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맞아 큰맘먹고 블루투스 키보드 하나를 들였다. 타자기와 똑같이 생긴 외형의 운치가 근사한 녀석이다. 내가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것을 몇 번 본 우리 아기가 이제는 노트북 부팅 소리만 들려도 달려와 내 앞자리를 꿰차고 키보드며 마우스를 달그락거리는 통에 글 한 줄 쓰기가 어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기존에 이미 블루투스 키보드가 있었지만 거치도 불편하고 무엇보다 자판을 두들기는 맛이 하나도 없어 불만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폰을 던져놓듯 거치가 되는 편리함도 그렇지만 글 쓰는 맛이 타자기 두들 기듯 착착 감겨서 아주 만족스럽다.
글감은 늘 갑자기 찾아온다. 샤워를 하다가 (특히 꼭 머리에 막 샴푸를 끼얹어 가장 오도가도 못할 때), 운전 중에, 면담을 하다가, 산책하다 손을 놓고 급발진하는 아이를 급히 쫓다가, 그런 순간에 스치는 플래시처럼 아주 잠깐 머릿속을 밝히다 이내 사라진다. 20초 전의 나는 햄버거를 두 입 정도 베어 문 참이었다. 오래된 노트북 부팅을 기다리다 날아갈 아이디어를 타자기의 감성과 함께 이렇게 붙잡아 둘 수 있어 기쁘다.
심지어 이렇게 글을 컴퓨터로, 모바일로 자유롭게 쓰고 저장할 수 있게된 것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다. 존경하는 장영희 교수님의 에세이에는 교수님이 약 5년 간 수기로 (!) 적은 논문을 분실한 (!!) 에피소드가 나온다. 버벅대는 노트북이 갑자기 꺼지는 바람에 한 두 문단 분량의 글만 날아가도 아까움과 분노에 몸서림치는 나로서는 교수님이 그때 겪었을 그 마음이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백스페이스, 딜리트, 엔터 키도 없이 수 년간 논문을 써 내리는 마음, 그렇게 모이고 모인 논문을 두고 차에서 내려 분실하는 마음.. 그 시절의 그들은 그렇게 글을 쓰고, 잃어버리고, 책을 만들어 냈다. 문장의 앞 뒤, 중간을 자유롭게 지우고 새로이 쓰고, 쓴 문장을 문단 이리 저리에 붙였다 뗐다를 반복하며 이렇게 글을 적고 있다 보니 원고지와 연필 하나로 글을 쓰던 작가분들은 도대체 어떻게 글감을 붙잡고, 그렇게 아름답게 적어냈나 싶다. 그래서 작가들은 늘 수첩을 챙겨들고 다녔나 보다. 만약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느리고 귀찮음 가득한 손길과 악필로 잡아낼 글감들이 한 줌은 겨우 되었을까. 나에게 보내기 카톡으로 쉽게 쉽게 메모를 남길 수 있음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고보니 키보드 위에 멋지게 거치된 핸드폰이 눈에 들어온다.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던 건 본과 생활에 적응이 되던 즈음의 어느 날이었다.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노트북으로 낑낑대며 레포트를 쓰고 있던 어느 날, 룸메이트가 침대에 누워 인터넷 (로딩중 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켜 보여주던 날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하기 때문이다. 위험한 이불 밖으로 나서지 않아도 웹툰을 볼 수 있다니.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로딩 없이도 폰으로 인터넷을 할 수 있다니, 영화를 받아 볼 용량이 된다니, NBA 중계를 폰으로도 실시간으로 재생이 가능하다니 등의 순서로 놀람은 진화했다. 사과폰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스마트폰은 부잣집, 혹은 얼리어답터 들의 전유물이었다. 지금은, 비록 여전히 그 스마트폰은 은연중에 명품 취급을 받는 모양이나, 그 특별했던 놀람들은 꽤나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기능이 되었다.
유튜브만 해도 그렇다. 나는 내가 타인에게 제공한 치료, 위로, 평안, 기쁨이 나에게 행복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는 직업을 택했고, 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삶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타인과 직업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은 진료실이 유일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매우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인 것 처럼 느껴졌던 영상 컨텐츠 게시나 화상 회의를 통한 연구회 활동 같은 최첨단 기능들이 이제는 나의 일상 속에도 스며들었다. 회의 시간이 되면 익숙하게 화상 프로그램으로 접속하고 유튜브 제작을 위해 터치 한 번으로 영상을 찍어 편집자인 동생에게 전송하는 일, 평소 기계치로 소문이 자자한 나로서는 과거에 일찍이 상상하기 힘들었던 낯선 모습들이다.
