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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Feb 03. 2021

그 라면 지금 어떻게 했을까?

되고 싶은 내 모습에 다가가는 간단한 한 가지 방법


(평소 보다 긴 글입니다.)



  살다보면 스스로가 봐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 삐뚤하고 미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조금 더 부드럽게 이야기해도 될 것 같은데, 조금 더 배려하고 세련되게 대처해도 될 것 같은데, 일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투박하게 말을 하고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들과 불화를 빚곤 한다.


  그런 순간에 나는 종종 친구 하나 (이하 댕댕이)를 떠올린다. 댕댕이는 이 순간 어떻게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했을까. 그 생각은 대개 나의 울화가 떠올린 생각보다 따뜻하고, 그 말은 홧김에 내지를 뻔 한 말보다 정갈하고 배려깊다.


  댕댕이는 고등학교 때 부터 함께 공부를 하고 연애 상담을 하고 인생 계획을 고민했던 친구다. 늘 주위사람들에게  푸근한 웃음을 짓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 애쓰지 않고, 무작정 다 잘 될 거라 말하기보단 잘 될 만한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고민하는, 곁에 있으면 왠지 모를 긍정과 희망이 전해져 게속 곁에 있고 싶어지는 그런 친구였다.

 

 "너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좋아? 어떻게 그렇게 늘 잘 될 거라 생각할 수 있어?" 하루는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따뜻함의 깊이에 대해 문득 궁금함이 일어 물어보았다.


  "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론 다 나쁘고 이기적이라 생각해. 그래서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거야. 그런 척이라도 하며 노력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오히려 좋은 사람이 되는 걸 느껴."
 

  "미래에 무조건 좋은 일이 있거나 다 잘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잘 안될거 생각해봤자 뭐해.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게 실제로 잘 될 가능성을 올리는 거지 않을까?"


  타인을 향하는 그의 배려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어둠도 포용하고 있었다. 그의 희망은 아름다움 속에서만 성장한 온실 속 화초가 앞으로의 삶도 마냥 그렇게 아름답기만 할 것이라 이야기하는 단순한 치기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그의 성장 환경은 온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친구의 속깊고 비범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록 나는 그에게 빠져들었다. '닮고 싶다, 저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는 생각이 들었다.






  늘 쪼들리던 새내기 때, 돈을 쓰지 않기로 유명한 친구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던 어느 날이었다. 기숙사 월세, 책값, 학회비, 동아리 회비 등 여기저기 돈 쓸일은 많고 가뭄에 콩나듯 들어오는 과외와 용돈 외에 수입은 전무한 대학생 시절, 적으면 2만원 많으면 3만원 남짓 술값을 누가 내느냐는 참 민감한 문제였다. 그날도 그놈은 돈을 낼 기색이 없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려는 찰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댕댕이라면 지금 어떻게 했을까.' 어차피 이놈이 돈 안쓰는 건 오늘 만나기 전 부터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고, 어차피 오늘도 안내지 싶은데 그냥 수중에 돈이 있으면 술자리 즐겁게 가지고 돈 없을 땐 안만나고 말지, 그렇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싶고, 기꺼이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억지로, 그러나 흔쾌히 계산하고 좋은 기분 그대로 자리를 파했다. 지갑은 텅텅이었지만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런 장면들이 종종 이어졌다. 연인과 다투며 날 선 말이 떠오를 때 '댕댕이라면 뭐라고 했을까.', 오래도록 준비한 일들이 무산되어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떠오를 때 '댕댕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중요한 결정 앞에서 고민이 될 때 '댕댕이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그렇게 떠오른 말과 행동, 결정들은 어쩐지 나의 감정에 휩쓸려 내릴 것들보다는 한 층 성숙하고 세련된 것들 처럼 느껴졌고, 실제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 친구가 그런 상황 상황마다 어떤 말을 했을 지, 어떤 결정을 했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목소리, 그의 생각으로 남아있는 내 마음속의 이미지는 단편적인 그를 통해 내가 그린 이상적인 그의 모습이다. 지금의 마음에 갇힌 내가 아닌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떠올리는 말과 행동을 행하며 나는, 조금 더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기쁨을 느꼈다.






  인지치료의 메타 인지, 수용전념치료의 조망, 게슈탈트 치료의 빈 의자 기법 등 많은 심리치료의 영역에서 스스로의 마음의 경계로부터 벗어나 다른 관점을 취해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평소의 우리는 1인칭,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 스스로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 자신의 마음의 틀에 갇혀 그에 맞추어서만 세상과 관계, 스스로를 인식한다.

