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의 역습』, 『뇌는 어떻게 변화를 거부하는가』 리뷰)
1846년 오스트리아 빈종합병원에 이그나즈 제멜바이스라는 산부인과 보조의사가 부임했다. 그는 의사가 돼서 가난한 산모들을 도우려 했다. 하지만 그가 출산을 도운 산모들은 고열에 시달리다 아이들을 남기고 속절없이 세상을 떠났다. 당시 이 질병을 산욕열이라고 했다. 그가 근무하는 산부인과는 1병동이었는데, 1병동에서 출산한 산모들은 2병동에서 출산한 산모들보다 사망률이 월등히 높았던 모양이다. 그는 2병동과 비교해서 다른 것들을 꼼꼼히 확인했다. 1병동에서는 사망한 주검을 해부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부하다가 주검의 작은 입자들과 함께 진료 시간이 되면 바로 진료를 했다.(당시엔 세균 감염을 몰랐다) 2병동은 해부를 하지 않았다. 제멜바이스는 이것저것 검토하다 직원들에게 해부 직후 손과 도구들을 염소 용액으로 소독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 1병동에서 상당한 호전이 있었다.
제멜바이스는 다른 병원, 다른 나라에 이 소식을 알리면 산욕열로부터 산모들을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제멜바이스는 적절한 통계를 통해 근거를 내세웠지만, 유럽과 미국의 의사들은 그의 조언을 무시했다. 1861년 책까지 썼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조언이 효과를 발휘하기까지는 3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제멜바이스는 1865년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글래스고의 조지프 리스터가 페놀을 이용한 살균 소독법을 적용하고 좀 더 나은 결과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옳다고 여겨지기까지는 10여 년이 더 필요했다. 1878년 파스퇴르가 산욕열이 박테리아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고서야 의사들은 제멜바이스와 리스터의 조언을 받아들이게 된다.
당시 의사들은 왜 그랬을까. 제멜바이스와 리스터의 주장에 거칠게 반발했다. 의사들은 당시 자신의 의견을 쉽게 바꾸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그들의 의견을 쉽게 바꾸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의견과 배치된 주장을 듣게 될 경우 잘 안 듣게 된다.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들을 가져온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확증편향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들어봤을 것이다. 제멜바이스와 리스터의 이야기는 대표적인 확증편향의 예시다. 문제는 이런 확증편향이 인간의 주요 성향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편향적 현상은 인간이 그렇게 오랫동안 진화하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뇌는 어떻게 변화를 거부하는가』가 소개한 확증편향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은 일일이 모든 것을 팩트체크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진화할 때 그런 식으로 모른 것을 확인하고 넘어가게 진화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인간이 진화할 때 확증편향이 인류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이전부터 수렵과 채집을 통해 진화했을 텐데, 수십만 년 동안을 통해 경험적이고 문화적으로 축적된 정보를 쉽게 바꾼다는 것은 생존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인류는 수렵과 채집의 방법을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배웠을 것이고 그 방법으로 생존했을 것이고, 그들은 그렇게 생존해 왔으니 무리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받아들인 것들을 통해 자신의 생존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다른 방법이 누구이든 무엇이든가에 의해 다른 방법이 제안되거나 기존의 생존 방법이 거부되게 된다면, 타자에게 쉽게 동조하는 것이 생존에 적합할까 아니면 거부하고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적합할까. 적어도 조상으로부터 배우거나 경험했던 것은 그 성인이 생존하게끔 증명된 것이기에 받아들이기 쉽지만, 타자에 의한 것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인간의 뇌 또한 그렇게 반응한다는 것이 연구결과인가 보다. 즉 어떤 사람에게 동조하는 이야기가 들릴 땐 뇌의 특정 부위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동의하지 않는 의견에 노출되면 활발하지 않다고 한다. (새로운 것에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보다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에너지 소모가 덜하다는 의견이다.)
