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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Jan 04. 2021

과거의 아픔으로 죽고만 싶을 땐, 그냥 써 보세요.

쓰기 노출 치료와, 기억의 통합이 주는 평온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이하 PTSD) 는, 이제는 인터넷 밈으로도 사용될 정도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인지도에 비해 실제 임상 진료현장에서는 치료하기 매우 까다로운 질환이다. 물론 환자에 따라, 겪은 트라우마의 종류와 강도에 따라 경과는 천차만별이고 치료 끝에 증상이 잘 호전되어 편안한 일상을 이어가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오랜 시간 면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하여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고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한 PTSD 치료의 최신 지견으로 ‘쓰기’가 도입되어 치료계에 이슈다. 슬로안 Denise M. Sloan, 막스 Brian P. Marx 등에 의해 제안된 ‘쓰기 노출 치료’ (Written Exposure Therapy, 이하 WET)은 지금까지 도입된 어떠한 치료보다도 간결한 치료 구조와 짧은 치료 회기를 통해 외상을 치유하도록 고안되었다. 치료는 약 10분간의 치료자와의 면담, 그리고 30여분 동안 내담자가 홀로 자신의 외상적 경험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글로 쓰는 시간으로 구성된 5차례의 회기로 구성된다.
 
  다른 치료 방법에 비해 깊고 자세한 면담도, 오랜 치료 기간과 회기도, 숙제도 요구 하지 않는 이러한 ‘쓰는 치료’ 가 효과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다.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미 효과가 입증된 방법들에 비해서도 그에 못지않게 매우 효과적이며, 치료 중도 탈락률 (drop out) 이 유의미하게 적다는 특징도 있다. 그냥 겪었던 아픔을 다시 쓸 뿐인데,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치유하는 걸까?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외상적 경험이 우리를 어떻게 힘들게 하는 지를 이해하면 그 비밀을 알게 된다.
 
  당신에게도 잊혀 지지 않는 아픔의 기억,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경험이 있는지. 외상적 경험이란 주관적인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얼핏 별 것 아닌 것 같은 일들도 나에게는 심각하고 뼈아픈 경험일 수도 있고, 어떻게 그런 경험을 겪고서도 잘 살아가시나요? 라 다른 이들이 반문할 만큼 힘든 일을 겪고서도 편안한 하루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   
 
  친구와 주먹다짐을 나누며 다투거나, 길을 가다 넘어져 무릎이 깨졌던 정도의 경험은 마음속에 외상으로 남지 않는다. 평소에 잘 떠오르지도 않고 어느 날 문득 그 기억이 떠올라도 일상에 지장을 줄 만한 불안이나 혐오감을 유발하지 않는다. 이미 그 일들은 ‘과거에 일어난 것’ 이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을 뇌에서 충분히 인지하였기 때문이다. 즉, 마음이 그 일을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고 과거에 일어났던 일로 마음속 기억의 회로에 그 사건을 통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홀로 생존할 수 없던 어린 시절에 겪었던 방임, 폭언, 구타와 같은 학대, 오랜 시간 동안 노골적으로, 때론 교묘하게 또래 집단으로부터 소외되었던 따돌림,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거나 동승자가 사망한 교통사고와 같이 죽음의 공포에 상응하는 상처에 대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 일은 과거에 있었던 것’ 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적용시키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불안과 혐오를 현재에서 재생산해 동일한 상황을 회피시킴으로써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다.
 
  따돌림으로 고통 받은 마음은 낯선 사람을 보기만 해도 예전의 아픔과 두려움을 고스란히 가져온다. 끔찍한 자동차 사고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은 차를 타는 상상만 해도 정신을 잃을 듯 어지러워지고 숨이 가빠진다. 학대의 피해자는 가만히 있어도 갑자기,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격렬한 두려움이 떠올라 아무것도 못한 채 떨리는 몸을 부여잡고 울기만 할 수도 있다.


