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안녕하세요. 먼저 선생님께 제 고민을 털어놓게 된 이유는 정신의학신문에 올리신 선생님의 글들을 읽어서인데요. 우연한 계기로 홈페이지에서 선생님의 글을 봤습니다. 그 공감이 가고 위안이 되는 글들에 다른 글도 읽지 않을 수 없겠더라고요. 그렇게 조금씩 읽으며 몇몇 과거를 다르게 생각하게도 되었고, 지금을 좀 더 평온하게 사는 데에도 힘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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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저는 몸이 좋지 않아 집 근처 병원 응급실에 갔습니다. 거기선 수술이 안 된다고 하여 근처 대형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요. 네.. 제가 좋아하게 된 사람이 바로 제 수술을 담당해주신 의사 선생님이십니다. 입원하는 동안은 선생님을 봐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퇴원 후 다음날 갑자기 선생님이 생각나더니 일주일 후 외래 가기 전까지 정말 1분 1초도 빼놓지 않고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 선생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밥도 안 넘어가고 넋이 나가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더라고요. 종일 머릿속에선 얼마 주고받지도 않은 대화를 복기하고 있고요. 처음이자 마지막 외래 때는 입원 하는 동안 추레했던 제 모습을 상쇄시키고자; 영혼을 끌어모아 꾸미고 갔던 것 같아요. 어차피 선생님은 저한테 하등 관심 없는 걸 알면서도 잘 보이고 싶었거든요. 드레싱 받으면서 다음 외래는 언제인가 싶었는데 선생님이 이젠 안 와도 된다고 하시기에 애써 신난척했지만, 선생님을 못 뵌다는 생각에 진료실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저는 이런 제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꽤 오랜 기간을 불감증인 마냥 살아왔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거라서요. 그래서 선생님이 너무 좋다는 사실보다 '나도 다시 누굴 좋아하게 되긴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바뀐 저 자신의 모습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그런 마음보다 선생님 자체가 너무 좋아지는 겁니다. 이게 사랑인가 싶을 정도로 제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수술받은 지 한 달이 넘어가는데도 여전히 선생님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눈앞의 할 일을 놓치고 있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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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제가 누굴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이렇게 몸과 맘이 뒤죽박죽되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어 당황스럽습니다. 처음 겪어본 전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그 마음에 계속 집착하는 건지, 시험공부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정당화하려는 건지, 의사라는 조건에 반한 건지, 단순히 동경의 마음인 건지 선생님을 좋아하는 제 모습에 제가 취한 건지 당최 모르겠습니다. 이 감정에 대해 저 스스로 이유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보면 이게 사랑이 아닌 건 알겠습니다. 사랑하는데 이유는 없다는 말처럼 제 감정엔 동기가 너무 많은 것 같아서요.
하지만 사랑이 아닌 걸 알아도 이 감정 때문에 제 일상이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정신과 상담 중에 전이가 일어나서 솔직하게 말하면 상담에 효과적이라던데 저도 그렇게 속 시원히 말하고 나면 좋을 것 같아요. 오히려 말을 하지 않고 속에 담아두니 그 감정이 더 진해져 아예 각인되는 거 같달까요. 선생님의 글에도 나와 있듯이 그 선생님의 단편적인 면에 제 주관적인 판단으로 좋게 채워 넣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 생각을 하면 차라리 한 번만 더 뵈면 환상이 깨질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애써 그 선생님의 다른 부분을 부정적으로도 상상해봤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냥 제 머리 속의 선생님은 너무 따뜻하고 다정하세요. 꿈에 나오실 때마다 한결같이 좋은 사람으로 나오셔서 깨고 나면 허망한 기분이 듭니다.