한편, 인간은 자신의 의견을 바꾸지 않고 관성대로 밀어붙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어렸을 때는 다르게 반응한다. 모방이다. 완전히 반대의 이야기지 않은가. 아이는 태어나 엄청나게 많은 것을 따라 한다. 성인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다. 먹는 것, 의례(인사 악수 같은 것) 등 하나하나 열거하기에 많은 것들이 있다. 모방하는 아이들은 모방한 것이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는다. 아이가 자라난 공동체에서 지식을 습득할 때도 모방이 기본이다. 어른들을 따라 채집하고 사냥한다. 채집을 할 때 어떤 것은 먹어도 되고 어떤 것은 약으로도 쓰곤 한다는 것은 어떤 부족이나 공동체가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어 얻은 지식일 테다. 사냥도 비슷할 것이다. 모방은 이 과정을 엄청 압축시켜 전달한다. 모방은 진화에 필수적이다.
『뇌는 어떻게 변화를 거부하는가』, (지은이) 슈테판 클라인, (옮긴이) 유영미, 어크로스, 2026-01-28.
『인간 본성의 역습』, (지은이) 하비 화이트하우스, (옮긴이) 강주헌, 위즈덤하우스, 2025-12-10.
앞에 이야기한 편향이나 패턴 말고도 책에는 여러 성향들이 언급되는데, 이외에도 많은 성향들이 진화적 과정에 형성됐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인류가 생존에 적합했던 패턴이나 편향이 진화의 시간 중 엄청 짧은 기간인 요즘, 현재, 현대 시대에 뭔가 불편해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 본성의 역습』, 『뇌는 어떻게 변화를 거부하는가』는 요런 문제들을 지적한다. 19세기 산욕열에 대응한 산부인과 의사들 같이 확증편향이 문제로 여겨져 수정되는 사례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현대 사회에서는 과학적 근거가 편향을 좀 완화시켜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만(과학적 근거로 편향을 수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상대적이지만 짧은 시간에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 공동체나 정치 지형에서는 확증편향 문제가 심각하게 발전되기도 한다. 도덕적 기준에 맞음-맞지 않음, 좋음-나쁨, 정의justice의 문제와 얽혀있으면 문제가 많이 복잡해진다. 공동체 자체의 규모가 이전보다 커졌고, 그 내부 인구들 간의 의견 대립은 확증편향에 의해 강화되기도 한다. 게다가 소셜네트워크는 이러한 편향을 재생산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다. 의견뿐만 아니라 이미지 자체로 자신의 의견 강화 또는 거부를 바로 표시할 수 있기 때문에 공동체 내부의 의사소통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화시키기도 한다.
두 책에서 공통적으로 현재의 심각한 지구적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 환경 위기, 생태적 위기이다. 지구는 인간의 현재 소비성향이 계속될 경우 인간이 생존하기 적합하지 않은 곳으로 바뀐다. 인간은 어려서 모방을 통해 배우고, 성인이 되어서 어느 정도의 편향을 관성처럼 유지하며 산다. 생물학이나 진화적으로 매우 타당하다. 그런데, 인간은 최근 백 년, 이백 년 사이에 엄청나게 소비를 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아침부터 소비를 시작해 저녁까지 소비를 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특히 현대의 소비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에너지이고 이것을 만들기 위해 환경을 망치고 있다. 굳이 부연하지 않더라도 다 안다. 왜 아는데 안 하고 안 바꾸는 걸까. 바꾸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과거에 어려웠지만 인간이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한 적이 있다. 『뇌는 어떻게 변화를 거부하는가』에서 소개한 예는 노예 문제다. 프랑스는 1794년 노예제를 폐지했다. 중간에 나폴레옹이 부활시켰지만 나중에 다시 폐지시켰다. 영국은 1833년에 폐지시켰다. 미국은 노예제도가 직접적으로 경제구조 안에 있었기에 산업구조의 재편성과 연관돼 더 늦은 미국 남북전쟁을 거치고 1865년에 폐지시켰다. 1770년 암스테르담에서 발행된 책 『두 인도의 역사』를 통해 노예의 잔혹사가 유럽에 퍼졌다. 하지만 잔인하다는 인식 하나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폐지 과정에서 의식 변화가 있었고, 노예 제도의 직접적 피해자들의 저항도 있었다. 여기서도 많은 노예들이 죽어갔다. 그리고 부딪힘을 통해 가치관이 변해갔다. 인권이라는 개념의 확장도 동반되어야 했던 것이기에 18세기의 부침이 있었던 시기를 통과했어야만 했다. 그래서 제도를 안착시켰다. 그전이라면 그저 몇몇 노예 반란이나 새로운 왕국이 새로 나왔다가 사라지는 역사를 반복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자가 '바뀜'의 성공 사례라고 들긴 했지만, 바뀌는 일은 간단치 않다.