  PTSD의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지극히 현재에 존재한다. 과거로 기억회로에 통합되지 못하는 상처들이 지나간 아픔을 오늘, 지금 여기에서 재생산한다. 끝없는 고통의 당사자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회피뿐이다. 두려움을 유발하고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만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탈 것, 사람, 심지어 삶 자체로부터 도망치고만 싶은 마음이 외상의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마음이다.
 
  예전에 일어난 일들은 그 자체로는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지 못한다. 그것들이 우리를, 끔찍한 과거로 속박하는 방법은 지금의 나를 위협하여 우리의 오늘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공항으로 오랫동안 유학을 다녀온 자식을 마중가고 싶지만 차를 탈 수 없는 부모,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직장을 다니고 싶지만 왕따를 당했던 아픔이 자꾸만 떠올라 집을 나설 수 없는 취업 준비생, 연애를 하고 싶지만 관계가 깊어지면 학대를 당했을 때의 아픔이 떠올라 그가 떠날 까 두려워 먼저 관계를 정리해 버리는 20대. 또 그런 일이 일어날 거야, 저 사람은 나를 그토록 괴롭혔던 그런 사람들과 비슷할 지도 몰라, 그렇게 과거의 아픔이 불러내는 두려움이 오늘의 현실을 뒤틀고, 그 아픔은 다시금 오늘이 되어 내일의 나를 괴롭힌다.
 
  WET에서의 쓰기는 과거를 과거 롭게 한다. 단, 그 글쓰기의 방식에서 다른 쓰기들과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아픔을 글쓰기로 달래는 이들이 흔히 선택하는 방법인 그 일들에 대해 지금의 내가 돌아보고 재생산한 내용들을 쓰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힘들었던 경험 그 자체’ 를 현재 시제로, 그 때로 돌아가 지금 경험하듯 쓴다. 그 때 어떻게 힘들었는지, 주위의 풍경은 어땠는지, 느꼈던 생각이나 감정은 어떤 것이었는지, 심지어 주위의 온도는 어땠고 냄새는 어땠는지를 최대한 자세하게 쓴다. 그것이 전부다.
 
  그것을 쓰려고 시도하는 자체에서 역겨움과 구역질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그런 감정을 고스란히 안고서, 당장이라도 펜을 던져버리고 싶은 분노까지도 끌어안은 채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그 때를 최대한 세밀히 묘사해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기억은 그것을 현재의 현실이 아닌 과거의 경험으로 천천히 통합해나가기 시작한다.
 
  외상을 바탕으로 한 두려움 때문에 현재의 행동을 결정할 때, 즉 차를 탈 수 없어 걷고 사람이 두려워 대인관계를 회피할 때 그 외상적 기억은 ‘현재 일어나는 일’ 이 된다. 이성은 당연히 트라우마가 과거에 일어난 일임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생리적으로 보자면 차 사고를 오늘 한 번 더 당하는 것, 따돌림이나 학대를 지금도 받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이다.


  그에 반해 쓴다는 것은 지금 여기, 조용한 면담실 에서 홀로 ‘현재의 내가 과거의 일을 복기하는’ 과정이다. 예전의 일을 떠올리는 일과 글의 내용이 통합이 되어, 이 기억들은 지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다는 것이 비로소 내면 깊이 새겨진다. 쓰면 쓸수록 그에 상응하는 감정적 반응, 생리적 반응도 줄어간다. 현실은 격렬한 글 속 환경이 아니라, 나를 위협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고요하고 평온한 면담실임을 마음이 자각해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토록 선명하고 현재적이었던 기억들은 마음속 과거의 앨범으로 통합된다.
 