변해가는 세태 속에서 적응이 쉽지 않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변화마다 늘 그 변화에 한 발 앞서 올라타 그 과실을 최대한 누리는 이들이 있다.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어낸 사업가나 앱 개발자, 인기 유튜버들이 얼마나 많은 부를 누리는 지가 여기저기서 회자되고 기사화된다. 크게 다르지 않은 월급을 받으며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이를 바라볼 때는 어쩐지 상대적 박탈감과 위기의식이 든다.
최근 언급되는 '벼락거지' 란 신조어의 근원에도 이러한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을 듯 하다. 단순이 경제적으로 얼마를 이익 보았다, 손해 보았다의 관점이 아니라 그냥 이렇게, 이대로 그냥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무언가 획기적이고 새로운 시도를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시대의 흐름을 타기 위해 어떤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뒤쳐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라는 불안일 것이다.
그러나 관점을 조금 돌려보면,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변화하는 속도' 에 따라 우리의 삶을 맞추어가고 있다. 나의 일상은 남들보다 앞서게, 는 아니었으나 나라는 개인의 서사 안에서는 매우 변화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기가 막힌 타이밍과 감각으로 일찍이 시대의 변화를 잡아내는 사람은 매우 소수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나 단지 그 극소수의 특별한 누군가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일상을 폄하하고 자괴감에 빠질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세상이 변화하며 내가 누릴 수 없는 과도하게 비싼 것들과 그것을 마음껏 즐기는 부러운 사람들이 많아진 만큼, 나의 생각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는, 저렴하거나 적당히 비싼 것들도 함께 많아졌다. 맞고 틀림을 떠나 그냥 지금 내게 주어진 현실이 그렇고 앞으로도 나의 삶은 그러할 것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 경험칙 적으로 하루 중 전자 보다는 후자에 대래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날 수록 나의 행복도 커짐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단지 적극적으로 나의 행복을 실현하려 노력할 뿐이다.
앞으로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것,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것, 그리고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것이 가득한 삶을 살아갈 나는 해야할 일에 최선을 다하며 남는 시간과 여력은 아주 드문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일에 최대한 쏟고 싶다.
꼭대기가 잘 보이지 않는 호텔 스위트룸에서 조식을 시키면 어떻게 나오는 지도 궁금하고 이름만 대면 알지만 사지는 못하는 명품 차량의 내부구조도 알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지만 직접 하지 못한다는 씁쓸함이 아무래도 남는다. 그래서 그보다는 멋진 블루투스 타자기로 글을 쓰며 직접 내린 커피를 마시는,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더 하고 싶다. 나에게 한 번만 허락된 삶, 그 중에서도 겨우 허락된 주말이라면 그렇게 보내고 싶다.
당연히 지금 나에게 허락된 작은 여유 역시 누군가에게는 매우 과분한 것임을 알고 있다. 역으로 이는 또 누군가 에게는 매우 하찮게 느껴질 만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나의 일상에 대한 답을 구할 필요가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되새기며 아쉬워 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일지, 어떻게 해 볼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나의 자유다.
한참 글을 써 내리다 막혀 답답할 때면 유튜브로 손열음 님의 공연을 본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몇 되지 않을 대가의 공연을, 나의 의도와 와이파이만 있으면 추가적인 요금 없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은 기적같은 축복이다. 내가 300년 전에 태어났더라면 이만한 가치를 향유할 수 있었을 확률이 얼마나 되었을까. 왕가, 혹은 극소수의 귀족으로 태어난 행운아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진 않았을까. 당장 어린 시절만 해도 문화회관에 들러 클래식 공연을 보았던 경험이 10대 통틀어 손에 꼽는다.
원하는 삶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소중한 것들은 분명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일을 핑계로 키보드를 살 수 있어서 기쁘다. 그 기쁨을 타자기의 감성을 통해 적어 내려갈 수 있어 더욱 기쁘다.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면 손에 닿는 것을 원할 수 있어 다행하다. 그리고 그것을 원하는 이유가, 단지 그것이 값비싸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삶의 의미와 닿아있기 때문인 것이 감사하다.
앞으로도 내가 객관적으로 얼마나 대단하며 상대적으로 그럴듯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극히 주관적이고 절대적인, 예컨대 타자기 하나 짜리 정도의 소중함들은 늘어가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