(중략, 해당 선생님이 일을 쉬신다고 하심)
그리고 쉬신다는 말을 들으니 혹시 몸이 편찮으신건가 걱정도 들어 더욱더 안부를 묻고 싶어요. 병원에 선생님 메일 주소라도 물어봐서 보내고 싶은데 병원에서 안 알려주겠죠? 하.. 정말 딱 한 번만 다시 뵙고 나면 제 마음이 추슬러어질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어서 우울해집니다. 산책할 때 병원 안 간 것, 편지 안 드린 것, 글 안 올린 것 등 모든 게 후회의 연속이라 자괴감도 들고요. 그냥 아침에 눈 뜨면 자동반사적으로 허탈감부터 밀려와요.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어 너무 슬퍼요. 선생님을 몰랐던 예전의 메마른 감정의 저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후략)
두두의 마음 편지)
안녕하세요. 글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그 마음이 꼭 서로 같을 수 만은 없기에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과 좌절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글 속에 그러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저 역시 안타까운 마음을 함께 느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고민들로 보내오신 그 시간들을 먼저 위로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사연자분이 그 의사분을 만나는 것이 답인지, 그렇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답인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마음이 어떨 지, 그 분 역시 사연자분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 지 못합니다. 다만 지금의 사연자분의 마음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연자분이 적어주신 마음으로부터 사연자분의 내면에 다음과 같은 원칙이 있음을 느낍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마음에 찾아오는 욕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 욕구가 이루어질 수 없다면, 그 욕구를 없앨 수 있어야 한다.'
이루어지기 힘든 욕구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들다면 차라리 깨끗이 잊고 없애버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이 되기 힘들 수록 욕구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잊으려 할 수록 더 잊어지지 않습니다. 간절히 원했던 것에는 그랬을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왜 그런 욕구가 찾아오는지, 무엇이 문제이기에 나는 이런 마음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는 지를 분석하는 마음 아래에는, 그런 마음은 달성되어야 하거나, 달성되지 못한다면 사라져야만 한다는 강렬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마음대로 이루어지거나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마음이 없어야지만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러한 원칙들이 행복으로 고스란히 잘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인생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모두 이루어질 수 없을 뿐더러, 없어지지 않는 마음을 자꾸만 없애려 드는 시도나 고민 자체가 마음의 고통을 더욱 심화시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이를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생각한다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사연자분은 하루에 몇 번, 얼마의 시간 만큼을 그 분에 대한 생각을 하며 보내실까요. 그리고 사연자분의 삶 속에서, 그 분이 아닌 다른 소중한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시간, 친구와 소소한 수다를 떠는 시간, 홀로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준비하기도 하는 시간들.. 그렇게 쓰여질 수 있는 시간들이 그 분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하며 소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생각이 떠오르니 어쩔 수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생각이 떠오를 때는 마음이 정리될 때 까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그러한 생각이 없어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는 믿음이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의사선생님과 만나고 연결될 수 있어야 하거나, 그렇지 못하다면 이러한 마음은 없어야 된다.' 는 그 생각 자체가 사연자분을 더 괴롭히는 건 아닌가 라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한 마음이 없어져야만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있으신 건 아닌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대해서 '지금 내가 어찌할 수는 없다, 이 마음을 갑자기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역시 우리는 온전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이루어지지 못하는 욕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삶의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이것은 꼭 이루어져야 하는데, 왜 그러지 못할까' 라는 인식이 시작되는 순간 그 보편적인 현상은 아주 특이적이고 개인적인 내 삶의 문제가 됩니다.
사연자분의 마음의 평안과 소중한 일상은 해결되지 않는 마음을 사라지게 하였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닐 지 모릅니다. 현실에서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 평안한 일상이란, '해결되지 않는 마음도 존재할 수 있다' 는 관념으로 그 마음을 그대로 안은 채 살아가며 일상을 소소하고 소중한 것들로 채워갈 때 서서히 찾아오지 않을까 합니다.
마음과 삶을 바라보는 조금은 다른 관점을 전해드립니다. 처음부터 깊이 와닿진 않더라도, 당장의 불편한 마음을 사라지게 해드리기는 어려울 지라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만 같은 그 마음에 작은 영감을 전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