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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Jan 11. 2021

마음 속 긍정이와 부정이, 그리고 무던이

삶을 비관하는 것이 매력적인 오답인 이유



  내 마음속에는 ‘긍정이’ 와 ‘부정이’, 그리고 ‘무던이’ 가 산다. 긍정이와 부정이는 살면서 경험하는 일들, 만나는 사람들, 앞으로 꿈꾸는 것들에 대해 그것이 좋은 지 나쁜지, 하면 되는 지 안 되는지, 앞으로 잘 될 지 그렇지 않을 지에 대해 서로 갑론을박을 펼친다. 무던이는 말  없이 그 논쟁을 지켜보고 있다.

  말로 하는 논쟁으로는 긍정이가 부정이를 당해낼 수 없다. 작게는 예전의 힘들었던 경험, 신용대출 제한과 금리 상승 소식, 월세와 관리비, 카드 값 부터 크게는 미래 한국의 인구구조 변화, 거시적 경제위기 가능성 까지 온갖 고지서와 분석, 통계 수치를 아우르며 전 방위적인 논리를 펼쳐내는 데에 당해낼 재간이 없다. 무던이는 이에 대해 별 말이 없고, 긍정이는 그래도 잘 되지 않을까, 좋은 방향으로 살아가려 노력중이니 좋은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라는 그다지 논리 없는 이야기들만을 펼친다. 객관성과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

  무던이는 그들 옆에 비껴 서서, 그 둘이 하는 이야기들과 그에 따르는 감정들까지도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한 쪽의 손을 들어주면 그들의 주인인 나는 그 결론에 따라 행동을 옮긴다. 논리만으로 따졌을 때는 늘 부정이가 하는 이야기에 손을 들어주어야 맞겠지만, 무던이는 제한적인 특수한 상황, 즉 법에 어긋나거나, 가족이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신체적인 위협이 상당한 일이 아니라면 대개 긍정이의 손을 들어준다.

  부정이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왜 그 일을 시작하면 안 되는지, 왜 열심히 사는 것이 의미가 없는지, 너무도 논리 정연하고 근거가 가득한 생각들을 이야기하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속 심판자인 무던이, 그리고 마음의 주인인 나는 부정이가 하자는 바를 잘 따르지 않으니 말이다.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코로나가 소강 국면이던 가을의 어느 날 전남 영광 공공도서관의 초청 받아 북토크를 다녀왔다. 담당하시는 분과 커뮤니케이션에서 다소 실수가 있어서 강연 전 주 까지 강연 여부를 확정하지 못했었다. 내일로 여행이나 학회 참석차 남원이나 전주 등지를 다녀온 적은 있으나 자차로 그보다 더 먼 곳을 다녀오기는 처음이었다. 강연 시간이 오전 10시라 겸사겸사 휴가를 써서 여행 겸 다녀오려 계획을 짰는데 돌쟁이 아이를 데리고 갈만한 숙소들이 모두 만실이었다. 가족 여행은 포기하고 혼자 당일치기로 다녀오려니 하루 안에 편도 4시간 반, 왕복 9시간이 소요되는 일정이 되었다. 일정이 확정되기 전 담당자분과 통화했을 때 모객에 어려움이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주말 하루를 아이를 전담하게 된 아내에게도 미안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정인지 의문이다. 조정하거나 진행이 어렵지 않을 지 문의해 보자.’ 라고, 앞서의 세세하고 객관적인 이유들을 들며 부정이가 불평을 시작했다. 긍정이와 무던이는 ‘그래도 나를 찾아 주시는 분들이 얼마나 감사하니, 안 가본 도시라 가면 즐겁고 좋은 일이 있을 지도 몰라.’ 라고 두루뭉술한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도 나는 일단 가보자! 라 결정했고, 부정이의 볼멘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혹여나 늦을까 새벽 4시 반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 일어날 수 있을까 란 걱정에 잠이 잘 들지 않았다. 결국 한 숨도 자지 못해 일단 출발했다가 잠 오면 휴게소에서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정에 집을 나섰다. 약 두 시간 가량을 달려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 부근 즈음 잠이 쏟아졌다. 이런 컨디션으로 무슨 강연이야, 오시는 분들도 안 계시다는데 그 앞에서 나마도 횡설수설하기 딱 알맞겠네, 부정이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불만은 절정에 달했다.

