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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Aug 16. 2020

없어서 슬픈 자존감 따윈 없는 게 낫습니다.

내게 자존감 이란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로 해보자. 지당하고 거창한 말인데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걸 몰라서 못할까’ 라는 반감이 든다. 스스로를 무작정 인정하자니 말은 좋은데 그럴 만한 구석이 있으면 더 좋을 것 아니냐는 반감도 든다. 여우가 먹지 못하는 포도를 시다고 폄하하는 것처럼 가지지 못한 것들을 애써 외면하는 일종의 정신승리 같기도 하다.


 (이두형, ‘그냥 좀 괜찮아지고 싶을 때’ 중)




 최근 자존심과 자존감 이라는 주제로 독립서점 독자와의 만남을 다녀왔다. 그간의 통상적인 북토크와는 달리 적은 인원으로, 나의 이야기보다는 독자 분들의 이야기를 주로 들을 수 있도록 소담하게 마련한 자리였다. 


  모임을 여는 말로, 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요즘 통용되는 의미의 자존감을 사실 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제가 함께 생각해보고픈 것이 있어요. 자존감은 꼭 있어야 하는 것 일까요?’


  자존감 이란 단어가 한참 사회에서 회자된 지 오래다. 이 단어가 낯설 때 세상은 이에 대해 열광했다. 쉽게 나를 괜찮다 이야기해주지 않는 세상에서 가혹한 타인의 기준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존중하는 느낌이 있다, 아무리 사회가 나를 괜찮지 않다 이야기 하더라도 스스로를 아껴줄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한다, 이 마음을 손에 넣으면,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삶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 괜찮아 질 것이다, 라는 메시지. 신선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함을 고민한다.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의연한 사람들이 많아지기 보다는, 세상의 기준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함을 가슴아파하는 이들이 늘었다. 자존감이란 관념이 사람들을 위로하기 보다는, 부, 명예, 지위 같은 다른 스펙과 마찬가지로 이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나누고 힘겨운 마음에 ‘난 자존감도 낮아.’ 란 슬픔마저 더하고 있다. 


  생각만으로 삶이 바뀌진 않는다. 나 자신에 대해 무언가 부족하다 느꼈다면, 그렇게 느낀 이유가 있다. 아니야, 괜찮아 라고 자기 부정을 한다고 해서 그 이유가 사라지진 않는다. 진심이 결여된 웃음으로 참아낸 감정은 쌓이고 쌓여 결국 더 큰 물결로 밀려온다. 억지 긍정이 삶의 구원이 되지 못하는 이유다.


  자기고백을 하자면 대학 시절 나는 열등감이 심했다. 의대생이 무슨 배부른 소리냐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열등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집 안에 화장실이 없었던 5평 남짓 단칸방 에 보증금 없이 세 들어 살던 너 댓 살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금 생각해도 부모님이 어떻게 그 집에서 아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부모가 된 입장에서 신기할 따름이다. 그 시절에는 다 그랬다고 하는데, 그 모든 부모들을 존경한다.) 집 주인은 보일러까지 달아줬는데도 마음대로 이사를 하려 한다며 내가 있는 자리에서 어머니에게 호통을 쳤고, (세 들어 산다고 집주인에게 왜 혼나야 하냐고? 나도 모른다.) 어머니는 울며 내 양말을 갈아 신겼다. 어린 내가 처음 느끼고 접한 세상이란 그런 것 이었다.  


  한 달 몇 만원 남짓 급식비 통지서를 보여주는 것이 눈치가 보였던 초등학교 시절도 생각이 난다. 집안에 의료인 한 명이 없어 물어물어 찾아 낸, 먼 친척의 지인 간호사분이 계시다는 중소 병원에서 암으로 투병하던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도 했다. 그러던 내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병원의 원장님, 뉴스에서만 보던 지체 높으신 분들을 부모로 둔 동기들을 만나며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회적 기준에 따라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대학 진학 즈음에는 이미 집안 형편이 많이 괜찮아진 상태였음에도 그 열등감은 진심이었다. 열등감에 객관성은 중요치 않기 때문이다. 나를 힘들게 하던 것, 내가 그토록 원하던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쉽거나, 당연하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다. 마지막 보루처럼 내 학창시절의 알량한 자존심을 버티게 해 주었던 성적도, 전국권 모의고사 등수를 논하는 동기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의 내게, 내 마음에게 누군가가 ‘네가 잘 몰라서 그래. 사실은 너는 있는 그대로 소중한 사람이야.’ 라고 대단한 비밀을 알려 주는 양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하더라도 아마 그 말이 그리 깊이 다가오진 않았을 것이다. 외려 ‘저 사람은 나를 잘 모르는 구나. 지금 내 마음이 어떤 지도 모르고 저렇게 속편한 이야기를 하는 구나.’ 란 맘이 차오르거나, 그렇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의 처지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렇게 몇 해를 보냈다. 그나마 의대 공부도 잘 맞지 않아 휴학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잘난 것도, 내세울 것도, 비빌 언덕도 없는 나,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걸까. 


