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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끼 Nov 16. 2021

석영중, 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

종교와 과학의 관점에서 

 시험 끝난 후 오랜만에 주문하는 책이라서 여러 후보를 두고 퍽 고민을 했다. 11월에 도스토옙스키 생일도 있고 나도 모르게 홍보의 효과를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마는 출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나온 책들을 하나는 읽어보고 싶어 져서 [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를 주문하였다. 소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종교와 과학의 관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분석하는 책이다. 사실 책이라기보다는 저자의 논문들을 묶어놓은 논문집이기 때문에 미리 참고하길 바란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주문하여 퍽 당황스러웠다. 


11편의 논문집을 그냥 묶기보다는 조금 일관성 있게 재편집했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있다. 도스토옙스키 200주년 마케팅에 맞추어 급조한 느낌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 같다. 책을 읽다 보면 논문들이 비슷한 주제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어 보인다. 이게 주제의 일관성 때문이기도 하고 더하여 중복된 내용이 계속해서 나와서 그런 거 같다. 가독성을 신경 쓰지 않은 논문이기에 읽는 것도 퍽 쉽지 않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은 총 6개로 [지하로부터의 수기] [죽음의 집의 기록]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다룬다. [죽음의 집의 기록]을 제외하고는 모두 읽어본 책들이어서 개인적으로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던 거 같다. 


종교적 관점에서 다루는 논문도 있고 과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논문도 있지만 양자가 딱 구별되는 느낌은 안 든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고 다만 아쉬운 점은 종교적 관점을 제시할 때는 정교 신학을 바탕으로 퍽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시하지만 과학적 관점은 아무래도 노문학자이다 보니 근거가 빈약해 보였다. 아인슈타인과 도스토옙스키의 관계는 흥미를 끌만하지만 논리 전개 방식이 매끄럽지 않았던 거 같고 상대성 이론과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엮는 것도 퍽 유쾌하지는 않았다. 


[악령]에 대한 깊이 읽기는 이 책에서 얻은 큰 수확으로 [악령]을 읽을 때 이해 못하고 느낀 부분을 이 책을 통해서 이해를 한 거 같다. 스타브 로긴이 3명의 니힐리스트로 발현한다는 해석이나 성화를 조롱하면서 그 의미를 이끌어내는 방식까지 그냥 읽었을 때는 모르고 지나갈 수 있는 지점들을 잘 짚어주었다. 저자가 퍽 불쾌해하면서 언급하는 측두엽 간질과 종교성의 상관성은 재미나고 관심이 갔다. 측두엽 간질 환자는 발작이 일어날 때 뇌신경 세포의 과도한 전기 방출로 말미암아 모든 것에 신비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주장이 있는데 저자는 불쾌해하며 부인하지만 내 생각에는 도스토옙스키가 종교적 인간이 된 기저에 간질이 있었을 거 같다.  종교적 인간은 결국 병적 인간인가? 더 나아가서 뇌의 특정 부위의 발달 정도나 병변에 따라 우리의 성향까지 미리 결정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의 파편들이 생겨났다. 


[악령]을 다룬 논문의 제목은 권태라는 이름의 악마이다. 권태는 이상의 작품에서 지겹도록 나오는 개념이라 반갑기도 했다. [악령]에서는 권태로부터 나아간 니힐리즘을 최악으로 삼는다. 개인적인 선호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음식이 차갑거나 뜨거운 것을 좋아한다. 미지근하면 뱉어버리고 싶다. 도스토옙스키는 [악령]에서 미지근한 것이 신에 대한 최악의 죄악이라고 말한다. 미지근한 뭐가 되어도 좋은 니힐리스트, 종국엔 모든 것이 허용되는 인간이 등장할 것이고 도스토옙스키는 그러한 '인신'을 몹시도 경계한다. 사실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다시 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은 범죄로 귀결될 것인가?라는 의문, 능동적 니힐리스트란 결국 낭만주의의 답습일 뿐이고 의지만이 참람하여 모든 것이 날뛰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생각에 퍽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허용됨을 예언한 도스토옙스키를 다시 찾게 되었다. 


확실한 답을 찾은 거 같지는 않지만 강생을 강조한 정교 신학을 퍽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점은 좋은 수확이었다. 인간의 신화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인화를 강조한 정교 신학을 염두하고 [백치]를 살펴보니 확실히 못 보고 지나친 지점들이 몇몇 있었다. 특히 홀바인의 그림은 [백치]에서 언급이 되어도 직접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직접 찾아보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작가노트에 그 그림에 대해 따로 의견을 표명한 것도 있고 그 그림에 대한 해석이 [백치]의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에 [백치]를 보고 있다가 홀바인의 그림이 언급된다면 꼭 직접 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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