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는 정신과 의사 Dec 05. 2020

금주는 쾌락의 소실이라기보다, 너를 안는 과정이었다.



  행복은 즐거움의 총합을 늘려가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공부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고, 일은 줄어들 기미 없이 늘기만 했다. 심지어 연애조차, 특별한 기쁨은 사라지고 결혼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일말의 의무감으로 이어가기도 했다. 그런 나를 위로 했던 것은 한 잔의 술이었다. 기름진 안주와 소주가 넘어갈 때의 짜릿함, 왁지지껄 오고가는 이야기들... 어떻게든 살아가면서, 살아남으면서 이런 즐거움을 최대한 모으는 것이 행복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갔다.

  학부 때부터 음주와 가무에 능숙했던 소위 ‘인싸’ 였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술자리에 가면 말이 없는 건 아닌데 재밌지는 않은, 친구가 많은 건 아닌데 친한 몇 과는 어울려 피씨방을 가거나 하는, 어쩌면 가장 흔할 학생 군이었다. 그나마 농구, 격투기 같은 운동을 즐겼는데, 운동하고 맥주 한 잔으로 땀을 씻는 상쾌함은 참 좋아했지만 그 이상으로 술을 마시진 않았다.

  나를 술 깨나 마시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은 일이었다. 24시간 대기 상태로 하루 종일 선배 의사들의 오더에 따라 허드렛일을 반복하던 인턴 시절과, 100일 연속 당직을 시작으로 년 300일 이상의 당직, 빨간 날은 모두 당직, 당직이 아닐 때는 저녁과 밤을 오고가는 시간에 퇴근, 출근하지 않을 수 있는 날은 하루도 없는(지금은 전공의 특별법으로 위와 같은 근무 운영이 금지되었다.) 레지던트 생활, 잠깐 내게 허락되는 밤, 혹은 새벽 시간 동안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같은 처지의 인턴, 레지던트 동기들과 어울려 잔을 기울일 따름이었다.

  알콜은 그 자체로 쾌락 중추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고양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큰 장점이 있다. 그것은 불안을 진정시키는 효과이다. 이전에 비해 알콜에 빠져드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 혹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불안이 피어나고 있진 않은 지 돌아보길 바란다. 미숙한 일처리로 혼이 날 때, 환자와 보호자의 날선 이야기에 상처를 받을 때,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 지 회한이 들 때. 그 외에도 수많은 그럴 때마다의 불안을 술은 쉽게 지워줬다. 하루가 복잡하고 버거울수록 그 마무리의 술 생각만 났다. 비겁한 변명이지만 내게 술을 따랐던 건 내 손이 아니라 세상이었다.

  소주를 기울이며 늘 외치던 말이 "인생 뭐 없다." 였다. 알콜이 들어와 하루 종일 팽팽하던 마음속 긴장의 끈을 늦추고, 다음날 기억나지도 않을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떠들며 한바탕 웃어버리는 것, 그런 순간들을 모으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 생각했다.

  즐거움은 익숙해진다. 인간의 비극은, 첫 맛은 그토록 황홀한 치킨 한 입이 불과 몇 조각만에 질려버린다는 데서 기인하는 지도 모른다. 어떤 음식도, 풍경도, 사람도 무한한 즐거움을 주진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산한 공허함이 스몄다. 그 공허함이 싫어 공연히 분위기가 이미 저문 술자리를 질질 끌기도 했다. 집에 가기 위해선 지하철 종점 역에서 내려 15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번화가에서 종점까지 오는 길에는 텅 빈 지하철에서 늘 소금에 절여진 배추처럼 깊이 잠이 들었다. 30분 이상을 숙면을 취하면 조금 술이 깬다. 병원을 나설 때보다 한참 추워져 있는 밤공기를 맞으며 걷다 보면 더욱 정신이 맑아진다.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공허함은 선명해졌다.