  우여곡절 끝에 영광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앞 차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안개가 자욱한 도로를 지났다. 시속 30km 로 서행했는데, 다른 차들도 으레 그렇게 한다는 듯 재촉하는 경우가 없었다. 몽롱한 새벽 시간을 그렇게 지나자니 마치 꿈속을 운전하는 느낌이었다. 새벽 어스름이 걷힐 무렵의 주변 경관은 언덕, 강, 과하게 우거지지 않은 나무들 따위가 한적하고 수려했다. 좋아하는 느낌의 풍경이었다.

  이미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도착한 도서관 입구에서 담당자 선생님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내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인쇄된 현수막이 나를 반기는 것을 보며 민망한 뿌듯함을 느꼈다. 강연장은 당시 거리두기 지침이 수용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인원들을 채운 상태였다. 강연도 강연이었지만 깊은 이야기가 오고갔던 문답 시간이 인상적이었다. 본디 나는 강연 시간보다, 서로의 마음을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질문답변 시간을 더 좋아하던 터였다. 삶이 담긴 이야기가 오고가는 고양감 속에 피로는 온데 간데 없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선 부지런히 이동해야 했던 터라 아쉽지만 식사를 권해주시는 도서관 선생님들의 감사한 말씀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영광까지 왔는데, 조금은 늦더라도 굴비는 사 가야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쭤보니 꼭 도서관 소개로 왔다는 이야기를 하라는 말씀을 덧붙여 한 가게를 소개해 주셨다. 굴비로, 라는 길에 들어서니 탁 트인 부둣가 풍경이 상쾌했다. 커다란 굴비 조형물이 있어서 차를 잠깐 세우고 사진을 찍고, 생선살과 부산물을 주워 먹으려 잔뜩 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새들의 장관을 감상했다.

  소개받은 가게에 들러 굴비를 구경하는데, 이렇게나 다양한 상품이 있을 줄 미처 몰랐다. 수십 마리짜리 두름은 부담이 되어 마리당 8000원 씩 하는 큼지막한 굴비를 한 세 마리 정도 담다가 우리 집과 처가, 동생네 생각이 났다. 일 년에 몇 번 전화도 잘 안하는 불효자가 내는 생색이란 겨우 이런 것이다. 치킨 몇 마리 값 치 굴비를 주소를 적어 택배를 보내는데, 도서관 소개로 왔다고 커다란 상품 굴비 한 마리를 포장에 그냥 쏙 넣어주신다. 찌거나 전자렌지에 돌려 녹찻물에 밥 말아서 같이 먹으면 참 맛있다는 상세한 설명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는 단풍이 흐드러졌다. 평소 ktx를 타고 다니면 잘 오갈 일이 없는 광양, 구례, 하동...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의 단풍 풍경을 즐겨본 사람은 알 것이다. 전공의 2년차 때 당시 과장님 (학생인턴 때부터 정신과를 하라 권유 주셨던, 내 인생의 은사님)을 모시고 영호남 학술대회를 다녀왔던 그 길이었다. 과장님께서는 해마다 우전 절기가 되면 그 해의 차를 맛보러 하동의 단골 찻집을 들른다고 하셨다. 과장님, 사모님, 나, 이렇게 다기 앞에 앉아 올해 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차를 마셨었다. 특별한 이야기도 없이 벽에 걸려있는 찻닢이며 다기들, 주걱들을 구경하고 다실 자체에 배어있는 향을 맡았었다. 그러고보니 돌아오는 길에는 쌍계사 근처에서 은어 튀김이 유명한 가-든 에 들러 매운탕을 먹었었지. 그 때도 산야에 붉고 노란 얼룩이 흐드러지는 가을이었다. 국도 변에 만개한 코스모스며 단풍, 샛노란 은행잎을 보며 그 때의 추억을 떠올렸다.

  집에 돌아와 배웠던 대로 굴비를 전자렌지에 데워  녹찻물에 밥을 말아 살점 한 점 한 점씩을 올려 먹었다. 태어나서 생선에서 그런 깊은 맛을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영광굴비가 괜히 이름이 난 것이 아니 구나 새삼스레 느꼈다. 주기적으로 택배로 받아먹자 아내와 이야기했다.

  전 날 제대로 된 잠은 한 숨도 못 잤던 터라 저녁을 먹자마자 급히 설거지만 마친 채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으니 전날 자정 걱정을 이끌고 집을 나섰던 때부터 지나쳤던 일들, 만났던 사람들, 생각들이 스쳐갔다. 피곤함 이외에는 우리 똑똑한 부정이가 결코 미리 알 수 없었던 것들이다. 아무도 눕지 않은 푹신한 침대의 약간의 서늘함을 기분 좋게 느끼고 있자니 뿌듯함과 만족스러움이 밀려왔다. 잘 다녀왔구나, 부정이도 별 말이 없다.





