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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이 Jan 26. 2022

관계없는 죽음

14, 17, 15, 19년도 관계 하고팠던 시간들

 




  첫 번째, 당시 나는 강원도의 한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아이들이 탄 배가 가라앉고 있다는 뉴스는 보지 못한 채 그 배에 탔던 아이들 모두를 무사히 구출했다는 뉴스부터 봤다. 학생회관에서 밥을 먹고 있었던 것 같다. 다행이다. 큰일이 없어서. 나는 그 정도의 감상으로 그 일을 한나절 정도 잊었다.

  

  시골에 있는 대학에서는 뉴스를 보지 않으려면, 소식을 듣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텔레비전은 학생식당 내부에만 있었고 그것도 벽에 하나 걸린 게 전부였다. 핸드폰으로 주의 깊게 바깥의 일들을 살피지 않으면 SNS 로 내가 고른 피드만 볼 수 있었다. 내 취향으로 이루어진.. 흥미 위주의 피드. 그러니까 그다음에 아이들의 소식을 들은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탄 뒤가 되었다. 배가 아주 가라앉았고 아이들을 구조하려 노력 중이라는 뉴스였다. 그 뒤 뉴스에서는 몇 번이고 그 배가 가라앉는 것을 보여주었다. 몇 번이고…



  두 번째, 카카오톡에서 알림이 왔다. 개인적인 연락은 아니었고 단체방이었던 것 같다. 지인 중 누군가가 유명한 아이돌인 J군이 죽었다고 했다. 나는 일을 하다 알림 창에 뜬 내용을 확인하면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동명이인 아닐까 했다. 뉴스를 찾아봤지만 관련된 기사가 없었다. 찌라시로 도는 헛소문이겠지. 그런 헛소문은 잘 떠돈다. 그리고 단체 방에 다른 이 하나가 기사를 공유해주었다. 한 줄짜리 짧은 속보였다. 그의 소식을 듣기 얼마 전 라디오에 나와서 노래하는 것을 딴 클립을 들었다. 그는 천상 가수였다. 목소리가 좋은 건 둘째치고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음악화하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그가 위로하듯 시청자의 사연에 답해준 글을 읽고 감명 깊었던 적도 있었다. 시청자는 소리가 색으로 보이는 병을 가진 이였는데 특히 그의 목소리에서 나는 색이 아름다워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연이었다.


  나는 기사를 보고도 그의 소식을 믿지 않고 그의 오래된 팬이 있는 단체방에 웃으면서 카톡을 남겼다. 야. J군 뭐냐. 완전 헛소문이 돈다. 다른 친구 하나가 자신도 들었다며 어이가 없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의 오래된 팬인 친구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나는 굳이 말하자면 그의 라이트 한 팬이었다. 그가 속한 그룹의 소식을 이따금 들을 때면 반가웠고 친구가 표가 생겼는데 콘서트에 갈래? 하면 돈을 기꺼이 낼 수 있는 정도의 팬. 내 기억으로 내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좋아했다. 연예인이라면 그다지 좋은 말을 뱉지 않는 엄마도 그가 참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걔 별로더라, 이런 평가가 그에게 닿는 것을, 나는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죽은  맞다고 했다. 그의 오랜 팬이었던 친구는 장례식장에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밤까지 병원 앞에서 줄을 섰다.




  다시 첫 번째, 학교 잔디밭에 일 년이 지날 때마다 노란색 모양의 리본이 달렸다. 해마다 4월 16일에는 비가 내렸다. 그 후 서울에서 촛불을 들고 사람들이 시위를 했다. 넓은 광장에 평화를 앞세운 시민들이 가득 찼다. 나는 서울 본캠과 강원도의 학교를 오가면서 한 번도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촛불로 가득한 기사를 보고 SNS를 통해 시위에 참여한 친구들의 신념을 바라보면서 꾸벅꾸벅 졸았다.


  정신이 반쯤 빠져 있는 상태로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졸다가 아주 옛날 꿈을 꿨다. 14년도의  모습이었다. 옛날 집에   이부자리 위에 앉아 막막한 어둠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던 . 잠이 들지 못해 뒤척이면서, 뉴스에서 나오던 배가 잠기는 장면이 잊히지 않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조금 울었던 . 그때의 내가 가장 많이 찾아본  어린  아이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아니라 선생이   얼마  됐다던 어린 여자 선생의 관한 기사였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평소에 어떤 말을 했는지. 나는 그런 것들을 조금 찾아보다 이내 눈물이  억지로 잠을 청하곤 했다.


   꿈을  다음날은 정말로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학교에 갔고 꾸역꾸역 강의실을 지켰고 친구들의 SNS 좋아요를 눌렀다. 그날은 강원도의 도시로 돌아가기 위한 길로 다른 길을 택했다. 평소였다면 지하철로 편히 갔겠지만 부러 신촌에서 광화문을 지나 청량리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하지만 버스는 광화문으로 향하는 대신 다른 길로 돌아 움직였다. 시위 때문에  길로 들어갈  없다고 했다.




  세 번째, 한 달을 걸러 두 여자 연예인의 죽음을 뉴스로 접했다. 나와 한 살씩 차이 나는 어린 친구들이었다. 소식을 들은 뒤 때가 남을 때마다 두 여자에 관해 생각했다. 출근길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 신호를 기다리는 때나, 밥을 먹고 난 뒤 다른 사람들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때나, 퇴근한 뒤 집 침대에 누워 기력을 충전하는 짧은 때에, 그녀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는 궁금하지 않았고 어째서, 왜, 이런 것들은 떠올리자니 우울해져 이제 그녀들이 이 세상에 없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영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봤는데, 그런 모습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직장 동료  하나가 일루미나티 이야기를 하면서 S양에 관한 음모론을 이야기해주었다. 평소였다면 무시했을  말에 나는 반박했다. 그런 말도  되는 믿는 사람들이 있냐고 비아냥되는  정도였다. 그는 기분 나빠하며 J군까지 들먹였다. 재미로 보는 거래도 그럴싸한 이야기라 반론하는 모습을 보자 입맛이  떨어졌다. 이것이 내가 관계 없는 죽음들을 슬퍼만 하지 않고 처음으로 반응한 일이었다. 처참하게도.



  관계없는 죽음들이 나를 너무도 슬프게 만들었다. 관계없는 시간들이 내게 남긴 것들에 대하여, 언젠가 써보자 노력했지만 내내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에 관해 생각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산다. 여전히 관계를 두고 싶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교훈적인 어필로  글을 끝내기엔 아쉽지만, 아직도 해내자는 말밖엔  관계에서 내가   있는 것이 없다. 애석하고,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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