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사란 무엇인가』, 『이주하는 인류』짧은 리뷰
『이주사란 무엇인가』, (지은이) 디르크 회르더, 크리스티아네 하르치히, 도나 가바치아, (옮긴이)이용일, 교유서가, 2025-12-10.
『이주하는 인류』, (지은이) 샘 밀러, (옮긴이) 최정숙, 미래의창, 2023-07-20.
돌아다는 삶을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사람이 자릴 잡고 살아야지" 이전 세대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말이다. 그래서 때론 그것이 맞는 이야기처럼 들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살다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유튜브를 보더라도 여행 콘텐츠는 빠지질 않는다. 연중 절반 이상을 돌아다니며 콘텐츠 만드는 유튜버도 많다. 세상이 바뀐 거 같긴 하다. 빠니보틀 같은 사람을 부러운 시선으로 보지 안타깝다고 보진 않다.
그런데 그냥 돌아다니는 것만이 아닌 장기 거주 목적으로 이동하는 것은 상당히 쉽지 않다. "여행으로 오는 건 오케이, 하지만 살러 오는 건 좀..." 이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이 언제부턴 이런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최근 각국이 외국인을 상대로 제한하는 정책들이 많아졌고, 미국은 그 첨단을 달린다. 이주에 관련된 책을 좀 찾아보게 된 건 이런 이유였다.
인간(호모사피엔스)가 등장하자마자 처음부터 자릴 잡고 살았을까. 당연히 아니다. 인류의 여러 줄기가 아프리카를 나와 전지구로 나아가고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돌아다니는 삶은 사는 것은 인류의 오랜 이야기와 다 관련이 있다. 들어오는 이주, 나가는 이주에 대해서만 이주라고 사고는 방식은 이런 빅 히스토리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주사란 무엇인가』, 『이주하는 인류』 모두 이주를 다루는 시작은 이렇듯 호모 사피엔스의 이동과 관련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나마 종species으로서 이주를 좀 더 적극적인 생활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한반도에서, 또는 지구 어디에서건 살아온 몇 세대 이전의 조상들의 말(정주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말)은 그닥 맞는 것 같지 않다. 그 조상들의 윗세대가 그렇게 살지 않았다. 그러고도 잘 산 것 같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존재한 시간대가 대략 20만 년 전후라고 해도 과연 이 기간 중 정주의 삶을 주요 패턴으로 살았던 기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반도 2000년? 길게 잡아도 5000년? 좋아 더 쓰지 만년이라고 해보자. 그래도 그 기간이 5프로도 안된다. 그리고 이주를 좀 더 미시적으로 보는 관점에서(『이주사란 무엇인가』에서 소개한 관점들) 보면 우리 부·모의 생활 반경 변경도 다 이주에 해당한다. 도시 간의 이동, 결혼 이슈에 관한 이동, 직업-노동에 관한 이동, 성별 역할에 따라 나눠진 이동 등을 감안한다면 이주의 패턴이 바뀐 것일 뿐 꽤나 지속적인 정주를 찾는 게 쉽지 않다. 무리의 역사로 보나 우리 개개인들의 삶을 보나 이주는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이주를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주하는 인류』의 저자는 이주를 정의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심리학자 그레그 메디슨의 정의를 동의하며 빌려온다. "이주민은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옮겨간 사람으로, 그가 경험하는 두 번째 문화는 첫 번째 문화와 크게 다르며,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도전 과정을 겪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기간 동안 머문다."(『이주하는 인류』, 10쪽) 이주는 전반적인 삶의 방식-문화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살면, 그것이 이주인 것이다. 그래야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다. 대형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만들어진 게 길게 잡아야 5,6000년이다. 그리고 국가 간의 사람의 이동을 개별적으로 허가하거나 통제하는 것은 지역마다 좀 차이가 있겠지만 19세기 후반이나 돼야 여권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그 이전에서 나라가 있어도 이동해 사는 것이 지금과 같지 않다. 이러한 내용은 『이주사란 무엇인가』, 『이주하는 인류』 두 권 모두에서 다룬다.
어떤 형태로든 국가 단위의 공동체가 전지구를 지배하면서 이주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이주라는 인류의 패턴은 종으로서 삶의 방식이었다. 식량과 기후변화에 따라 이리저리로 이동하거나, 배고픔을 피해 이 공동체에서 저 공동체로 옮겨 다녔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이 인류를 진화시켰고 종을 확장시켰다. 선택적 폐쇄는 결국 너와 나의 경계를 강화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20세기의 큰 전쟁이 이와 같은 이유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폐쇄된 공동체는 자신의 공간을 넓히기 위해 주변의 거주민을 쫓아낸다(강요된 이주). 결국 그렇게 팽창하다가 전쟁과 같은 충돌 사건으로 외부로부터 강제적 이주를 주입당한다. 이주는 상수고, 공동체는 어떤 형식으로든 변화하게 되어 있다. 어느 쪽으로 갈지는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2000년대에서는 '자유'를 강조하는 사조들이 판을 치면서 신자유주의니 초국가, 글로벌, 전지구적 단위를 지향하는 것처럼 떠들어대더니, 20년이 지난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복귀적 민족주의-국가주의, 강약약강에 각자도생에다가 국제적 단위에서 전지구적 문제는 아예 대응이 안된다. 환경문제만 봐도 이해하기 쉽다. 하물며 인간의 이동은 정말 국가 단위에서의 필요에 의해서만 조절한다. 이 조절은 기술과 함께 굉장히 미시적인 단위에서 개인의 이동을 통제한다. 20세기, 21세기 들어 개인에 대한 통제가 극심해진 것이다. 그 배경엔 국민국가(민족국가)라는 괴물이 있다. 이걸 없애고 싶다고 당장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니, 인류가 공존하기에 정말 적합한 단위의 공동체로 잘 이행되지 않는다면, 몇 세기 동안은 이주에 대한 문제는 계속될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주사란 무엇인가』, 『이주하는 인류』. 두 권 다 좋은 책이지만, 전자는 학술적 성격이 있는 개론서다. 이주의 관련된 여러 이론들과 이전(2000년대)에 다루었던 관점보다는 새로운 관점(개인사적, 젠더적, 노동의 관점 등)에서도 이주를 설명한다 그리고 19세기, 20세기 이주 문제들을 다루면서 그것을 해석하는 이론을 소개한다. 그래서 교과서 읽는 느낌이다. 반면 후자는 저자가 인류사 적 관점에서 주요 시점에서 이주가 어떤 식으로 전개됐는지, 비치는지 이야기한다. 선사의 이주, 고대 유럽의 이주, 바이킹의 이주, 콜럼버스의 이주, 아프리카의 아픈 이주, 황인종의 이주, 유대인, 그리고 남미까지. 작가 자체가 어디 오랜 기간 머물기보다는 여기저기 다니는 사람이다. 취향대로 골라서 정보를 얻으시고 이주를 방해하는 지금 시대에서 좋은 생활 방식을 얻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