의 흔적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不能说的秘密)>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단장고등학교(淡江高級中學)와 진리대학이다. 단수이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에 각급학교가 옹기종기 몰려있는 ‘스쿨존’에 자리한 두 학교는 홍모성과 더불어 단수이를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찾는 곳 중 하나다.
조지 맥케이가 세운 단수이중학교를 모체로 하는 단장고등학교는 ‘고등학교’지만 규모나 분위기가 대학 캠퍼스를 연상하게 한다. 교문을 지나 교원(敎園)으로 들어서면, 고풍스런 서양식 건축물들이 학교의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최대 1500명을 수용할 수 있어 1965년 건립 당시 동아시아 최대 규모 예배당 설계는 맥케이의 외손자 천징후이(陳敬輝) 작품이다. 그는 단장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면서 건물을 설계하였다. 더불어 단수이여학당 교사(校舍)였던 여학교빌딩, 체육관, 맥케이기념도서관, 종합강의동, 예체능빌딩과 더불어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등장하는 팔각탑이 있는 본관 등에서 타이완을 지극히 사랑했던 맥케이와 그 가족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학교 안에는 맥케이박사추모공원(墓園)과 외국인추모공원(外僑墓園)이 있는데, 서울 양화진선교사묘원처럼, 낯선 땅에서 세상을 떠난 벽안인들이 잠들어 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단장고등학교는 인재의 산실로 역할을 다해오고 있다.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 황궈슈(黃國書) 전 입법원장(국회의장) 등 정치지도자를 비롯, ‘대만첫 문학박사’로 국립타이완대학 교수를 역임한 천샤오신(陳紹馨), 대만첫 여성 의사 차이어신(蔡阿信), 구롄쑹(辜濂松) 중국신탁금융지주(中國信託金融控股) 회장 등이 학교를 거쳤다. 특히, 문화‧예술방면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는 졸업생들이 많다. 중화권 최고 엔터터이너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연출‧주연을 맡은 저우제룬(周杰倫)을 비롯, 잔위하오(詹宇豪), 황자첸(黃嘉千), 황위셴(黃瑜嫻), 쉬퉁언(許同恩) 등 연예인, 종자오정(鍾肇政), 황궈쥔(黃國峻) 등 저명 작가들을 배출하였다.
진리대학은 작지만 아담한 캠퍼스가 중세 유럽 장원(莊園)에 온 듯 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1882년 이학당대서원이란 이름으로 개교 이후, 1865년 단수이상공관리전문대학(淡水商工管理專科學院), 1994년 단수이상공관리대학(淡水商工管理學院)을 거쳐 1999년 종합대학인 진리대학으로 거듭났다. 교사(校舍) 중 가장 오래되고 상징적인 건물은 이학당대서원이다. 1882년 건립되어 학교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건물은 맥케이가 직접 설계하였다. 현재는 학교역사관(校史館)으로 사용 중이다. 내부 전시실에는 맥케이의 유품들과 기록사진, 서신 등 유물들이 전시되어 학교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밖에 1875년 세워진 교수회관(敎士會館), 1906년 건립된 홍루(紅樓)와 더불어 ‘미션스쿨’임을 알려주는 대예배당(大禮拜堂) 등이 있다. 그중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예배당에 설치된 네덜란드 펠스(Pels & Van Leeuwen)사의 파이프오르간은 타이완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직경 32인치의 오르간 파이프로도 유명하다.
이런 서양인들의 흔적과 더불어 150년 전 치열한 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하는 유적은 후웨이포대(滬尾礮臺)다.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가 『역사의 연구』에서 말했듯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생생히 보여주는 유적이다.
제1‧2차 아편전쟁, 1884년~1885년 청불전쟁 이후 ‘본실력’이 드러난 청에 대한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 되었다. 그중 청의 영토였지만, 지리상의 이유로 통치력이 느슨하게 미치고 있던 타이완은 침략의 주 목표가 되었다. 프랑스는 1884년, 1885년 두차례에 걸쳐 지룽을 공격하였고, 미국‧영국 등도 갖은 명목으로 타이완에 마수를 뻗어 왔다. 일본도 이에 가세하여, 표류한 류큐인을 타이완원주민이 살해하는 이른바 무단사(牧丹社)사건이 발생 한다. 이를 구실로 일본은 1871년 타이완에 1,300명의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1874년 베이징에서 체결된 강화조약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1879년 류추번(琉球蕃)을 폐하고, 오키나와현(沖縄縣)을 세워 정식으로 류추를 일본 영토에 편입 시킨다. 일본은 대만침략을 노골화 하였다.
이속에서 타이완의 ‘국방상 중요성’을 재인식한 청 정부는 푸젠(福建) 순무(巡撫 : 명‧청대 1개성을 책임지던 지방장관) 류밍촨(劉銘傳)을 타이완에 파견, 방위에 전력하도록 하였다. 이후 1885년 청불전쟁 종전 후, 청 정부는 푸젠성 산하 부(府)였던 타이완을 독립된 성(省)으로 승격, 류밍촨을 초대 대만순무로 임명하였다. ‘대만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타이완을 전국 모범성으로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며, 신정(新政)이라 불리는 각종 근대화‧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더불어 본디 군인이었던 류밍촨는 대만방위에도 주력하하여 각종 방어시설을 확충하였다. 그중 단수이의 옛이름을 딴 후웨이포대는 단수이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방위상 요충지에 세워진 군사시설이다. 1888년 완공된 포대 외벽 문에는 ‘대만북쪽 관문을 지키다’라는 뜻의 ‘북문쇄약(北門鎖鑰)’이라는 류밍촨의 친필 휘호가 있다. 글씨에서 외세의 침략이라는 도전에 응전하는 그의 비장함이 묻어난다. 완공 실제 전투에는 사용되지 못한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 포병 연병장으로 사용되었고, 광복 후에도 군 주둔지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985년 국가고적으로 지정되었고,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이처럼 단수이에는 벽안(碧眼)인들과 자취와 더불어, 치열한 ‘근대화의 흔적’들이 남아, 방문객들을 150년 전 ‘개항시대 타이완’으로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