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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Dec 17. 2020

넌 박살낼 줄만 알지, 뭘 만들어내진 못하잖아.

마음속 니힐리즘에게.



배리 (주인공을 때리고 괴롭히는 악동): “밴드는 잘 돼 가냐? 이름이 뭐라고? 게이들?”
코너 (주인공): “너야 말로 오스카 와일드 같다.”
배리: “언젠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코너: “너 같은 건 내 안중에도 없어. 너랑 나는 사는 세상이 달라. 넌 내 노래의 소재일 뿐이지.”
배리: “다음에 뱉을 말은 조심하는 게 좋아. 나한테 또 처 맞기 싫으면.”

코너: “(때릴 테면 또 때리란 듯,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넌 박살낼 줄만 알지. 뭘 만들어내진 못하잖아.”



 


 ‘비긴 어게인’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존 카니의 또 다른 명작 ‘싱 스트리트’ 의 한 장면. 몇 번을 돌려 보았을까.

  주인공인 코너의 부모는 코너가 태어나기 훨씬 전 부터 다퉈왔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코너의 가족은 살던 동네를 정리하고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신부가 거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성당학교로 전학을 온다. 낯선 학교에서 처음 말을 걸어온 친구인 배리는 코너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 옷을 벗기고 춤을 추라 강요하며, 이에 응하지 않는 코너를 구타한다. 엄마는 이미 직장 동료와 불륜이 깊어진 상태. 부모는 이혼을 할 테니 앞으로 누구와 어떻게 살아갈 지를 결정하라 한다.

  이런 삶 속에서 코너는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밴드를 만든다. 밴드를 시작하게 된 것은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밴드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락스타와는 어울리지 않는 지질한 이유로 시작한 음악에 코너는 점점 빠져든다. 늦은 밤 방문을 닫고 락을 틀어도 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부모의 싸움 소리가 버거울 때면 코너는 키보드를 연주하는 친구의 집을 찾는다. “음악 만들래?” “지금 이 시간에?” “응.” “그래 뭐 좋지. 들어와.” 부모의 이혼과 파산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선생과 학우의 폭력으로부터 도피하고, 좋아하는 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단이었던 음악이 점점 인생의 목적이 되어간다. 밴드 활동을 위해 화장을 하고 등교한 코너는 신부로부터 체벌을 당하고 게이라 놀림 받는 과정도 기꺼이 감수한다.

  너무 동화 같은가? 오히려 나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삶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비일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음악을 취미로, 영어공부로, 이직 준비로, 짝사랑이나 연애로, 육아로 바꾸면 영화의 장면들은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된다.

  한 없이 사랑과 포용만으로 우리를 안아주기에는 우리의 부모들은 대개 가난하고 예민했다. 원래 집에 돈이 많거나 부모의 인성이 특별히 훌륭한 것이 아니라면, 아이를 처음 낳아 키우는 부모란 대개 경제적으로 쪼들리며 해야 할 것들이 많아 심적으로도 예민하고 피곤할 만한 나이다. 교과서에서, 공익광고에서 보편적인 가족이라 보여주는 웃음이 넘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격려해주는 가족의 모습은 드문 이상향이다. 외려 가족이라서 더 예민하고 신랄하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삼삼오오 방과 후에도 스터디 그룹을 이루어 다닌다는 좋은 학군지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아이들은 한정되어 있다. 적어도 내가 다녔던 학교는 힘의 논리가 날 것 그대로 적용되는 정글이었다. 싸움 실력, 인기, 선배들과의 친분 등을 미루어 아주 세세하게 서열이 나누어져 있었고, 암묵적으로 서열이 높은 친구 앞에서 ‘눈을 까는 것’으로 그 체제에 순응하고 있음을 표시해야 했다. 많은 이들에게 학교는 사회성을 배우고 편안하게 친구를 사귀는 공간이 아니라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혐오의 공간이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성인이 되었더라도 세상은 정말 만만치 않다. 일을 구하는 것 자체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나 마찬가지인데, 겨우 그 구멍을 통과해 받아든 첫 월급으로는 밥 먹고 사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 월급을 받기 위해 우리는 온갖 불합리한 지시와 인간적인 모욕을 감수해야 한다. 좋은 가정, 안정적인 성장과정, 활기찬 학교생활, 안정적인 미래의 완벽한 삶을 꾸려가며 긍정에 가득 찬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보다는 원하는 바가 좌절되거나,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더 많은 것이 삶이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속에 ‘배리’가 찾아온다. 바로 염세주의다. 그런 삶 속에서라도 힘을 내 하루를 살아보려는 우리,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리고 시도하려는 우리의 발걸음을 사사건건 걸고 넘어 진다. ‘네 주제에 그런 걸 한다고?’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인생은 별거 없는 거야. 굶어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차라리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마음으로 시도를 해 볼 수 있겠지만, 좌절의 경험들이 늪처럼 나의 발목을 잡아챈다. 그런 걸해서 뭐해, 어차피 삶은 마음대로 안 되는 거야,

