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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끼 Jan 18. 2022

행복하려고 사나요?

 유튜브 채널 중 "5분 뚝딱 철학"이라는 유익한 채널이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영상을 보고 드는 생각이 많아 이렇게 글을 남기려 한다. 샐리그만이라는 심리학자가 말하길 행복의 세 가지 조건은 즐거움, 몰입, 삶의 의미라고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다 채워야 행복하다는 것인데, 세 가지를 다 채우기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먼저 '즐거움'이라 하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맛있는 것을 먹는다던지,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간다던지,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낸다던지 등이 있을 것이다. '몰입' 이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몇 시간이 몇 분처럼 흐르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삶의 의미'란 여기부터는 참 어렵다. 


자, 그럼 오늘의 주인공 비트겐슈타인은 행복했을까? 첫 번째 조건, '즐거움'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아니었던 거 같다. 비트겐슈타인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나 그가 남긴 기록들을 보면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자살충동 그리고 필연적인 비참함에 시달린 거 같다. '비참함'이라 하면 "삶이란 비참함을 최소로 유지하는 거야"라는 말을 한 우리의 하 과장님이 생각난다. 

두 번째 조건인 몰입은 일가견이 있는 거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하여 포탄이 쏟아지는 전선에서 '논리철학논고'를 집필했다. 이 정도의 몰입을 유지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거 같다. 세 번째 조건인 삶의 의미도 비트겐슈타인이면 합격점을 줄만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거라 생각했다.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다니 그 정도면 삶의 의미로 충분하지 않은가


결국 '즐거움'의 문제만 남는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복함이라고 생각하는 이미지가 대부분 첫째 즐거워야 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처럼, 하우스처럼 비참한 사람을 보고 행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여기서 내 고민이 시작되고 상기한 영상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지점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다 행복하지 않은 걸까? 술라가 말했듯 왜 나란 사람은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는 걸까? 자, 그렇다면 그 빌어먹을 행복이 왜 인생의 목적인 된 걸까?


이 사람을 보라,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 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온 것인데,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행복' 개념은 Arete(탁월성)의 개념으로, 각자가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는 직업을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피리 잘 부는 사람은 음악가로, 노래 잘 부는 사람은 가수를 하는 것으로, 지금의 행복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는 잘 사는 것의 가깝다고 본다. 잘 사는 것과 즐거움이 크게 관련이 있을까? 우린 꼭 즐거워야 하나? 여기서 다시 한번 꼬아보자, 즐거움이란 결국 감정이다. 감정은 따지고 보면 우리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호랑이를 보고 무서움 감정이 들어야 도망을 쳐서 살 것이고, 뱀이나 쥐를 보고 소름이 끼쳐야 그것들을 피할 거 아니냐, 즐거움도 안정된 느낌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들은 결국 수단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행복의 개념 "즐거워야 한다"는 결국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 


행복, 이 단어를 얼마나 지겹게 듣는가? '소확행'이라는 말도 유행하지 않는가? 대부분 사람들이 이 행복을 즐거움과 동치 시킨다. 그리고 이 행복을 가장 많이 써먹는 것은 기업들이다. 행복하려면 사세요, 이것만 가지면 행복해질 것입니다. 행복이란 결국 자본주의적 환영이 아닐까?

'즐거움'을 무작정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 행복한 감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한 법이고 우린 항상 즐거울 수가 없다. 어린 시절 도덕 시간에 사람을 통 속에 넣어놓고 가상현실을 살게 하고 일정 수준의 쾌락은 전기로 계속 넣어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어떠한가라는 주제를 들은 적이 있다. 감정은 수단이자 동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문제이다. 매번 매 순간, 행복할 수 없고 즐거울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죽기 전, 자신의 삶이 wonderful life라고 했다. 멋진 삶이었다고, 비트겐슈타인은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운명이 그걸 허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몰입했고 삶의 의미를 찾았다. 그랬기에 멋진 삶을 살 수 있었다. 인생에서 '즐거움' '몰입' '삶의 의미'를 다 갖는 것이 물론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즐거움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는 내 뜻대로 몰입할 수 있고, 내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행복한 삶을 정녕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멋진 삶을 살자, 비참하더라도 멋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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