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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Sep 27. 2023

죽고 싶은 마음에서 바닷바람을 읽어내는 것

소중한 순간을 엮어가는 순간들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정신건강의학과]



한 사회 초년생 환자가 휴가 차 바다가 있는 도시에 들러 요트를 탔다고 했다. 엄청 비싸지 않느냐 놀라서 반문했더니 단체 관람으로 타면 1인당 2만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데, 그것도 소셜 커머스 특가를 이용하면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선생님도 꼭 타보시란다. 막 여름과 헤어진 초가을 밤을 바다 한가운데서 맛보는 그 느낌이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로 상쾌했다고 했다.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는가.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꾸준히 일을 하는 중이다. 글에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으나 20여 년 이상 이어진 가정학대의 아픔에도 무릅쓰고 하루 하루를 내딛고 있다. 진료를 시작하고 반년 내지는 한 해 동안을 그와 나는 꼬박 죽음을 생각하는 일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이 정도면 그 순간이 충분히 특별하지 않을까.





그는 삶 내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가족 그리고 사회로부터 그가 어떻게 문제투성이 인지를 반복해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는 삶을 이어갈 힘도, 그래야할 이유와 의미도 모두 고갈된 상태였다. 그런 그가 이번 직장에 안착하는 과정이 녹록치 않았던 것 역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 그리고 관계의 단절이든, 업무의 실패이든 그러한 믿음을 공고히 할 만한 반복되는 좌절들.. 너무도 그 마음이 찾아온 과정이 이해가 되었기에 단지 그 마음을 함께 이해하고 위로하였고, 수용과 전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왔다.


대단한 면담이나 치료랄 것은 없었으나 자부심이 한가지 있는 부분이 있다면 내가 정신과의사로서의 경험이 일천할 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종종 저질렀던 실수인, 어줍잖은 심리적 범주와 개념으로 타인을 낙인찍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컨대 '이건 과거의 트라우마가 참 깊고 경계성 인격장애에 가까우니 (그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비유다) 안타깝지만 치유가 잘 되진 않겠다.' 따위의 생각을 속으로 품고서는 겉으로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짓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절망만이 가득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어야 할 지 막막한 그 시간들 가운데에서도, 아직은 찾지 못했지만 그가 그만의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놓치 않았다.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예측이 아니라 믿음이다. 비록 깊은 마음의 상처로 가리워져 있으나, 다가올 시간에 그가 소중히 여기는 순간들이 존재할 것임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당신이 아무리 죽고 싶다고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살게 하는 무언가를 위한 시간들을 쌓아갈 것이란 이야기를 꽤 긴 시간, 계절이 너댓 번 이상 바뀌는 동안에도 놓은 적이 없다.


그런 그가 취직 후 첫 휴가를 다녀오고, 손품의 정성을 더하여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초가을 밤 바닷바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바다 근처 출신인 나의 고향의 향수를 자극하는 그 느낌을 전해 받을때의 나의 마음을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상상할 수 있을 지. 늘 회피, 절망, 죽음으로 시선이 가 있어 닿을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었던 이야기가 비로소 그에게 닿는 느낌.


그는 살아 있으니까 이러한 느낌도 느낄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지만 그럴 때는, 아주 어릴 적 오랫동안 홀로 짝사랑하던 이가 비로소 내 마음을 알아 주었을 때의 설렘과도 비슷한 기쁨이 속에서 차오른다. 정신과 의사의 보람이다.


그는 그렇게 그의 삶의 조각들을 모아 반짝이는 순간을 엮어냈다. 이는 아팠던 과거의 기억이 없는 것으로 되거나, 과거의 트라우마가 지금의 마음을 다시금 엄습해 올때의 버거움이 소멸되어 가능했던 일이 아니다. 여전히 앞으로도 그는 때때로 어찌할 수 없는 슬픔과 자책에 빠져들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엮어낸 순간의 의미, 그 순간에 머무를 때의 느낌, 살아있어도 좋고, 더 살아봐도 되겠다는 조그만 용기는 그간의 아픔 만큼이나 그의 마음 한켠에 깊이 자리할 것이다.





진료를 하며 이제 좋아지셨습니다, 혹은 좋아지실 겁니다 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좋아진다, 좋아져야 한다는 말이 지금 힘든 이들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며, 또 나아진 이들로 하여금 '다시 나빠질까봐' 얼마나 큰 두려움을 유발하는 지를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나도 다 힘들어 봤다, 마음 그거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고 이야기하는 주변인들, 이를테면 부모나 친척, 지인들이 실은 환자보다 더 깊은 병리적 상태인 경우도 흔히 본다. 좋아진다는 말 자체가 커다란 환상이자 착각이다. 그 말 아래에는 우울하고 불안한 것들이 소실된 상태, 미래에 어떠한 것들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상태가 정상이라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나 부처가 아니라면 도달할 수 없는 마음이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것이라는 무리하고도 오만한 전제다.


자살에 대한 관점도 마찬가지다. 유명 방송에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며 통상적으로 사용하던 강의자료를 공유했더니, 늘상 써오던 '자살 사고, 자살 시도' 란 단어에 대한 수정 요청이 들어왔다. 방송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는 민감한 용어라는 것이다. 너무도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비극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대하는지가 함축적으로 느껴졌다. 우리의 일상에 흔하고 또 가까이 있지만, 애써 그러한 사실을 외면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군 부대에 있을 때 자살을 막기 위해 벽 한켠에 '늙어보면 그런 걱정 아무것도 아니여' 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던 것도 생각이 난다. 마치 한강의 다리 한켠에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 다.' 따위의 말장난을 붙여놓은 느낌과도 비슷하다. 그러한 문구들을 보면 '아하, 그렇구나. 내가 미처 그런 원리를 몰랐구나' 하며 그 깊은 슬픔의 마음을 되돌릴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지, 그 얄팍함이 씁쓸했다.


