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거짓말쟁이들은 말입니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재밌게 읽어서 혹시 다른 에코의 소설들도 나와 잘 맞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바우돌리노'를 구매하게 되었다. 몇 년 전에 '바우돌리노'를 리뷰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에코가 비록 대중들을 위해 쓴 소설이라고는 했지만 특유의 에코체와 중세에 대한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여 그리 수월치 않고 대중적 인지도도 낮은 소설이라고 소개하여 당시에는 이 책을 보지 않았다. 에코의 소설을 하나 더 읽는다면 그래도 한 번이라도 관심이 간 소설을 읽는 것이 맞다고 여겼고 개인적으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기에 이 책을 구매하였다.
전체적인 평을 우선 말하자면 무척 재밌게 읽었고 '내가 에코 스타일과 참 잘 맞는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잘 안 알려져 있어서 그렇지 농민의 아들이 황제의 양자가 되어 겪는 모험활극으로 표현될 수 도 있기 때문에 대중 소설로도 유명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후반부에서 장르가 갑자기 판타지로 변해서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알고 보니 그러한 것들도 모두 중세에 익히 알려져 있던 전설들을 모티브로 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헛웃음이 나왔다.
단순히 소설적인 재미로 따지자면 바우돌리노가 프리드리히의 양자로 들어가 나름 활약을 하고 파리에서 공부하며 친구들을 사귀는 전반부가 우수했다고 생각한다. 바우돌리노가 활약하는 것들은 모두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처음 바우돌리노가 프리드리히의 눈에 들게 된 계기도 바우돌리노가 "성 바우돌리노가 독일의 진정한 귀족은 프리드리히뿐이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라고 말했다"라는 나름 그럴듯한 거짓말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바우돌리노는 각종 거짓말과 조작에 능하지만 특히 그가 진면목을 보이는 분야는 성물 조작이었다. 아마도 조작되었을 동방박사의 시신들이 동방풍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서방 교회의 사람들이 감흥을 못 받을 것을 염려해 서방 주교들의 옷으로 시신들의 옷을 갈아입히는 장면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바우돌리노와 친구들이 훗날 동방으로 떠났을 때 돌아온 동방박사들로 여겨지는 것을 예견하는 장면일 수도 있겠다.
나도 그럴듯한 거짓말을 잘하는 축에 속해서 그런지 바우돌리노에게 심히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아마 나와 무척이나 비슷한 면모를 보여서 긍정적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입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정말 뛰어난 거짓말쟁이들은 거짓말을 잘 들키지도 않을뿐더러 상당한 배경지식을 필요로 한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파악해야 하고 퍽 재능이 있어야 한다. 바우돌리노는 황제의 일을 한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나나 바우돌리노 모두 알듯이 인생의 모든 업적이 허위에 의해 쌓아 졌다는 사실이 치가 떨리도록 싫을 때가 있다. 나는 그래서 바우돌리노가 사제 요한의 왕국에 그토록 집착한 것이 아닐까란 추측을 처음에는 했었다. 사제 요한의 왕국이 인생이 의미가 되어줄 테니깐, 고결한 삶의 목표가 되어줄 테니깐, 그렇다면 내가 허위로 쌓아온 모든 것도 참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사제 요한의 왕국을 찾아 나서고 진실로 믿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바우돌리노가 처음에 어떻게 생각했듯 픈다페침이 멸망해가는 와중에 그는 얼떨결에 사제 요한의 왕국 같은 것은 믿지도 않았다는 것을 토로해버린다. 히파티아와의 사랑으로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여겨서일까? 아니면 픈다페침에서 살면서 진실을 깨닫게 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걸까? 바우돌리노가 동방박사의 시신을 조작해서 만들고 심지어 성배까지 만들어내는 모습은 중세에 대한 조롱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루어지는 성물 매매는 흡사 대단한 비즈니스 같아 보였다. 중세를 대단히 조롱하는 거 같아 보이지만 바우돌리노가 내면에서든 외면에서든 한 번도 자신이 만든 그 많은 허위와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조롱하지 않아서 그런지, 나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든 가장 큰 불안감은 혹시 바우돌리노가 프리드리히를 사랑하지 않은 거였으면 어떡하지? 설마 바우돌리노가 프리드리히를 죽인 거였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었다. 아마 나였다면 끝끝내 프리드리히를 사랑했을 것이기에 내가 계속 공감한 바우돌리노가 프리드리히를 배신했다면 내가 계속해서 감정 이입한 바우돌리노가 없어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를 누가 죽인지는 구태여 밝히지 않겠다. 바우돌리노도 내가 아마 그랬듯이 프리드리히를 끝까지 사랑했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바우돌리노가 니케타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구조로 소설이 전개된다. 바우돌리노가 서두부터 본인이 거짓말쟁이인 것을 밝혔고 사제 요한의 왕국을 찾아 떠나는 여행기는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사가인 니케타스는 역사기록에 바우돌리노의 이야기를 넣지 않기로 한다. 후반부 파프누티오스가 바우돌리노의 이야기에 있는 아주 일부분의 허위를 걷어내는 장면이 있는데 진실의 잔인성을 드러내 준다. 소설 중간에 진실이 바우돌리노에게 얼마나 잔인했고 파멸로 몰았는지 묘사되지만 마지막 그 진실은 나조차도 잔인함을 실감했다. 바우돌리노는 그 이름대로 성인이 되어도 보았다가 다시 사제 요한의 왕국을 찾아 떠난다. 이 부분도 다행스러운 장면이었다. 내 추측과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덮으며 내가 가진 생각도 그것이다. 나의 사제 요한의 왕국은 어디에 있는가? 내 삶에 정당성을 부여할 고귀한 목표는 무엇일까? 에코는 이 책이 거짓말쟁이의 변명이 아니라 유토피아의 변명이라고 했다. 유토피아에 대한 혹은 고귀한 목표에 대한 열망은 거짓말을 능숙하게 할수록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