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녕이 Feb 04. 2022

세 여자의 수필

최승자, 캐럴라인 냅, 정희진




  보통의 경우 나는 책을 고를 때 왓챠 피디아를 이용한다. 왓챠 피디아에는 내가 보고 싶은 책들이 표시되어 있다. 이게 무슨 말인고하면 기록광인 내가 마땅한 독서 기록 어플을 찾지 못했다는 소리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왓챠 피디아를 독서 기록 어플로 사용할 누군가에게 첨언하자면, 왓챠 피디아는 책보다는 영화와 시리즈물에 최적화되어 있으므로 그다지 독서 기록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따금 검색하면 없는 책이 나오고, 같은 책이더라도 양장본과 문고본이 있으면 양장본을 읽었다고 표시한 후에도 문고본을 내게 추천해준다. 왓챠 피디아에서도 이런 부분을 개선할 의사는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내가 왓챠 피디아를 계속 이용하는 것은 첫째는 이미 지난 삼 년간 사용한 탓에 이룩해둔 나의 데이터가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왓챠 피디아의 간단한 분류법(읽었어요, 읽고 싶어요, 읽는 중이에요.)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대부분 읽은 책은 별 세 개를 받는다. 평점을 주는 형식을 취하는 어플이라 주고 싶지 않아도 줘야 한다. 별 다섯 개를 주는 책은 다시 읽고 싶거나 누군가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고, 내 흥미가 아니었던 책의 경우 세 개 이하의 평점을 준다. (비슷한 책의 추천을 피하려고 수를 쓰는 것이다.) 이따금 왓챠 피디아에서 추천해주는 책을 읽고 싶어요로 저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리뷰를 본다. 책 아래에는 종종 리뷰가 달려있고(많은 경우엔 없지만), 좋은 리뷰를 발견하면 그 사람의 프로필에 들어가 본다. 대부분의 경우엔 영화나 시리즈물에 관한 평점이 더 많다. 영화나 시리즈물에 비하여 책을 읽는 사람이 적다는 반증이라기보다는 이 어플은 독서 어플이 아니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좋은 리뷰를 적은 사람이 좋게 평가한 책을 구경하는 건 즐겁다. 거기에서 읽고 싶은 책들을 발견하면 읽고 싶어요를 클릭해둔다. 웹 서핑을 하다 누군가 남겨둔 서평을 보면 책을 왓챠 피디아에 검색해 저장해두기도 한다. 나로선 서점 어플의 장바구니에 넣어두는 것보다 편하다. 현재 읽고 싶어요 목록에 담긴 책은 304개, 읽는 중에 담긴 목록은 29개이고, 평가한 책은 366개이다. 지난 삼 년간 기록한 읽고 싶은 책이 읽은 책 보다 적은 것이 마음의 위로가 된다. 읽은 책 366개가 전부 다 지난 삼 년 동안 읽은 것은 아니기에, 곧 읽고 싶어요 목록이 읽은 목록을 앞서 나갈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읽는 중에 담긴 목록은 대부분 읽다가 도저히 읽히지 않아 (흥미가 없는 주제인 경우가 많다.) 도서관으로 반납한 책이나, 책꽂이 아래 칸에 꽂힌 채 영원히 갇혀버린 책, 혹은 느리게 느리게 읽히는 책들이다. 느리게 읽히는 책의 종류는 대부분 수필이나 시집인 경우가 많다. 소설이나 만화책의 경우는 조각조각 단편집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도 소설가가 쓴 다른 소설이 궁금해 후루룩 읽어버린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소설은, 피곤하고 졸린 상황에서도 맥락이 눈에 들어오면 읽힌다. 머릿속으로 상상하기가 쉽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반대로 시는 한 땀 한 땀 진지하게 읽느라 시간이 걸린다. 한 자리에 앉아 시 한 개를 읽으면 그다음 시는 여운을 뺏기는 것 같아 읽을 수가 없다. 조각조각 난 시를 문제집에서 접한 세대라 그런지도 모른다. 내게 시는 네모칸 안에 조각난 채로도 여운을 남겨, 시험을 보다가 멍청하게 시간을 뺏기고 마는, 그런 문학이었다.


