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의 주 증상 중 하나는 무기력이다. 일반적으로 피곤한 것과 우울증의 무기력은 질적으로 다르다. 격무에 시달려 지친 몸은 며칠의 수면과 충분한 휴식으로 회복될 수 있지만 우울증으로 인한 무기력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도 다르지만, 마음과 생각이 지향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단순히 피곤에 지친 마음은 어서 회복되어 다시 달리기를 원한다. 과로에 의한 피로는 다시 일어서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그에 반해 우울증으로 인한 무기력에는 무의욕, 무가치감이 동반된다. 어차피 힘이 없기도 하거니와 왜 힘이 필요한 지, 그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지에 대한 이유가 사라진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열심히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러한 생각에 따라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그러한 기분과 생각에 알맞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거나 핸드폰만을 뒤적이는 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러면서도 막연히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찾아와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 끝없는 순환의 고리를 통해 우울은 증폭이 되고, 종국에는 모든 허무와 우울을 종결시키는 마지막 수단으로써의 죽음에 대한 생각도 자연스레 따라온다.
기분과 감정은 우리 몸에 각인된 일종의 신호다. 예컨대 위험한 것에 대해서는 공포와 두려움이란 감정을 유발하여 그 대상을 회피함으로써 우리를 보호하도록 기능한다. 이는 모두 본능의 영역은 아니다. 우리의 본능이 형성된 오래전에는 자동차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며 자동차 사고가 얼마나 우리의 생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지 매체를 통한 간접 경험, 교육 등을 통해 학습한다. 이를 통해 나에게 돌진하는 자동차는 공포와 연결이 되고, 그러한 기분이 유발되었을 때 우리는 자동차를 황급히 회피한다.
이렇듯 기분에는 그에 상응하는 행동이 함께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그에 따라 우리는 본능에 따라 홀린 듯 기분에 따르는 그 행동을 하게 된다. 배고픔이나 스트레스가 밀려오면 떡볶이를 먹고, 외로움이 밀려오면 친구를 찾고, 우울과 피로가 밀려오면 휴식을 취한다. 우리의 마음은 꽤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알고리즘이다. 일정 수준의 부정적인 기분은 적절한 대응행동을 통해 해소되고, 우리는 순조롭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문제는 우리의 삶이 우리의 기분이나 본능이 예측하는 것 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울 때가 많다는 점이다. 따돌림과 같이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많은 이들에게 낯선 사람은 그러한 아픔을 다시금 제공할 불확실성을 내포한 존재로 인식된다. 마음은 그들을 만날 때 심한 불안을 유발하여 모르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회피하도록 하고, 가족, 친한 친구, 연인 과 같은 제한된 인간관계만을 추구하도록 한다. 그러나 면접관, 새로운 직장 동기, 사업 파트너와 같이 인생의 기회는 모르는 사람과 함께 온다. 그러나 기분이나 본능은 이러한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어떻게든 타인을 피하는 것이 옳다고만 이야기한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뇌가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것은 포도당이며, 우리의 기분은 이 양질의 순수한 에너지원을 다량으로 소모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이득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언어나 수학을 학습하기 위해 머리를 쓰는 것이 취직, 월급, 주식투자소득 으로 이어지는 일은 본능이 형성되던 오래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게다가 공부를 할 때 마다 좋은 결과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시험이나 면접에 탈락하거나,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해 속상하는 등 혐오적인 결과가 학습된 적도 많았다.
마음의 입장에서는 이렇듯 본능적으로 납득되지 않고 실제로도 힘든 결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공부를 최대한 회피하게 한다. 핸드폰을 뒤적이게 하고, 침대에 자꾸만 나를 눕힌다. 어떻게든 뇌의 활성을 줄여 (마음의 입장에서)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중단시키려 한다. 나에게는 꼭 필요한 시험공부, 면접 준비이지만 나의 마음, 나의 기분은 이러한 ‘나의 삶’ 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기분과 삶의 괴리는 일상 곳곳에서 발견된다. 혈압과 당뇨로 저염, 저당식이가 필요함을 이성은 충분히 알지만 라면과 초콜릿이 당기는 장면, 화는 시간을 두고 조금 차분히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급히 오른 화를 벌컥 내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장면, 우울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그 원인과 해결책을 생각해 보지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더욱 힘든 마음이 심해지는 장면 ... 우리는 마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행동할 뿐인데, 그럴수록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결과가 주어지곤 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왜 이렇게 내 마음,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까.’ 란 고민이 또 한 번 더 나를 괴롭힌다.