  그래서 어쩌자는 걸까. 내가 정의하는 자존감은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에 대한 생각을 한다고 해서 없던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시험이 저절로 통과되지도 않고, 헤어진 연인이 돌아오지도 않는다. 늘 어딘가 부족한 듯 느꼈던 과거가 멋지고 따뜻한 순간들로 변모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지 아닌지에 대한 생각에 얼마나 빠져 있는 지와 무관하게 오늘 하루는 시작되고 또 진다. 어차피 내게 허락된 하루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 시간을 그러한 ‘생각들’ 속에 빠져 지낼 지, 지금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며 보낼지는 내 선택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쉬워 보인다거나 부러운 것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단지 생각에 머무르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시간들로 하루를 채우기 시작했다. 시험공부를 조금 더 하고, 돈이 필요할 땐 아르바이트나 과외를 했다. 새로운 운동을 배워보기도 하고,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훌쩍 떠나보기도 했다.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했던 것이 아니다. 해야 해서, 혹은 하고 싶어서 ‘그냥’ 했다.


  그것들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거나, 나를 사랑할만한 멋진 추억을 만들어주었다거나, 좀 더 나은 나로 만들어주었으니 그래야 한다는, 일종의 방법론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원하는 삶을 위한 오늘을 보내며, 비로소 나는 끝이 없는 생각의 고리에서 벗어나 삶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지, 혹은 얼마나 부족한지, 내 삶이 왜 힘들 수밖에 없는 지에 대한 생각들은 마음속에 떠다니는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믿을 만 한지 그렇지 못한 지를 떠나 그 말들은 그 자체로 내 삶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에 젖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시간들’은 내 삶에 영향을 미친다. 내 하루에 영향을 미친 것은 나를 슬프게 하는 생각들이 아니라 그 생각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보낸 나의 행동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일까?’ 생각들은 어떠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을 결코 놓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이 부족하다는 마음을 ‘말로’ 설득하고 생각으로 다독일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도 괜찮아요.’ 라 억지로 그 마음을 무마하려 할수록 오히려 ‘아니 이렇게 힘든데, 삶이 이렇게 엉망인데 뭐가 괜찮다는 거야, 뭐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만하다는 거야.’ 란 반발심이 끓어오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괜찮지 않은 내 마음,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 말로 괜찮게 간주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내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은 내가 정의하는 자존감이 아니다. 그것이 나쁘거나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시도가 그리 효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나를 찾아오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생각들, 그리고 그에 따르는 기분들이 나의 오늘을 정의하게 두지 않는 것.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맞서 이를 설득하고 원치 않는 감정을 억지로 참으며 어떻게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각과 감정이 존재할 수 있다는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을 안고서도 원하는 삶,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다가가기 위한 시간들로 하루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자존감이다. 말과 상관없는 내 삶이 존재함을 느끼는 것, 기쁨과 슬픔이 혼재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 삶이란 이토록 허무한 것이지만, 그 허무한 삶 속에서도 살아보고픈 삶을 떠올려 보는 것. 그리고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안은 채 그에 다가가는 하루를 보내는 것, 그것이 자존감이다.


  좋은 집과 차는 당연히 나쁠 것이 없다. 손에 넣고 싶은 마음이 틀릴 이유도 없다. 타인이 보기에 그럴듯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그러면 ‘자존감이 낮고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그것을 못 가졌더라도 나는 이러이러하니까 그래도 괜찮아.’ 는 자존감이 아니다. 잘 먹히지 않는 자기 위안일 뿐이다. 스스로 자기 위안이 잘 되지 않아 한 번 더 서글퍼지는, 스펙으로서의 자존감 따윈 없는 게 더 낫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걸 가능하게 하는 능력인 자존감이란 스펙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게 부족하구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그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지.’ 란 고민이 버겁다면, 그 시간에 대신 오늘 먹을 점심 메뉴를 고민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나는 어떤 음식을 먹을 때 기쁜 지, 누구를 보고 싶어 하는 지, 어디로 떠나보고 싶어 하는 지. 왜 내 삶은 이렇게 부족하지 란 생각의 동일 연장선상에서 ‘자존감 없음’ 을 고민하는 대신 오늘, 지금, 여기에서 내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를 권하고 싶다.





  북토크 중, 한 분이 말씀을 주셨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고 싶은데 그게 너무 잘 안된다고 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마음이 아팠다. 누가 그를 눈물짓게 했을까.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글로 한 번 더 전하고 싶다. 


  “어떻게 자신을 억지로 좋아할 지를 고민하진 않으셔도 돼요.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억지로 끌어안는 대신,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못하는 그 마음을 안아주세요. 그리고, 원하는 삶으로 다가가는 하루는 어떤 것일까를 고민해 보고, 그런 하루를 ‘그냥’ 살아 보세요.”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은, 지금의 나와 너무 멀어요.’ 나도 그렇다. 늘 그랬고, 어쩌면 지금 떠올리는 그 모습에 죽을 때 까지 단 한 번도 닿지 못할 지도 모른다. 심지어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 살아가고 싶은 삶의 정의조차도 매일같이 바뀐다. 그래도 상관없다. 오늘 떠올리는 그 모습에 하루만큼만 다가갈 수 있다면, 오늘 하루, 지금 여기에서의 삶만큼은 마음에 따스함으로 남는다. 만약 그러한 하루하루가 꾸준히 이어질 수 있다면, 살아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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