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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끼 Oct 04. 2021

밀란 쿤데라, 불멸

괴테, 베토벤 그리고 쿤데라

 쿤데라의 소설은 실패하는 법이 없다고 일찍이 생각은 해왔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워낙 생각의 흥분을 자극하는 데에 도가 텄기 때문에 쉽사리 페이지를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도 쿤데라스럽게 적어보려고 한다. 쿤데라를 처음 접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로 사랑을 다룬 책을, ‘안나 카레니나’를 들고 있었다는 이유가 호감이 되는 토마시가 등장하는 책을 내가 감히 거부나 할 수 있었을까? 작가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나 나는 오히려 친절하게 느꼈다. 이 캐릭터를 어떻게 잉태했고 어떻게 출산했는지를 다 알려주다니! 본인에 가장 내밀한 순간일진대 너무나 고마운 일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워낙 감명 깊게 읽어서 당시 내가 참 사랑하던 친구에게 그 책을 빌려주었다. 마음은 반반이었다. 나도 감명받고 읽었으니 너도 감명을 받아보라는 생각과 그동안 부려온 지적 허울을 다 벗겨버리자라는 생각, 둘 다 퍽 건전하지는 못한 생각이었다. 그녀가 중도 포기할 거라고 짐짓 예상했는데 의외로 다 읽었다. 읽지 않았는데 읽었다고 구태여 거짓말할 인사는 아니었다. 그 소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데, 그녀 머리카락을 한가닥 쥐어뜯더니 책 중간에 책갈피처럼 끼웠다. 참 쿤데라스럽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작 중에서 쿤데라 씨가 아베나리우스 교수에게 지금 쓰고 있는 소설 제목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짓고 싶다고 토로한다. 아베나리우스 교수가 이미 그 제목은 쓰지 않았냐는 질문에 쿤데라 씨는 이 소설의 제목으로 사용했어야 했다고 아쉬워한다. 나는 ‘불멸’이라는 제목도 퍽 마음에 든다. 불멸이란 나도 깊이 생각해본 주제이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닐까, 나는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는데 불멸이 될 수가 없는데 이렇게 죽다니, 내가 죽고 불멸이 된다는 확신이 있다면 죽음이 전혀 두려울 거 같지 않다. 괴테와 베토벤이 죽음이 두려웠을까? 이 소설은 총 7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2부에 갑자기 괴테의 이야기가 나와서 순간적으로 이게 단편소설 7개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여러 명의 시선으로 소설을 전개하지만 거미줄처럼 다 이어져있고 그 이음새를 발견할 때는 희열까지 느끼게 된다. ‘불멸’을 제대로 맛보려면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할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괴테, 베토벤의 개인사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소설의 내용들을 쿤데라 씨는 이미 독자가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전개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른 채로 읽으면 힘들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내가 친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만 등장을 시켜서 나는 그 사람들과 친해진 것이 다 지금을 위한 것이었나라는 운명론에 빠져들기도 했다. 내가 7년 전 에커만을 따라 괴테를 만나러 간 것이 다 지금을 위한 것이었나?


쿤데라 씨가 창작한 아녜스, 폴, 로라와 같은 주요 인물 못지않게 과거 실존 인물들도 비중 있게 소설에 등장한다. 심지어 나폴레옹과 괴테가 만나는 모습도 묘사해놨다. 실존 인물들을 등장시켰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소설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이다. 불멸을 다루며 괴테를 앞장 세운 것은 이게 만국 공통인지 쿤데라가 나와 취향이 비슷한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멸하면 괴테가 연상되기는 한다. 하지만 괴테와 육체적 관계는 맺기 싫다. 도스토옙스키나 헤밍웨이와는 즐겁게 관계를 맺을 거 같은데 괴테에게선 불쾌한 냄새가 나는 거 같다. 왜 일까? 에커만이 나에게 괴테에 대해 말할 때 찬사에 섞여 그를 중상모략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본질적으로 괴테에게선 나만 맡을 수 있는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일까? 나는 옛날부터 냄새에 민감했던 거 같다. 좋아했던 사람이라도 불쾌한 냄새가 나면 호감도가 확 떨어졌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을 때는 옅게나마 냄새가 났고 ‘파우스트’를 읽을 때는 대놓고 냄새가 났다.


그렇다고 괴테를 불멸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할 생각은 없다. 괴테는 냄새는 좀 날지언정 고마운 사람이다. 에커만이 괴테에게 나를 소개해줬기 때문에 그 이후로 내가 사랑하는 그 불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히려 괘씸한 것은 쿤데라 씨이다. 나는 고전을 좋아한다. ‘고전적이다’라는 말은 내게 있어 최고의 찬사이다. 그래서 항상 죽은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 물론 필요에 의해 살아있는 작가들의 책도 읽은 적도 퍽 있으나 그들이 불멸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다. 내게 있어 불멸에 오른 사람들 니체, 도스토옙스키, 베토벤 등은 다 죽은 사람이다. 죽었기에 완성되었고 불멸이 된 것이다. 크로이소스가 솔론으로부터 ‘행복하다’라는 소리를 못 들은 이유도 같지 않은가? 살아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어떻게 불멸이라 할 수 있냐 이 말이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쿤데라 씨는 내게 불멸이 되어 버렸다. 쿤데라 씨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에 나는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무려 92세로 그는 아직 살아있다. 근데 이미 내게 불멸이 되어버렸다. 퍽 수치스러운 일이고 나중에 죽은 불멸들이 내게 심문하면 뭐라 변명할지 아찔 하기만 하다. 그는 구십넘은 노인이니 산송장으로 쳐야 한다라고 변명해야 할까, 아니면 살아있는지 몰랐다고 변명해야 할까?


이 소설에는 등장인물로 불멸의 인물들이 나온다. 괴테, 베토벤, 헤밍웨이 등등 불멸의 이름들이 퍽 많이도 등장한다. 그리고 쿤데라 씨가 창작한 폴, 로라, 아녜스도 등장한다. 폴과 로라와 안면이 있는 아베나리우스 교수와 쿤데라 씨가 만나는 것을 봤을 때 나는 쿤데라 씨의 음흉한 속셈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폴과 로라와 만난 쿤데라 씨를 봤을 때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쿤데라 씨는 산 자를 불멸의 위치에 놓은 내 사고를 교모히 조종했노라고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이제 뭐 어쩌겠는가 92살 먹은 쿤데라 씨보다 내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수밖에, 내 불멸들은 하나 같이 죽은 지 오래되었으니 쿤데라 씨가 죽고 한참 뒤에 내가 죽는다면 헷갈려서 책임을 묻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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