  면담할 때 마다 환자분들과 늘 타임머신이 있다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한다. ‘선생님 말씀이 맞지만, 그냥 그런 일이 없었다면 가장 좋았잖아요.’ 라는 환자분들의 말은 백 번 맞는 이야기다. 단지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을 뿐이고, 그 현실을 받아들인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다. 마법처럼 오래된 기억을 지우는 길과 비교했을 때 우리에게 허락된 평온으로 향하는 길은 더디고 불편하며 불친절하지만, 막다른 길은 아니다. 오래전 일은 지금 일어나는 중이 아니라 오래 전에 일어났었던 것이라는, 말장난 같이 당연한 사실을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PTSD의 핵심이다. 그 사실이 마음속에 진심으로 자리 잡을 때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기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은 사실 많은 것을 원한다. ‘다시는 사람을 믿지 않겠어.’ 라는 말 속에는 깊이 마음을 터 놓고 지낼 수 있는 관계에 대한 열망이 숨어 있다. ‘이제는 죽을 때 까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라는 말은, 사랑의 아픔이 이토록 힘들 줄 미처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러한 상처 없이 언제까지나 서로를 아껴줄 사랑을 만나고 싶다는 의미이다. 과거의 아픔은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이, 현재에서 지속되는 과거의 것임을 마음깊이 인식할 때 우리는 과거가 만들어내는 오늘, 과거에 사로잡힌 지금이 아닌 그냥 오늘, 지금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과거의 흔적을 두려워하느라 내가 원하는 것들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수 있다. 쓰기는 그렇게 오래된 것들을 오래전의 것들로 자각해 가는 훌륭한 동반자다.
 
  당신이 원하는 오늘, 당신이 원하는 관계, 당신이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데 과거의 상처가 자꾸만 떠올라 가슴이 터질 듯 뛰고 숨이 막힐 것만 같은 두려움이 밀려온다면, 그 두려움으로 인해 평온과 기쁨의 가능성을 회피할 수밖에 없어서 힘들다면 떠올리고 싶지 않아 몸서리 쳐지는 그 기억에 대해 담담히 써 보자. 아픔을 현재의 관점으로 굳이 긍정적으로 재해석하거나, 나는 앞으로도 이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비관하거나, 왜 인생이란 우리의 마음이란 이다지도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체념하는 글이 아니라 그냥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과정을 지나는 나의 마음은 어떠했는지를 있는 그대로 적는 글을.글로 옮기는 만큼 과거는 더욱 과거다워지고, 과거로부터 비롯된 현재는 줄어든다.
 
  아름다운 추억만 앨범에 남겨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스럽고 힘든 기억일수록 ‘지나간 경험’ 이라는 앨범 속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어린 시절 귀신이 떠올라 무서운 마음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꼭 감으면, 한정이 없는 상상 속 나래가 펼쳐지며 두려움이 증폭된 경험이 있는지. 마찬가지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 떠올리고 싶지 않아 라 외면할수록 아픈 기억들은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 생생한 감정과 생각들이 오늘의 무언가를 회피하게 할수록 과거의 상처는 현재에 생생하게 재생된다.
 
  아픔의 기억으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리고만 싶다면, 오히려 용기를 내어 그 기억을 자세히 써 보자. 주위에 누가, 무엇이 있었는지, 기온과 습도는 어땠고 어떤 냄새와 촉각을 느꼈는지, 얼마나 두려웠고 무엇이 힘들었는지를 세밀하게 써 보자. 그것을 쓰며 그 일이 ‘지금, 여기’ 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일이 아니라 ‘그 때, 거기’ 에서 일어나는 과거의 일임을 마음에게 이해시켜주는 시간을 가져 보자. 쓰는 과정에서 되살아나는 아픔, 공포, 초조함, 눈물까지도 지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더 이상 그러한 것들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오래된 것임을 자각해 보자. 그리고 그와는 다른 현재 속에서 쓰고 있는 것이 나 자신임을 충분히 느껴 보자.


  지난 시간을 바꿀 순 없지만, 늘 마음속에서 도드라져 있던 ‘그 때’의 기억이 다른 과거들과 다르지 않게 바래 져 갈 때의 평온함을 당신이 느낄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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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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