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나에게 있어서 퍽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가게를 나와보니 내 가방에 꽂혀있던 만년필이 사라져 있었다. 급히 다시 가게로 가서 수색을 해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이었다. 만년필 찾자고 친구들도 제쳐두고 서면 온 바닥을 뒤질 수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고 나서 내가 소중한 친구를 영원히 잃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만년필이 3자루가 있다. 지금 언급하는 이 만년필, 그토록 오랫동안 곁에 뒀으면서 이름 하나 붙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다시금 가슴 아프게 한다. 나와 거진 십 년을 함께한 친구를 위해 조사라도 써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는가 싶어, 이렇게 글을 쓴다. 고 만년필 씨는 나의 첫 만년필이었다. 내 이름을 새겨서 받았고 처음 사용해보는 만년필이 얼마나 좋았던지 십 년 전 나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 이후로도 만년필을 더 구매했으나 어찌 된 영문이지 금방 고장이 나서 못 쓰게 되었다. 하지만 고 만년필 씨는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 동안 내 곁을 든든히 지켜주었다. 내가 중요한 글씨를 쓸 때나 사인을 할 때는 항상 이 친구가 함께 했던 거 같다. 내 인생의 희로애락을 고 만년필 씨는 묵묵히 함께해주었다. 인연에 세월이 얹히면 애착이 생겨야 하거늘, 나는 고 만년필 씨에게 소홀해졌던 거 같다. 가방 겉에 끼워놨는데 고정이 잘 되어서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끼워둔 것이었지만 돌이켜보니 정말 소중하게 여겼다면 그런 식으로 보관했을까 싶다. 아 다시 한번 미안스러워지구나 친구여
고 만년필 씨는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급하게 비슷하게 생긴 만년필 사진을 들고 올 수밖에 없었다. 내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고 만년필 씨가 내게서는 죽은 친구가 되었지만 다른 사람의 손에서나마 쓰임을 다하기 바란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고 만년필 씨를 나 말고 누가 그 가치를 알아주고 효용을 다 하게 해 주겠는가? 십 년 가까이 내 곁에 있던 너를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보내다니 애통하고 또 애통하다. 세월을 믿고 소홀하였던 나를 용서하길 바란다. 나는 물건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인격을 부여하는 괴랄한 취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십 년 가까이 나와 산전수전을 다 겪은 고 만년필 씨를 보내면서 애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 만년필 씨는 중고교 시절부터 내가 사용하던 만년필이기 때문에 추측컨대 그리 고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와 함께한 그 세월로 인해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만년필 한 자루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내 오랜 친구를 떠나보냈고, 내 마음속에 소중한, 이제 기억에도 안남을 그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이다. 내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그대가 나와 함께 많이 쓰던 시를 띄우려 한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친구 고 만년필 씨, 내내 어여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