  마음이 불안과 손실에 민감한 이유는 행복은 있으면 좋은 일들인데 반해 불행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로또 당첨은 되든 안 되든 우리의 일상에 큰 영향을 주진 않지만 잘못 선 보증 빚은 내 일상을 파괴할 수 있다.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즐기든 안 즐기든 내 삶에 큰 변화는 없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 두려움은 늘 이성적이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반면 행복에 대한 가정은 유치하고 두루뭉술한 이야기이기 일쑤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을 경청하고, 희망을 무시한다.

  그러나 이번 강연은 가지 않는 것이 맞다고 강력히 주장한 부정이는 굴비의 맛이라든지, 단풍의 풍경이라든지, 깊은 대화에서 묻어나오는 진솔함 같은, 미래에 주어질 행복들에 대해서는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삶 내내 늘 그래왔다. 이해한다. 부정이에게는 주어질 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기쁨들 보다는 현재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예측되는 불행들만이 보인다. 그것이 불안의 고유한 속성이다.  

  이러한 마음의 속성을 이해하면 왜 늘 부정적인 생각만이 가득할까 라고 속상해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부정이를 미워하지 않고, 긍정이와 무던이를 편애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역할이 있다. 부정이는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지켜주고, 긍정이는 내 삶을 고양시켜 주며, 무던이는 그 둘 사이의 균형을 잡아준다. 나는 오히려 부정이를 좋아한다. 부정이는 내가 원하지 않는 무언가를 강요하는 짜증나는 참견 쟁이가 아니라. 내가 피해야 할 것, 주의해야 할 것을 알려주어 내가 조금 더 조심하고, 한 번 더 겸손하고,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필 수 이게 해 주는 소중한 동반자다.

  다만 현재의 시점에서의 부정이의 이성적인 판단들이 매력적이고 논리적이라고 해서 그것만을 맹신하지는 않을 뿐이다. 우리의 이성과 판단은 실은 매우 제한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내려지는 것이며 두려움에 취약한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긍정과 부정, 양 쪽의 이야기를 균형 있게 들으려면 논리나 이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니, 논리적으로도 '부정이의 이성적 판단이 무조건 맞을 확률' 보다는, 지금의 내가 예측하지 못하는 행복의 가능성이 존재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경청을 하되, 일반적인 의사결정 과정의 원칙과는 조금 다르게 상황을 예측하고 행동을 결정한다. 보통은 이성적으로 어떠한 생각이 잘 맞는지, 합당한지, 옳고 그른지를 통해 판단하겠지만 나는 그 결정이 얼마나 기쁨과 행복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지에 좀 더 가중치를 둔다. 불안은 구체적이고 근거가 가득한 데 반해, 행복의 가능성은 모호한 것이 애초의 본질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안하여 나는 지금 내가 할 것, 오늘 내가 보낼 하루를 결정할 때 떠오르는 생각들이 얼마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지 보다, 그 생각들이 얼마나 '행복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지' 를 본다. 가만히 앉아서 10분만 생각해도 이 삶이 왜 무가치하고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잘못될 수 있는 지에 대한 수 만 가지 이성적인 이유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우리다. 그에 반해 어떤 일이 어떻게 잘 이루어질지, 어떤 멋진 일이 있을 지는 미리 알 수 없다.

  나는 오늘도 마음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말이 맞는 지 틀린 지, 논리적으로 허점이 없는 지를 따지기보다 그 생각으로부터 이어지는 '행동'이 실제의 내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지, 그 생각이 얼마나 내 삶을 나아지게 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지를 생각한다. 가 보지 않은 장소, 만나보지 않은 사람, 해 보지 않은 일은 되도록 '일단은' 가 보고, 만나보고, 해 보려 한다.

  부정적인 생각, 비관적인 생각들이 가득해서, 그 생각들이 희망과 긍정의 가능성을 논리로 압도해서 고민이라면 원래 비관이 ‘매력적인 오답’ 임을 기억하면 좋겠다. 지금의 나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생각으로는 본디 비관적인 생각이 이성적이며 매력적이다. 그렇기에 옳고 그름을 넘어서, 어떤 생각이 나의 삶을 더 행복의 가능성으로 인도하는 지를 떠올려 보기를 권하고 싶다. 오늘의 당신을 웃게 하는 것을 10년 전의 당신이 상상할 수는 없었듯, 먼 훗날의 당신은 지금의 당신이 그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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