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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May 25. 2020

책, '그냥 좀 괜찮아지고 싶을 때' 가 출간되었습니다

(서문)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1296523



  어릴 적 나는 전형적인 ‘문돌이’였다. 적성검사를 하면 적합한 직업으로 늘 언어학자, 변호사가 나왔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아무도 찾지 않는 학교 도서실을 홀로 지키곤 했다. 글을 읽고 내 마음 가는 대로 머릿속에 그 장면을 그리는 것이 좋았다.     


  중학교 때부터 15년간 내 곁을 지켜준 우리집 막냇동생 ‘깐순이’가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느닷없이 수의사가 되겠다 마음먹지 않았더라면, 취업 걱정이 앞서지 않았더라면 이과를 선택해 수학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의 기대와 성적, 그리고 어렵진 않지만 그리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가장 알맞은 선택을 하여 의대에 진학했다. 의학도의 길은 내게 과분했다. 그러나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으나 타고난 문돌이의 갈증이 남아 있었다. 검사 수치와 진단명으로 표현되지 않는 사람, 삶의 이야기에 목말랐다. 그러던 내게 정신의학은 의학이나 사람 냄새 나는 의학이었다.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정신과 의사가 되기 전에는 막연히 이 직업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되면 마음에 통달해서, 그야말로 도를 깨쳐 감정에 연연하지 않고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 여유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괴로워하는 구석을 단박에 해결할 수도 있겠지 하는 허황된 희망. 막상 정신과 의사가 되고 보니 그런 생각은 말 그대로 순진한 환상,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정신과 의사로 산다고 해서 감정이 무뎌지는 것도,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지하철은 만원이었고 월급은 적은데 세금은 비싸며 격무에 시달릴 때면 도망치고 싶었다. 또 정신의학은 나를 초월자, 독심술사, 구원자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살아온 세월, 환경, 가치관이 다른 각각의 환자들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미지의 세계를 더듬는 일이었다. 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한계, 나를 찾는 모두를 도울 수는 없다는 현실 앞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의학은 나를 매료시켰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치료자이기 이전에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사람의 마음에 관해 공부하며 늘 생각했다. 그때 이걸 알았더라면, 그때 이 관점으로 생각하고 이 마음으로 살아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신의학은 마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원리를 알게 해 주었다. 또 내 삶이 그토록 버거웠던 이유, 과거의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을 살아가게 하는 이유, 그리고 사느라 바빠 쉽게 잊고 마는 삶의 소중함을 돌아보게 하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무엇보다 어느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고 그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주었다. 이 모든 것이 나 혼자만 알고 간직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중요했다. 문돌이의 꿈을 되살려 글을 쓰기로 했다.     


  지나고서야 깨닫는 것들이 있다. 그때 그에게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그게 전부가 아니었는데. 그러나 지나고서야 깨닫는 것들이란, 지나고서야‘만’ 깨달을 수 있다. 그립기도 하고 후회도 되는 그 시간들을 되돌릴 수 없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쓰는 것뿐이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때의 내게, 그리고 지금 잠 못 이룰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당신에게 꼭 전하고 싶은, 어느새 내 마음속 가득 고인 이야기들을 하나둘씩 꾹꾹 눌러 썼다.     


  쓴 글을 마땅히 전할 길이 없어 블로그에 올렸는데 첫 2년간 방문자는 마흔 명 남짓 (하루 방문자가 아닌 2년간의 총 방문자 수다)이었다. 그런데 그분들께서 길고긴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며 내 글이 큰 위로가 됐다는 댓글을 남겨주셨다. 더없는 보람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때론 비슷한 고민을 품고 사는 한 인간으로서 나도 그들의 글에 위로받았다. 그 힘으로 계속 썼다. 그렇게 무작정 써내려간 글이 <정신의학신문>과 포털사이트 한 구석에 오르더니 인연과 인연이 쌓여 어느새 책 한 권이 되었다.     


  이 책은, 당신의 마음에 걸어주고픈 너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다. 아끼는 친구가 술자리에서 하소연을 한다면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내 삶에서만 써먹기엔 아까운 이야기, 정신과 문을 두드리기를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이야기, 남모를 슬픔으로 눈물짓는 당신에게 닿았으면 하는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험한 세상을 살아갈 내 아이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모래사장에서 조개껍질을 주워 모으듯 서툰 단어로 모아 엮었다.     


  책의 제목을 두고 장고했는데 쉽사리 정하기 힘들었다. 너무 무겁거나 가벼운, 혹은 지나치게 진중하거나 유치한 제목들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러다 무심코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이 책을 집어든 당신의 마음을 생각해보았다. 삶의 구원을 얻고 싶을까? 완전히 잘못된 마음을 수정하고 싶을까? 그보다는 그냥 오늘만은, 조금 마음이 괜찮아지고 싶은 게 아닐까. 그래서 ‘조금 괜찮아지고 싶을 때’ 다. 삶과 사람 사이에서 하염없이 방황하던, 참 안쓰럽고도 애틋한 그때의 나 역시, 어느 날 갑자기 행복이 충만해지길 바랐던 건 아니다. 그저 조금만 괜찮아지고 그 다음날 또 하루만큼만 괜찮아지고 싶었다. 그때의 내게는 전할 길 없는 이 이야기들이 지금의 당신에게는 닿아 위로와 영감, 격려가 되기를 기도해본다.     


  나를 한 명의 사람으로 키워주시고 정신의학도의 길을 걷게 해주신 스승님들, 언제나 보고 싶은 소중한 벗들, 어느 병원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따뜻한, 선물과도 같은 의국 선후배들, 서툰 글을 세상과 나누는 데 너무도 과분한 도움을 주신 <정신의학신문> 선생님들, 취미로 글을 쓰던 흔한 정신과 의사에게 작가의 꿈을 다시금 선사해주시고 나보다 더 내 글을 깊이 읽으며 다듬어주셨던 푸른숲 이은정 편집장님, 생각만 해도 대견하고 흐뭇한 내 동생, 삶을 주시고 삶이란 살아볼 만한 것임을 손수 보여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그리고...     


  당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언어보다 더 귀하고 감사한, 삶의 마지막을 함께할 아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보다 소중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게 해준 아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이두형               

  책, ‘그냥 좀 괜찮아지고 싶을 때’ 서문                    





  오래도록 준비한 책이 비로소 출간되었습니다.          


  이미 있는 원고를 한해 하고도 반해를 더 다듬어 세상에 내어놓는 마음 속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진심이 담겼기를, 그 진심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닿아 평안과 행복의 씨앗이 되기만을 바라 봅니다.          


  그간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셨던 여러분이 제게 주신 하나의 결실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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