  에세이는, 조금은 다르다. 다양한 주제이지만 맥락이 담긴 하나하나의 수필은 쓴 사람이 내게 기꺼이 떠들어주는 것 같아 가만가만 읽게 된다. 어떤 수필은 그 자리에 앉아 1시간 내에 다 읽어버리기도 한다. 이야기에 담긴 재치가 재미있을 때 그렇다. 그렇게 수필집을 읽게 내면 아 즐거웠다, 하는 기분이 든다.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 폭풍 수다를 2-3시간 이상 떨고 난 뒤의 후련함과 유사하다. 그런 수필이 있는가 하면 한 편, 한 편, 시집처럼 읽게 되는 수필집이 있다. 나는 그럴 때 가르침을 받는 거라고 생각한다. 짧은 두 세장의 글을 통해 내가 작가들의 삶을 배우고 있는 거라고.  


  현재 나는 세 분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매일 저녁마다 그녀들은 내게 가르침을 선사한다. 책의 두께와 챕터 간의 장수에 따라 <정희진처럼 읽기>는 오래되었고, <명랑한 은둔자>는 중간부터 시작했지만 거의 끝을 보고 있으며,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오늘부터 시작되었다. 이렇게 여러 권을 읽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하루에 세 작가님에게 짧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빨리 읽는 사람이라면 한 챕터를 10분 내외로 읽을 수 있다. 세 분의 작가에게 받는 퀵 강의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것이 수필의 묘미라고 감히 얘기해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격이 급해서 긴 영상이 맞지 않는다.


  오늘 세 분의 이야기가 몹시 좋아 짧게나마 이곳에 남겨두고 싶었다. 첫 번째는 정희진 작가님이다.





  미래가 궁금해서 '점쟁이'를 찾아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뛰어난 점술가는 미래를 맞히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의 몸을 보고 과거를 말해준다. 찾아간 사람도 과거나 현재의 마음 상태를 짚어줄 때 '용하다'고 평가한다. 어차피 미래는 아무도 모르므로 확인할 수 없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언제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다. (중략)

  포스트는 최근 인류 300년 역사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담론이다. 이 논쟁에서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시간은 순서가 아니라는 것.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순으로 흘러 앞으로 나아간다는 개념은 근대에 고안된 것이다. (중략)

  사실과 언어의 불일치는 본디 당연한 것이다. 이 혼란이 민주주의이고 탈식민주의이다. 서구가 '지리상의 발견'을 했다면 우리는 발견된 '것들'인가? 근대의 주체가 개척하는 인간이라면, 개척당한 자연은 근대의 타자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모던의 기준이 백인 남성이라면, 흑인이나 여성은 그 자체로 포스트모던한 존재가 된다. (중략)

  포스트는 전후의 문제가 아니다. 포스트의 시간성에 대한 사유는 전진해야만 하는 삶에 태클을 건다. 시간을 따라잡기보다 따돌리자. '지금 여기'에 '가는 시간'을 넘어뜨려야 한다.



 


 두 번째는 캐럴라인 냅 작가님이다.

 



  나는 보통 사람이 되는 수업을 듣고 싶다.

  이런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나는 평범한 노동자,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시민, 바글거리는 군중 속의 이름 없고 얼굴 없는 한 구성원이고 싶다.

  당신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당신도 혹시 그러고 싶은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이것이 얼마나 손에 넣기 어려운 목표인지 알 것이다. 이것이 언뜻 생각하기보다 더 어려운 목표라는 사실을. (중략)

  내가 평범한 삶, 보통사람이라는 이 목표를 진작 추구하지 못했던 것은 아마 평범함은 나쁜 것이고 보통이란 추구할 가치가 없는 목표라고 생각하며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특권이 지나치게 많고 고상했던 내 성장 환경의 탓도 있다. 케임브리지의 세련된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숟가락 쥐는 법을 배우면, 즉 어린 나이부터 내가 해내는 일이 나 자신의 존재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배우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의 방식을 목표로 삼기가 어렵다. "엄마, 아빠. 저 대학 졸업하고 나서 편의점 직원이 될 계획이에요. 괜찮죠?" 사방에서 심장발작 일으키는 소리가 들린다. (중략)

  그냥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까? 그냥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여자가 되면 안 되는 걸까? 나는 평생 이런 질문들과 씨름해왔는데, 그날 저녁에 문득 그 답은 너무나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괜찮다. (후략)




  세 번째가 최승자 작가님이다.