그런 생각 자체가 문제요 중병이니 이러한 생각을 어떻게 고쳐놓을까, 없앨까를 전전긍긍하는 접근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마음의 원리가 있다. 나는 진료를 하며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운 그 생각들, 마음으로 또 실제 생리적인 작용으로 압도하고 엄습해오는 고통들을 회피하거나 애써 좋은 말로 뭉개지 않는다. 단지 당신이 죽고 싶다고 이야기할 때, 그 마음을 통해 실은 어느 누구보다 살고 싶은 마음을 느끼고 찾아내려 한다.


'죽고 싶을 정도'로 무겁고 아픈 상처는 반대로 그정도로 간절한 무언가가 있어야 성립한다. 학대의 공포와 트라우마로 죽고 싶다는 것은 심지어 죽음을 통해서라도 간절히 평온과 안식에 닿고 싶다는 의미이다. 사랑의 배신으로 인한 상처로 죽고 싶다면 당신은 어느 누구보다 진솔하게 연결되는 관계를 갈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궤변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당신과 내가 엮어갈 수 있는 순간들의 실마리를 찾들어찾아 낼 수만 있다면.





진료의 초기에 나는 그에게 솔직히 이야기했다. 당신이 죽고 싶은 그 순간의 마음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없을 지도 모른다고. 당신이 경험했던 일들을 없던 일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단지 나는 우리가, 가장 끝에 선 그 고통 속에서도 앞으로 당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면담이 깊어지며 그와 내가 찾아내고 또 합의한 지점이 있다. 대단한 성과는 없어도 좋으니, 사실은 그동안 그가 스스로의 생계를 온전히 책임질 수 있기를 바랬다는 것을. 또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가 행복할 만한 무언가를 추구해보고 싶었다는 것을. 사람이 그토록 두려운 이유는 과거로부터 쌓여온 타인으로부터의 상처 재현될까 두려운 것이며, 이는 사실 그러한 두려움을 넘어 편안하고 무난한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지극히 당연한 소망 때문이라는 것을.


직장도 다니고, 새로 만난 지인들과 가까워지며 그들과 특별할 것 없는 주말을 함께 보내는 시도를 하는 것은 그러한 의미와 소망을 삶에서 구현해보는 수많은 시행착오들이었다. 그런 것들이 잘 되어야하는것이 아니라, 그러한 소망을 외면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고 더디더라도 그에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내는 것 자체로 이미 기적의 완성이다. 그런데 그 기적이 밤바다 위에서 사람들과 함께 바라보는 밤하늘의 풍경이라는, 소박하지만 비현실적인 순간까지 엮어냈다. 앞으로도 그러한 순간들을 엮어내고 그 속에서 머무를 수 있다면, 그 순간의 느낌을 행복이라 이야기해도 되지 않을까.





그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순간이자 또 모든 사람에게 허락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소중한 순간을 엮어가는 순간들'. 이것이 결국 취업에 성공했으니 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나는 그럴 수가 없다고 누군가가 물어올 수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나는, 만약 아직은 허락되지 않은 취업이 가능해져져 첫 월급이 주어진다면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물어볼 것이다. 그 때 떠오르는 장면들 속에서 그가 오래 잊고 있었던, 그가 사랑하는 순간들과 의미들을 짚어낼 것이. 그리고 그 의미, 사랑하는 순간을 엮을 수 있는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제안할 것이다.


그렇게 진료실에서는 도시에서 이름만 대면 모든 이가 아는 사업체로 성공했지만 실은 가족간의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청년, 주위에서 모두 부러워하지만 쇼윈도 부부 생활로 고민인 아내, 단 한번도 원하는 선택을 해보지 못하고 부모의 강요로만 평생을 살아온 학생, 양눈 옆이 가려진 채 경주마처럼 달려오다 문득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 중년의 남성.. 이질적이고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같은 과정을 함께 한다. 지금 내게 허락될 수 있는, 혹은 가장 추구하고 싶은 순간을 함께 떠올리고 또 이를 엮어 간다. 비유도, 면담 기법도, 약물도 그것들을 쌓아가는 도구일 뿐이다.




자살사고가 심하시군요, 우울증이 깊어요, 약을 잘 챙겨드시고 운동하셔서 나으셔야 합니다, 라는 메시지로는 쌓을 수 없는 의미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가 없다면 왜 소중한 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의 풍경을 함께하는 사람과 혹은 홀로 바라보는것, 그 순간 볼을 스치는 바람의 감각과 구름의 흐름을 느끼는 것, 그 순간에 온전히 있음을 자각하는 것.. 언어화 할 수 없는 찰나의 소중함들이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순간들을 그려가거나, 혹은 문득 지금 그러한 순간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연속이다.


당신의 '그러한 순간' 은 어떤 것일지를 상상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리고 앨범에 차곡차곡 사진들을 담듯 그 상상들을 현실로 엮어가보길 바란다. 그러한 순간들을 위해 살아간다, 견뎌야 한다는 거창하고 부담스러운 생각까지는 필요치 않다. 다만 살아서 이러한 순간도 경험해 볼 수 있어 나쁘지 않다, 다행이다 라는 느낌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P.S.

그가 그 장면을 내게 말하는 그 순간이 내 삶의 순간으로도 엮여 내 기억의 한 켠을 장식했다. 쌓인 진료의 피로, 때때로 직업적 회의감이 드는 순간, 살아가며 느끼는 공허함 같은 것들도 그 때 만큼은 아무래도 괜찮게 느끼게 해 주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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