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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Dec 31. 2018

찬란하지만은 않았지만, 잘 읽었어.

올해를 덮고, 새해의 페이지를 넘기는 마음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저작권 문제로 거리에 캐롤이 흐르지 않는다. 지적 재산은 분명 보호받아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다. 예고편에 한껏 기대를 했다가, 막상 영화를 보며 맥이 빠진 적이 있는지. 실망한 영화를 보듯 일 년을 보내다보니 언젠가부터 징글벨이 울릴 땐 마음의 준비를 했다. 곧 아쉬운 올해의 마지막 밤이 온다. 애잔한 기쁨이다.      

  

  아기 예수가 새해가 되기 직전 세상에 내려온 것은, 연말의 아련함을 축제의 화려함으로 덮으라는 하나님의 배려일까. 한 해가 저문다는 것이 그저 새로운 시작의 기쁨, 다음 단계로의 발전만이 아님을 보낸 햇수가 쌓일수록 느낀다. 크리스마스의 여전한 설렘과 함께 찾아오는 먹먹함이 해가 갈수록 짙어진다.     

  

  어린 시절에는 연예 대상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한 해 노력해 차곡차곡 쌓은 결실을 수확하는 사람들. 내년에나 유행할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차려 입고,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올해만큼의 성과를 이루었음에 눈물을 흘린다. 성심껏 노력하고 매해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축복하며 더 나아갈 다음 해를 기다리는, 삶이란 저런 것이지. 묘한 벅참으로 텔레비전 속 사람들과 새해 첫 카운트다운을 세곤 했다.  

  

  그런데 해가 가다 보니 감정선이 달라진다. 어쩐지, 시상식의 감격 보다 식이 끝나고, 티비가 꺼지고, 불도 껐으나 잠은 들지 않을 때의, 그 적막에 마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작년 같이 올해가 갔고 내년도 갈 것이다. 크게 달라진 것도 달라질 것도 없이 살고 있다. 아니 흐르고 있다.      

  

  홀로 차분히 마음을 다독이려 하나 스마트폰의 불빛이 적막을 헤집는다. 방송 시상식의 불은 꺼졌으나 타인의 시상식은 끊임없이 번쩍인다. 2초 남짓 손가락으로 넘기는 시간 동안 보여줄 근황을 선택하라면, 모두들 그간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만을 고른다. 타인의 파편으로 상상하는 그의 삶은 화려하기만 하고, 내 삶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진다.     

  

  소설로 비유하자면, 내 삶은 상투적인 도입부를 반복중인데, 타인의 삶은 절정으로 가득해 보인다. 인생을 끊임없는 스릴과 반전, 클라이맥스의 순간만으로 채워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유령처럼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평온 속에 고요히 머무르는 때 마다 유령은 귓가에 속삭인다. ‘뒤처지는 중 같다, 도태되는 중이다, 이대로 행복할 수 있을까, 이대로, 괜찮은 걸까.’     

  

  끝부터 읽는 소설은 없다. 어떤 결말이 있을지, 어떤 사건이 있을 지는 읽어 가야 알게 된다. 모든 페이지가 환희로 가득한 것도 아니다. 절정은, 말 그대로 전체 이야기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찰나이기에 절정이다. 나머지는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무던한 일상으로 채워진다. 우리네 삶이다.     

  

  소설의 카타르시스는, 등장인물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 절망, 의미 없어 보였던 사건들이 절정을 위한 단계였음을 깨달을 때 밀려온다. 삶의 감동은, 흔한 일상, 실패의 아픔, 실연의 상처가 그 순간을 위한 복선이었음을 깨달을 때 벅차 온다.

  

  그리고, 아련한 문장들은 서사와 상관없이 여러 페이지 곳곳에 숨어 있다. 그렇게 찾아낸 글들이 액자처럼 마음에 걸린다. 그처럼, 찬란한 기쁨만큼이나 조용한 일상에서 문득 느낀 행복이 추억이 되어 오래도록 마음을 울린다.     

  

  뒤처질까봐 두려울 때, 물러섬과 돌이킬 수 없음이 동일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세상의 기준을 급히 가져와 자신을 견주어 본다. 성공은 과시하고 싶어 진열된다. 우월감이 본질인 흔적들과 평범한 일상을 비교하는 것은, 소설의 나른한 도입부를 읽으며 다른 베스트셀러의 절정의 순간과 비교하는 것과 같다. 지금의 자신이 충분치 않다는 느낌과, 한 해 동안 쌓은 시간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비슷한 듯 다르다. 외부로만 향하는 시선을 내면으로 옮기면 내 삶의 흐름이 보인다. 실패했다, 지체했다, 헤맸다, 그르쳤다... 대외적인 성과를 평가하기 위한 가벼운 단어들로는 도저히 설명하지 못하는, 나만 막연히 느낄 수 있는 오늘의 의미가 있다.     

  

  텍스트를 외우기만 하는 마음공부는 참 공허하다. 이 학문은 내 삶과 닿아야 비로소 살아난다고 느꼈다. 그로써 부족하나마, 다른 이의 아픈 마음에 건넬 수 있는 나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그 접점은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순간들이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실연, 갈등 ... 한 편의 작품으로 탄생하기에는 극히 평범한, 부끄럽고 못난 순간들이 비로소 반짝였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었을까, 그 덕으로 조금 더 어려운 이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허망하다 생각했던 그 순간들이 그런 의미로 다가올 줄, 그 순간을 지날 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허전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아직 삶이 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무하게 흘렀다 생각한 지금과 지금이 불현 듯, 그런 의미였구나, 그래서 그 시간을 보냈었구나, 하고 연결되는 날이 올 것이다. 오늘이 무슨 의미였을까, 이번 일 년이 무엇을 위한 시간이었을까 의문이 든다면, 소설의 페이지를 넘기듯 다음 삶의 페이지를 준비하면 어떨까. 등장인물을 복기하고, 그들이 했던 말을 되새기며 다음 내용을 읽어가듯, 오늘 내게 주어진 일에 성심을 다하고, 지금의 내 모습과 마음을 되새기면서.    

  

  아쉽게도, 대단한 반전은 아직이다. 핍박받는 주인공은 언제쯤 역전의 카운터를 날릴 수 있을 까. 다음 페이지에는 나올까. 답은 아무도 모른다. 미우나 고우나, 어쨌든 삶은 한 번만 넘겨볼 수 있다. 정해진 결말을 향해 그저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소설책과는 달리, 삶은 그 속에서 직접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운명 같은 아름다움이 기록되는 것이 내일일지, 내년, 10년 뒤의 페이지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올해의 일상, 아픔, 기쁨과 좌절이 무의미한 에피소드로 끝날지, 아니면 복선일지 역시 삶의 절정과 결말에서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굳이 일 년 치의 삶만을 잘라 돌아보며 허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올해의 페이지를 넘겨야 하는 시간이다. 당신과 나의 다음 페이지에 행복과, 행복과 닮은 것 혹은, 행복과 닮아갈 것이 쓰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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