  그렇게나 자리를 가득 메우던 즐거움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정이 넘은 어둠을 몰아내기에 가로등 불빛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술자리의 짧은 즐거움은 그 가로등 불빛 같았다. '왜 사는 걸까.' 란 짙은 어둠을 몰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지하철 계단을 걷다 보면 숨이 가빠졌고, 일과 웃음에 지친 팔다리를 옮기는 것은 버거웠다. 씻을 힘도 없이 눕고만 싶은데 집으로 가는 길은 끝이 없었다. 거친 숨에서 배어나오는 술기운이 싫었다.

  그렇게 숙취에 시달리며 다음부턴 차라리 퇴근을 하면 그냥 집에 가서 책이나 한 권 읽자 다짐을 해도 해가 넘어가고, 마음에 피로와 초조가 쌓이면 어김없이 술을 찾게 되었다. 거나하게 취해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우면 허겁지겁 잠들기에 바쁘고, 힘든 마음은 쌓이기만 하고, 그렇게 또 술자리를 찾게 되었다. 즐거운 술자리와 지독한 귀갓길을 반복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얼마간의 즐거움을 위해 하루 종일 치의 고통을 견디는 것이 인생인가. 인생의 행복은 왜 이렇게 수지가 맞지 않는 것인가.

  그러던 내가 술을 끊었다. 시작은 주사였다. 결혼 2주 후에 입대한 기구한 운명으로 우리 부부는 아는 이 하나 없는 시골 살이를 시작했다. 술 한 잔 하려면 40여분은 차로 나가야 했고, 그나마도 돌아올 길이 막막한 그런 곳이었다. 아내는 어떤 멋진 이유로 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맥주 500ml 라도 마셨다간 구토를 하는, 정말 술을 받아내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자연스레 술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그러던 내가 군 복무 말미에 도시로 돌아왔다. 그간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 은사님들, 그리고 술자리.. 몸은 청정한 생활을 즐기다 갑작스레 다시 만난 알콜의 독기를 이기지 못했다. 총각 때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블랙-아웃, 완전한 필름의 소실을 경험했다.

  늦은 밤 아이를 깨우고, 고성방가를 지르고... 그래도 별 일 없이 집에 돌아왔고, 용인할 수준의 주사였으므로 아내는 크게 개의치 않았으나, 나는 필름이 사라졌다는 그 사실에 두려웠다. 극단적으로 우리 가정의 가계는 나의 건강 없이는 흘러가지 않는 상태이며, 요즘 신혼부부들이라면 모두 마찬가지지만 주거를 위한 상당한 수준의 부채가 존재하는 상태다. 만약 내가 의식을 상실한 상태에서 불의의 사고라도 당한다면? 조금은 예민한 수준의 그 불안에 아이의 얼굴이 겹쳤다. 술을 끊자. 태어나서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시도를 결혼하고 시작했다.

  나는, 이 버거운 삶 속에서 직장을 끝나고 동료들과 기울이는 치쌩맥 한 잔의 즐거움조차 없어지는 무미건조한 삶, 돈 벌어다 주는 삶, ‘너는 절대 하지마라, 하지 말라면 하지 마!’의 그 결혼 생활을 시작한 것일까? 제철 방어회의 기름진 감칠맛을 소주로 씻어내지 못하고 잔에 사이다만 따를 때는 격한 아쉬움이 밀려오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 금주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쾌락을 포기한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아이를 껴안고 잘 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하루를 땀에 흠뻑 젖어 보낸 정수리 냄새와 촉촉한 등, 엉덩이를 내 배에 뒹굴며 부빌 때의 무게감과 따뜻함, 손가락을 올려두면 꼭 쥐는 고사리 손. 알콜과 안주의 기름기가 오고가는 숨을 내쉬며 아이를 안을 수는 없다. 나는 쾌락을 포기 했다기 보다, 술을 마시는 즐거움과 아이를 안고 잠드는 행복이라는 여러 좋은 것들을 두고 어떤 것을 택할 지 고민한 것이었다.

