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국민드라마 '전원일기'가 사무치게 그리운 이유
5월은 가정의 달이다. 5월 5일 '어린이날', 5월 8일 '어버이날', 5월 15일 '스승의 날', 5월 20일 '성년의 날', 5월 10일(음력 4월 3일) 내 생일까지... 책상 앞 달력이 굵게 체크한 빨간 동그라미로 가득하다. 세인들이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60을 바라보는 56세 중년에게 가정의 달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위의 모든 기념일을 충실히 기념하느라 돈과 시간, 열정을 소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기념일의 대상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장남으로서 생존하시는 어머님을 챙겨드려야 하는 어버이날을 제외하고는 지켜야 할 기념일이 하나둘씩 없어지는 것을 보며 가슴 한편이 외로워지고 헛헛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24년 5월. 대한민국에서 '가정'이라는 의미는 현대인들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각인되고 있을까? 5월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문득 머릿속을 지나치는 질문이다. 하루하루 24시간을 회색빛 콘크리트 도심에서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적자생존의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한경쟁하는 현대인들에게 가족공동체는 어떠한 의미로 자리매김하고 있을까? 개인적으로 보건대 대한민국 사회를 굳건히 지탱하였던 윤리적 기반인 가정의 해체는 가속화할 것이며 종국적으로 대한민국의 국가적 위기를 초래할 것이 예상된다.
그렇다면 삼강오륜 등 유교적 가치와 가족공동체를 생명처럼 중시하는 동방예의지국 대한민국에서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단위 가정이 이처럼 빠르게 파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출산고령화 등 인구구조의 변화를 근본적 원인으로 제시할 수 있지만 가족문화 해체를 조장하는 방송문화의 부정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모 여자 중견탤런트의 재혼소식과 가족구성원 간 불미스러운 일로 1년 6개월 만의 파경, 아들이 있는 여성과 러브스토리를 보여주며 결혼에 성공하여 알콩달콩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 남자 탤런트의 불륜, 걸그룹 출신 아이돌 가수가 세 자녀를 출산하고 이혼 후 화려한 싱글생활을 한다는 소식은 정치, 경제뉴스만큼 언론에 노출되며 세인들 관심을 이끌면서 대한민국 가정해체의 어두운 그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웃픈 상황이다.
최근 KBS, MBC, SBS 등 공중파 방송과 MBN, TV조선 등 종합편성채널 방송콘텐츠 중 가족 관련 예능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남녀노소 세대를 불문하고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미운 우리 새끼, 나 혼자 산다, 동상이몽, 돌싱포맨, 환승연애, 고등학생엄빠, 오은영의 금쪽상담소, 나는 자연인이다, 우리 이혼했어요, 살림남, 동치미... 내가 모두 시청하거나 관심 있게 보는 방송이다. 주제는 이혼, 독신주의, 별거, 부부갈등.. 가족구성원의 다양한 갈등상황을 밀착촬영하여 시청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형태의 방송포맷이다.
내가 처한 가정의 상황과 비슷한 타인의 가정을 보여줌으로 시청자에게 사회적 동질감을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간접적인 솔루션을 제공하자는 연출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저 많은 방송들에서 드러나는 비정상적인 가족의 상황들을 보고 새로운 개선안을 모색하는 시청자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나 혼자 산다', '미운 우리 새끼' 출연자의 호화스러운 싱글라이프를 보며 독신주의를 결심하는 청춘들, 이혼을 희화하하며 이혼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전달하는 '돌싱포맨', 고부갈등, 부부갈등을 주제로 난상토론하며 가족의 단점을 동네방네 노출하는 '동치미', '동상이몽', 중년남성이라면 가족을 떠나 멋진 일탈을 한 번쯤 생각하게 되는 '나는 자연인이다'. 모두가 가족질서의 전통적 가치를 존중하는 가족공동체와는 부합되지 않는 인스턴트형 예능방송이다. 프로그램 시청률 향상에는 일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방송의 사회적 가치를 다 하고 있는지는 방송관계자들 모두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1970년대 후반 초등학교 시절 매주 일요일이면 단칸방에 옹기종기 모여 가족이 함께 보던 방송이 있었다. MBC에서 20년 이상을 방송한 국내 최장수 드라마 '전원일기'이다. 양촌리라는 시골을 배경으로 지역공동체와 3대가 함께 어우러지는 가족공동체 문화를 TV브라운관으로 생생하게 보여줌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드라마라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는 명작이다. 권선징악이라는 다소 진부한 구성이지만 가족 간의 갈등상황을 가족구성원이 서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과정은 시청자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재방송되지만 그때 그 시절의 정서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밖에도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사랑이 꽃피는 나무', '우리들의 천국' 등 1970년대부터 2000년 초반까지는 드라마 제목도 긍정적, 포용적, 진취적으로 현재의 가족예능 타이틀과는 사뭇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나도 그때 그 시절 드라마 등 방송을 보고 아버지의 역할, 장남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현재의 시대적 환경에서 보면 당시 방송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방송을 보고 난 후에는 따스한 온기가 가정을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유지하는 자양분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가족예능 프로그램은 가족과 가정, 가족구성원 관계의 중요성이라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가정을 아름다운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촉매제의 역할은 부족하다고 보인다. 방송이 독신, 이혼, 부부갈등, 불륜 등을 미화함으로 급속하게 가정해체를 가속하는 도화선이 되고 있지 않은지 걱정이다.
시대가 변하면 사회적 가치도 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2024년 Chat GPT가 상용화되는 AI(인공지능) 사회에서 조선시대 유교주의 성리학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도 변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행복한 가정이다. 가정이 행복해야 사회가 행복하고 사회가 행복해야 국가가 행복하다는 말이 골동품처럼 고리타분하지만 사회과학적 연구로도 충분히 검증된 명제임에 틀림없다.
아울러 현재 각종 방송에서 인기몰이중인 가족예능 프로그램의 전면적 개편이 필요하다. 현재 가족 예능프로그램에는 예능은 있지만 가족이 없다. 재미는 있지만 감동이 없다. 가족공동체와 가정의 가치를 중요시하지 않는 가족예능 프로그램은 '가족'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가정을 해체하는 시한폭탄이다.
2024년 5월 가정의 달을 보내며 행복한 가정의 참 의미를 생각해 본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어렸을 때 방송에서 많이 나오던 "비둘기집"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