환경문제, 생태학적 위기도 이와 같이 가치관이 바뀌어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뇌는 어떻게 변화를 거부하는가』의 저자는 그것을 위한 4단계의 방법을 권한다. 올바른 정보를 얻게 하고, 습관을 바꾸고, 습관의 모방을 통해 주변에 전염시키고, 그것이 긍정적인 결과는 낳는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4단계로 변화를 꾀어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나 행동 패턴을 응용하기 때문에 적합하게 적용한다면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독자들도 상당 부분 동의할 것이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노예제를 없애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노예들의 저항, 인권 개념의 확장, 정치 경제적 구조의 재편 등을 따져보면 족히 몇 세기는 걸렸다. 그리고 피해 당사자들이 확실했고, 바로바로 '볼' 수 있었다. 피해자를 앞에 두고 누군지 확인할 수 있으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이런 사례는 『인간 본성의 역습』에서도 언급된다. 직접 만나는 경험과 그렇지 않은 것에 인간의 뇌는 다르게 반응한다.) 그런데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를 겉으로 바로 식별하기 어렵다. 그리고 노예제 폐지에 소요된 그만큼의 시간이 환경문제에서도 비슷하게 주어질지 난 잘 모르겠다.
『인간 본성의 역습』의 저자도 『뇌는 어떻게 변화를 거부하는가』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성향이 현재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인간 본성의 역습』의 저자는 좀 더 인류학적, 뇌과학적 근거를 들어 모방과 종교성, 부족주의를 분석하고 그 해결책으로 의례적인 것의 기능에 좀 더 구체성을 부여한다. 의례의 순기능에 집중해 보는 것이다. 물론 현대 이전의 의례 같은 것을 가져오자는 생각은 아니다. 의례는 어쩌면 집단적 습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맥락에서 이런 의미를 가진 것을 찾아보자는 것인데, 아이디어가 나름 나쁘지 않다. 예를 들어, 소비제품의 라벨링을 통해 이 제품을 소비할 때 얼마의 탄소가 발생하는지 핸드폰 앱을 만들어 소비 행동을 직접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이런 앱의 실천 행위를 학교나 각 집단에서 의례적인 것을 설정하고 개인의 활용을 장려하면 확실히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이외에도 여러 의례적인 것들을 소개해 준다.
어쨌든 대동소이하게 두 저작의 저자들은 결국 인간의 뇌와 관련된 성향을 끌어내야만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제는 시간. 결국 인간이 늦지 않게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습관을 장착하는 것만이 위기를 넘길 방법이다. 아는 것도 아는 것이지만 습관화하는 것. 그 구체적 방법을 찾아야 할 시간이다.
*인간이 좋은 습관을 장착하기 전에 고도의 AI가 인간의 문제를 파악해 인간을 통제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뭔가 시키는 건 하기 싫다) 그것들의 고도화를 못 막는다면 그전에 그것들에게 자비를 좀 학습시키면 좋을 것 같다. 살긴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