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게티센터에서 나 홀로
작품 몇 개를 마음 대신 카메라에 담으며 센터를 나왔을 때는 8시. 폐장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게티센터의 정원과 건축물 또한 센터의 하나의 작품이라고들 하던데.. 그 도시에 들렸을 적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조명이 하나둘씩 꺼지고 있었고, 센터 내부의 불빛은 이미 꺼졌으며 조용히 기저 속에 있듯 들리던 피아노 음악까지 끊기자 게티센터는 더 이상 낭만적인 미술관처럼 보이지만은 않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공간에 머뭇거리고 있다 초조해진 바람에 트램에 타기 전 우버를 잡았다. 그때는 또다시 우버를 혼자 타야 한다는 걱정보다는 이곳에서 늦지 않게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본능적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의 우선순위를 감각했던 것 같다. 그 시각에 게티센터에서 도시로 들어가는 교통이 전혀 없었다. 생각보다 우버는 금방 잡혔다. 자동차는 아래에 이미 도착했는데, 나는 아직 트램을 타지 못한 채였다. 급히 우버 기사와 전화를 해 더듬거리는 영어로 기다려달라고 부탁했지만 게티센터 아래로 내려왔을 때 내 화면에 적힌 번호판의 차량은 없었다. 전화를 해봤지만 그는 받지 않았고, 우버를 잡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그곳에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분 후에 우버가 캔슬되었다는 메시지가 왔다. 그제야 배터리가 10퍼센트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캔슬한 우버 기사가 괘씸했다. 오케이, 슈어라 대답했지만 더듬거리는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일이 그렇게 된 거라면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어두운 우버 픽업용 벤치는 가로등 하나와 트램의 정류장에서 나오는 빛이 전부였다. 다시 우버를 불러두었지만 하나둘씩 도착하는 자동차에는 내가 기다리는 번호판이 없었다. 배터리가 없어 핸드폰만 들여다볼 수 없는 처지였는데도, 마음이 급해져 내가 부른 차가 어디쯤 왔는지 자꾸만 체크하게 됐다. 이번 기사는 조금 움직이다 멈췄고, 또 조금 움직이다 멈춰서, 이내 안 되겠다 싶어 우버를 캔슬했다. 이대로면 핸드폰이 꺼져 다른 기회도 놓칠 것 같았다.
무슨 악몽인지 우버 어플과 연결된 계좌까지 돈이 없었다. 우버는 처음 매칭이 될 때 선결제가 되는데, 캔슬 사유를 확인한 뒤 계좌로 돈을 돌려주는 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요청한 거리보다 차가 막혀 시간을 많이 쓰게 되면 추가 비용도 저절로 결제된다고. 하필이면 이 시점에 계좌에 돈이 없는 것도 황당한 일이었다. 다른 때라면 이렇게 당황스럽진 않을 텐데.. 그 도시에 가기 위해 있던 현금을 거의 다 환전하기도 했고, 월급날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게 겹쳐버렸다. 겁이 많아 신용카드를 등록하지 않고 잘 안 쓰는 계좌를 등록한 것도 화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는 조금 멘붕이 와 두리번거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언어가 짧은 탓에 낯선 타인에게 도움을 구할 수는 없었고, 유니버셜에서 신나게 놀고 있을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더욱이나 저 멀리 있을 가족들에게 연락할 수도 없다. 같이 벤치에 앉아 우버든, 뭐든,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 자신들의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잠깐이지만 또 다른 트램이 와 남은 사람들이 내려오기 전까지 나는 가로등 아래 벤치에 혼자 남아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벤치 뒤에 있던 나무에서 바람 소리가 흩날렸다. 건너편에 들어오는 차 몇 대를 바라보다가,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변사체로 발견되는 상상을 했다.
N인간의 장점은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하다 어떻게든 갈 길을 찾는다는 것에 있겠다. 나는 느린 인터넷에 기대 비상금 통장에 있던 돈 전부를 우버와 연계된 계좌로 겨우 옮겼다. 다행히 지갑에 OTP 카드가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배터리가 5프로도 남지 않아 있었다. 손을 달달 떨며 우버를 얼른 다시 불렀다. 새로 잡힌 우버의 번호판을 외우면서 핸드폰이 꺼지질 않길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 차가 도착했고, 무사히 타서 숙소까지 도착하는 동안 핸드폰이 꺼지지 않기를 빌었다. 게티로 갈 때보다 돌아올 때가 한참은 더 멀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도착 위치를 잘못 찍었는지 우버 기사가 숙소를 지나치려 해서 히어, 히어! 하며 외쳐 내렸다. 어리둥절한 기사가 오케이하고 차를 멈추고 나서야...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날은 점심 겸 저녁을 늦게 먹어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놀란 정신에 위장이 더 놀랬는지도 모르겠다. 숙소에 돌아와서 도저히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는데 웬걸 피로가 쌓였는지 씻은 뒤에 바로 곯아떨어졌다. 그날 난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았겠다 바랐고, 보조 배터리를 챙겨 다니는 준비성 넘치는 사람이었다면 더 좋았겠다 중얼거렸고, 또 그 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나의 상태들을 되짚었다. 그런다고 당장에 변화할 내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마음 대신 카메라에 담았던 그림들.
게티센터를 네이버 지식 백과에 검색해보니,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가든에서 산책을 즐기는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인 종합예술센터라는 요약이 적혀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종류의 예술품을 관람한 셈이구나 싶은 생각도.
센터는 토요일만 야간 개장을 한다.
토요일 밤의 꿈. 다시 간다면 조금 느긋하게 즐기리라. 보조 배터리는 꼭 챙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