  염세주의는 받아들이기에 낙관주의보다 더 거부감이 적은 논리다. 앞으로 마냥 잘 될 거야, 라는 논리에 대한 반론을 대는 것은 너무도 쉽고, 삶은 두렵고 버거운 것, 고통의 연속이다, 라는 논리에 부합하는 삶의 순간을 떠올리는 것 역시 아무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쉽다.

  그래서 서두의 영화장면이 너무도 감명 깊었다. 그래도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나 역시 내 마음속 배리에게 한 마디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 단지 고통의 연속일 뿐이라는 그 정교한 냉소의 논리에 대해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던 터였다.  영화를 본 이후로 마음이 나의 하루를 비웃으려 할 때 마다 이야기한다. ‘니힐리즘아, 넌 박살낼 줄만 알지, 뭘 만들어 내진 못하잖아.’

  마음속으로 스스로의 냉소를 다독이는 이 한마디는 어떤 논리나 관점이 더 사실에 부합하고 현실과 일치하느냐를 따지려는 의도가 아니다. 단지 내 삶을 어떻게 정의하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이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코너를 구타하던 배리의 아빠는 마약 중독자였다. 배리의 엄마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아빠는 일상적으로 배리를 구타한다. 그런 삶에서, 두려운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구타할 수 없는 배리가 택한 삶의 방식은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박살내는 것이었다. 배리와 코너는 어쩌면 같은 삶의 피해자이기에, 아빠에게 구타당하는 배리를 목격한 코너는 그가 왜 그렇게 살아가는 지를 이해했다.

  하지만 코너는 배리와 같은 방식의 삶을 택하진 않는다. 비록 그리 숭고하거나 멋진 동기는 아니었지만 그는 음악을 하기로 했다. 스스로의 아픔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이를 타인에게 전가하지도 않고,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코너가 택한 방식이었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 삶인지, 마음인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아픔의 독기를 되새기는 하루 보다는 아픔으로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으며 살아가는 하루가 더 좋을 뿐이고, 한 번 뿐인 삶이라면 그렇게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내게도 과거의 상처와 좌절의 기억들이 있다. 그것들은 마음속에 배리의 목소리로 남아, ‘그딴 글을 써도 그래 봤자 세상이 뭐가 달라지겠어, 네 인생에 무슨 대단한 변화가 생기겠어, 원래 삶은 힘든 거야.’ 라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마음이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를 이해하지만, 그럴 때 마다 이 장면을 떠올린다. 냉소할 만한 것이 삶이라고 해도, 이런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고 해도 나는 그래도 살아갈 만한, 살아볼 만한 것이 삶임을 계속 쓸 것이다. 늘 부부싸움의 소리에 시달리면서도 그런 부모들 또한 한 명의 인간일 뿐임을 곡으로 쓰던, 늘 구타에 시달리면서도 넌 박살낼 줄만 알지 라 이야기하며 자신의 음악에 몰두하던 코너의 하루들처럼.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려 보고 익숙하지 않은 꿈을 시도해 보는 것이 꼭 현실의 고단함을 애써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어차피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을 이미 충분히 하고 있다. 단지 아이가 잠든 이후, 밥을 다 먹고 조금 남은 점심시간, 가족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주말 아침 같은 귀한 시간들에 어떤 생각을 할 지, 그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 지에 대한 이야기다. 하루의 십분, 삼십분이라도 한 번 뿐인 삶이라면 하고 싶은 일을 해 보며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밥벌이와 하등 상관없는 그런 시간낭비를 왜 하고 있냐는 마음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나는 쓸 것이다. 어차피 삶은 아무것도 아니고 단지 버거움일 뿐인데 게이 같은 그 짓을 왜 하냐 냉소하는 배리보다는, 그 버거움에 대한 음악을 만들어 내는 코너의 삶을 살고 싶기 때문에.

  실제로 삶이 아무 것이냐, 아무것도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내가 삶을 무엇이라 정의하는 지, 그에 따라 어떤 하루를 보내는 지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니힐리즘을 냉소한다. 그리고 쓴다.







https://youtu.be/Z0q2zJZyg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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