 둘을 비교하자면 찰나의 취기가 주는 즐거움으로 사라지는 음주에 비해 금주는 끝나지 않는 가치의 추구로 이어진다. 술잔을 맞부딪치는 즐거움은 길어도 세 시간이다.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는 늘 즐겁게 또 기꺼이 노력하고 다가갈 수만 있을 뿐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둘을 모두 가져갈 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구태여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후자를 택하겠다. 후자를 택한다는 것은, 전자에 대해 포기할 많은 것들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엄하고 불편하기로 악명 높은 의대의 도제식 수직적 관계에서 하늘같은 교수님과 선배의 권주에 ‘아, 저 술 끊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하고, 심지어 그로 말미암은 사회적 기회까지도 기꺼이 내려놓음을 의미한다. 포기에 따르는 불편함이란, 의외로 내려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주어진다.

  그런데 참 오묘한 것이 삶이구나 생각이 든 것이, 의외로 금주를 시작하며 걱정했던 ‘나쁜 일’ 들은 그다지 일어나지 않았다. 술을 먹지 않는다 힐난하는 이들은 애초에 함께 만취를 해도 불편한 이들 뿐이었다. 자리를 함께 하자 늘 나를 반기는 이들은 고작 건배를 하고 그 잔을 비우는 지 그렇지 않은 지로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처럼 함께 말술을 들이붓는 즐거움을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핀잔으로 표현할 뿐이었다. 그런 불평을 들으며 오히려 그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더 깊이 느꼈다. 그들은 술에, 나는 대화와 분위기에 취해간다. 나는 내게 가장 편안한 방식으로 술자리를 즐기게 되었다.

  혹여나 금주를 이어가기 위해 이를 위해 때로 겪어야 할지도 모르는 것들, 이를 테면 다른 사람들의 오해라든지, 아부의 실패라든지, 거나하게 취한 짜릿함의 상실 같은 그에 따르는 책임, 혹은 단점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삶은 원하는 소중함을 위해 늘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단지 여러 형태의 하루, 여러 방법의 시간 중 가장 내가 원하는 삶과 유사한 길을 택하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금주는 내게 집에 돌아가 아이를 안으러 가는 과정이고, 이것은 지금의 내게 무엇보다 소중하다. 이래야 하는 것, 저래야 하는 것, 이것은 정답이고 이것은 오답인 것,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것, 그런 것은 없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선택지가 있고, 그 선택지 마다 '내게'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이 있으며, 나는 내게 가장 좋은 것을 택할 뿐이다. 잔을 비우지 않는 이들에게 아부를 하지 못하고, 그들로부터 주어지는 사회적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은 포기한 무엇이 아니라 ‘애초에 나의 것이 아니었던’ 것들이다. 내가 살아가고픈 삶에 그러한 장면이 깃들지 않을 뿐, 마치 한 때 그것들을 손에 쥐었다 잃은 슬픔을 느낄 필요는 없다.

  오늘도 나는 술잔에 사이다를 채울 술자리에 간다. 금주 중인 이들이라면 공감할 지도 모르겠는데 이제는 사이다 잔만 기울여도 정말로 취한 듯한 느낌이 든다 (진짜다!). '이 xx, 내 잔만 안 받는 거지 xx야!' 처음에는 진지하게 섭섭해 하다 이제는 웃음을 머금은 채 사이다를 따라주는 형님과 어울리다 집에 들어선다. 술 냄새가 나지 않는 취기로 잠든 아이 곁에 살포시 스며든다. 마지막 분유냄새를 맡으며 잠드는 행복을 느낀다. 금주의 아쉬움을 따로 느낄 새가 없는 시간들이다.




함께 읽기를 권해드리는 글)


https://m.blog.naver.com/dhmd0913/221359638879


https://m.blog.naver.com/dhmd0913/221541469504


(사진 출처: pixabay.com)

매거진의 이전글 죽고 싶은 생각보다 더 신경쓰이는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