  관점 취하기는 상상이라는 도구를 통해 이러한 관점의 시점을 바꾸어 보는 것이다. 시간적 시점을 바꾸어 지금의 내가 아닌 과거의 나, 미래의 나의 시점에서 지금의 나를 바라볼 수 있고, 공간적 시점을 바꾸어 지금 낯선 사람들 속에서 불안해하는 내가 아니라 편안하고 친숙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나의 시점으로 관계를 바라볼 수도 있다. 사람의 시점을 바꾸어 나 자신이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친한 친구, 가족, 존경하는 사람의 시점을 상상하여 스스로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가 우리의 시점과 관점만을 고집하게 되는 이유는 물론 익숙해서가 가장 크지만, 스스로의 관점이 좋은 것이라 강요하는 사회적인 영향을 받아서 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만의 관점을 확립해야 한다, 확고한 자아상이 있어야한다,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라는 메시지들이 그것이다. 물론 스스로의 건강하고 뚜렷한 자아상과 행복관, 가치관을 확립하는 것은 삶의 토대를 단단히 해 주고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증진시키는 좋은 효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런 이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나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원칙에 경도되어서 나의 관점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관점을 고집해야 한다고 인식하기 시작하면 마음은 '지금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생각과 감정이 어떤 것인지' 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나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라는, 스스로에 대한 일관된 설명을 유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스스로의 관점, 나 라는 정체성의 유지에 몰입하다 보면 유연성을 잃어버리고 경직된 삶의 방식을 취하기 쉽다. 지금 내가 하는 생각과 말, 행동이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인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지보다 지금까지의 나의 관점과 얼마나 비슷한지,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과 얼마나 일치하는 지,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지를 더 중요시하게 된다. 설사 그것이 그리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닐지라도, '왠지 지금은 이렇게 해야 할 것만 같은' 충동에 이끌려 후회할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한 다음, '어쩔 수 없지, 이게 나인걸' 이라 체념하곤 한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 닮고 싶은 일면을 발견하였을 때 그에게 끌리게 된다. 연애감정이나 아이돌을 동경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누군가를 흠모할 때는 그에게 닮고 싶은 어떤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동경할 만한 그가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를 상상해 보는 것은 나 라는 경직되고 일관된 관점에서 벗어나 좀 더 나은 나, 좀 더 되고 싶은 나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따뜻이 건네는 말 한마디, 부담스럽지 않은 배려, 갈등을 유머로 전환하는 재치, 품위와 진심이 느껴지는 흠모할 만한 이들이 우리 가까이에 늘 존재한다. 비록 세간이 알아줄 만한 화려함, 세상을 떠들썩할 만 한 성과를 낸 건 아니지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를 진중히 아끼며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그런 이들이다. 티비나 책 속 유명인들과 달리 그들은 우리의 삶 깊숙히, 가까이에 있다. 그들과 관계를 이어가며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대하는 지, 하루에 임하는 지에 대해 어렴풋이 가늠하다보면 나의 삶 속에서도 그의 관점을 빌려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나 자신을 잃는 것' 과는 다르다. 나 라는 사람은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나로부터 멀어지는 건 아닐까, 라는 우려에는 그런 것은 아니다 라는 안심을 전하고 싶다. 내가 아닌 남의 뜻 대로 살아간다, 내가 없는 것 같다 는 느낌은 삶의 판단을 내가 내리지 못하고 타인의 의도대로 끌려갈 때 전해진다.

  그에 반해 관점 취하기는 내가 취할 수 있는 레퍼토리를 오히려 나의 의도에 따라 능동적으로 늘려간다. 나 라는 관점 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말, 행동, 생각과 감정은 내 인생이라는 한정된 경험으로부터만 만들어진다. 타인의 시점을 빌려옴으로서 우리는 내 인생 만으로는 떠올릴 수 없는 새로운 관점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나 혼자만의 삶만을 바탕으로는 떠올리기 힘든, 조금 더 나은 나, 조금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질 새로운 순간을 상상하고 이를 현실에서 시도해 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감정과 행동이란 살아온 경험, 과거를기반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충동이다. 과거로부터 형성된 마음으로 인해 지금은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삶을 끌어당기는 거친 말이나 생각, 감정에 휩쓸리는 것, 그 ‘어찌할 수 없다는 느낌’에 이끌리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나를 잃는 것일 지도 모른다. 우리의 마음에는 지금의 익숙한 나 자신에 머무르고 싶은 나뿐만 아니라, 익숙한 나의 마음에서 한 발 나아가고 싶은 나 도 존재한다.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 뿐만 아니라 되고 싶은 스스로의 모습을 능동적으로 떠올려 보는 존재, 타인의 관점을 투영하여 생각해 보는 것을 포함하여 이를 닮아가려는 시도를 하는 그 존재 역시 진정한 당신이다.






  관점 취하기를 통해 좀 더 나은 지금의 나를 시도하는 것은 나를 이끄는 타인의 매력적인 삶의 향기를 내 삶에도 입혀보는 일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곁에 있을 때 전해지는 은근하고 포근한 삶의 분위기를, 그의 시선을 빌리는 순간들을 통해 내 삶에도 가져와 볼 수 있다. 아기자기한 카페의 소품들에서 영감을 얻어 집을 꾸며보듯, 인상깊은 전시회 기념품 가게에서 자그마한 작품 미니어쳐 액자를 사서 식탁 가에 걸어 보듯, 나라는 삶의 한계로는 떠올릴 수 없었던 포근한 말과 사려깊은 행동을 동경하는 그의 관점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시도하다 보면, 다소 이질적이지만 설레는 변화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이런 나도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 당신의 마음에 있었다면, 이 글이 당신이 행복해 질 수 있는 수 만 가지 방법 중 하나에 대한 조그만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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