이러한 고리를 끊는 간단한 방법은 지금 내가 하고자하는 행동이 기분을 지향하는 행동인지, 목적를 지향하는 행동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갈등이 깊은 상사의 면전에 폭력이나 폭언, 혹은 일처리의 지연이나 뒷담화 등을 통해 돌려 그를 공격하는 일 등은 나의 기분에 따르는 행동이다. 반면 이러한 상황에서 목적을 지향하는 행동이란 그와의 갈등을 빚었던 일을 개선하거나 (원활한 업무라는 의미를 지향), 불편하지만 따로 대화를 시도하거나 (원만한 관계라는 의미를 지향), 혹은 부당한 지시나 인격적 모독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할 공적인 절차를 찾는 것 (나의 권리를 찾는다는 의미를 지향) 등이 있을 수 있다.
마음이 미리 설계한 대로 기분에 부합하는 행동을 정해진 알고리즘에 이끌리듯 나도 모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사와의 관계를 개선하거나 업무를 원활히 하기’ 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을 떠올리고 실행하는 것이다. 물론 그 궁극적인 목적이란 나의 행복이다.
심한 우울감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 라는 기분지향적인 행동을 택하게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행동이 옳은 지 그른 지 가치판단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삶에 좋은 무엇을 가져다주는 지의 실효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보는 것이다. 내가 지금 누워있어서 좋은 이유는 기분에 순응한다는 느낌, 무언가를 시도하였을 때의 귀찮음을 회피할 수 있다는 편안함이다. 반면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불쾌감, 해야 할 무언가를 하지 못했다는 조바심, 자책감도 함께 들 수 있다. 이것은 우울함을 지향하는 행동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목적 지향 행동의 경우는 어떨까. 물론 그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할 지가 우선 달라지고, 그 행동에 따라 구체적인 결과도 달라질 것이다. ‘우울함을 덜고 좀 더 나은 기분’ 을 목적으로 지향한다면 그에 따라 운동하기, 심리 상담 또는 정신과 진료를 보기, 취미활동을 하기 와 같은 행동이 가능하겠다. 이러한 행동은 귀찮고 피곤하다는 단점도 분명히 있고, 기분을 좀 더 낫게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행복해지기’ ‘할 일을 마무리하기’ 같은 다른 목표를 삼고 이를 위한 행동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장단점도 미리 예측해 볼 수 있다.
기분 지향적 행동과 목적 지향적 행동을 나누는 것은 무작정 목적 지향적 행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작정 기분 지향적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는 어떤 기분에 사로잡힐 때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흐름에 빠져든다. 홀린 듯 그렇게 행동을 하고서 그 때 미리 공부를 좀 해둘 걸, 그 때 좀 참을 걸, 그 때 좀 더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걸 이라 후회하며, 다시금 그러한 행동을 유발하는 기분에 빠져들곤 한다.
지금 내 마음에서 강렬하게 떠오르는 어떤 행동에 대한 충동이 기분을 지향하는 것인지 목적을 지향하는 것인지를 구분하다 보면 지금 당장 떠오르는 그 행동이 무조건 지금 상황에서의 정답이 아님을 깨닫게 되고, 좀 더 나와 내 삶을 충만하게 하는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시간, 기분과 행동 사이의 ‘틈’을 벌어준다. 항상 이상적인 행동만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지금 내가 이 행동을 왜 하려는지, 좀 더 나은 대안은 없는 지를 숙고하는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이러한 구분을 시도하는 의의다.
본능과 기분이 유발하는 회피와 충동 보다는 내가 되새기는 삶의 의미, 살아가고픈 삶의 모습,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이 조금 더 나의 행복을 세심하게 이해해 줄 때가 많다. 기분에 따라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끌려 가는 느낌의 행동들로 하루를 채우기 보다는 내가 어떤 하루, 어떤 삶을 원하는 지를 떠올려 보고 이를 위한 행동들을 시도해 보면 어떨까.
기분만을 지향하던 행동들이 하나 둘 씩 점점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한 행동들로 바뀌어간다면, 원치 않는 것들로만 가득한 것 같은 나의 삶에도 하나 둘 씩 나의 바람과 닮아가는 것들이 늘어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