  때로 한 10년쯤 누워 있고만 싶어질 때가 있다. 모든 생각도 보류하고 쉽게 꿈꾸는 죄도 벗어버리고 깊이깊이 한 시대를 잠들었으면.

  그러나 언젠가 깨어나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의 황량함, 아아 너무 늦게야 꺠어났구나 하는 막심한 후회감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결국 그 거대한 타의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인간답게 죽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대항해서 싸우는 필사의 길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밤에도 나는 이를 갈며 일어나 앉는다. 끝없이 던져지고 밀쳐지면서 다시 떠나야 하는 역마살의 청춘 속에서, 모든 것이 억울하고 헛되다는 생각의 끝에서, 내가 깨닫는 이 쓸쓸함의 고질적인 힘으로, 허무의 가장 독한 힘으로 일어나 앉는다. (후략)





  나는 이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즐거웠다. 첫 번째 글을 읽으며 점쟁이들이 미래보다는 과거나 현재를 더 잘 맞춘다는 생각에 나 역시도 동의했고, 내가 모르는 것이 언제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였다는 것을, 나조차도 저 문장에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시간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개념은 사실상 당연한 것인데, 그것이 근대에 발생된 개념이라는 사실도 놀랍다. 중략된 부분 중에는 고대의 시간의 개념은 원에 가깝다고 설명된 부분이 있다. 불교의 윤회사상을 떠올리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까마득 잊고 사는 사실이라 새삼스럽고 재미있다. 사실과 언어의 불일치라는 개념은 문장을 한 번 읽어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만 어떠한 부분에 내가 기준을 삼고 살아가고 있는지 돌이켜보면 그 문장이 내게로 와서 빛을 얻는다. 그러므로 나는 포스트의 시간성에 묶여 있지 않는 방법을 고민해보기도 한다. 이후에, 탈, 넘어선, 이 단어 중 어떠한 것들에도 걸려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해일이 오든 파도가 오든 해변에 조개를 주워도 된다는 생각도 든다.

 

  두 번째 글을 읽으면 신기하다. 95년도에 써진 글에 내가 어느 정도 공감한다. 안경사를 평범하다고 일축하는 내용이나 편의점 직원의 비유를 따르면 마음이 불편하다. 22년도에 나는 이런 것에도 불편해진다. 22년도까지 캐럴라인이 살았다면 그녀도 이 사실에 불편해했을 것 같다. 지금의 우리는 평범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 너무도 많다고 생각한다. 특별하기는 바라지도 않고 평범하게라도 살고 싶은 사람이 너무도 많다. 그녀가 말했듯 케임브리지를 나오는 게 당연한 목표가 된 중산층 자녀로서는 쉬이 공감할 수 없는 다른 개념의 평범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세상에서 다른 고통과 싸웠고, 우리 둘의 목표가 평범으로 동일시된다면 나도 그 평범을 바란다고 말할 수 있다.


  세 번째 글은 무려 76년도에 써진 글이다. 시대와 시기가 몰려 있는 글이지만 나는 상대적으로 그때보다 평안한 시기에도 10년쯤 누워 있고만 싶다. 하지만 최소한 인간답게 죽어지기 위해서는 별 수 없다. 최승자 시인의 글을 읽고 이 세 사람의 글을 필사해보았다. 인생의 궤도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싸워가면서 사는 법, 살아야 하는 법을 철저히 배우기 위해. 공부하듯이.....





작가의 이전글 관계없는 죽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