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나의 위기가 아니라, 타인의 불안일 뿐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그녀는 숨쉬듯 그녀의 문제를 지적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왔다. 성적이 전교 5등을 하면 1등이 아니라서, 바라던 대학에 입학하면 더 좋은 학교를 간 지인이 있어서, 남편이 엄마 친구의 사위보다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끊임없이 그녀를 비난하거나 걱정했다.
어릴 적 그녀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토록 미워하고 멀리하고 싶던 어머니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 받을 것이란 두려움이었다. 그녀는 늘 최선을 다해 어머니를 만족시키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어머니의 비난을 잠재울 수 없을 때는, 그러한 비난이 어떻게 비논리적이고 또 부당한 것인지를 악다구니를 쓰며 반박하기도 했다. 자신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한, 달리 말하면 버림 받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준은 높기만 했다. 좋은 대학을 가면 좋은 직장을, 괜찮은 직장을 구하면 만족스러운 배우자를, 기껏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 손자의 우수한 성적을 원하는 어머니의 갈구는 충족되는 법이 없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언니, 오빠들은 고스란히 그러한 성향을 답습하였고, 어머니는 어떤 면에서든 좀 더 나은 자식을 노골적으로 편애했다. 그들과 그녀는 늘 암묵적으로 성적, 배우자의 직업, 부의 정도 등으로 서로 경쟁하고 또 서로를 시기했다.
가족들과 보낸 유년시절로 인한 영향력은 단지 그녀가 가족들과 함께일 때 만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자신을 얕잡아보거나 미워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완벽하게 해 내지 못하면 미래에 재앙이 닥 것만 같은 압박감, 아무리 발버둥쳐도 편안한 마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절망.. 누적된 불안은 끝없는 변주로 그녀를 괴롭혔다.
이렇게 힘든 이유라도 찾아야지만 겨우 버틸 수 있을 것 같을 때 우리는 삶의 의미를 고민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마음으로 시작된 고민이 유의미한 삶의 의미를 도출해내는 것은 무리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이 불안하고 지치는데, 왜 그래야 하는 지에 대한 이유를 찾을수 조차 없다는 허무와 절망감이 그녀를 진료실로 인도했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기만 하여 돌아보지 못했던 소중한 순간들을 새삼스럽게 그녀의 일상에서 긷기 시작했다. 자신의 삶을 맞바꿔도 아깝지 않을 아이, 초조하게 흔들리는 그녀를 긴 세월 동안 늘 지켜봐주고 지지해준 남편, 그런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주말의 시간.. 스스로의 삶이 잘못되었거나, 잘못될 예정이라는 인식 속에서 지내면서는 돌아볼 수 없었던, 실은 삶의 본질과도 같은 순간들이었다.
그녀의 가족들이 그녀를 대하는 방식과 가치관을 바꿔줄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는 없었다. 다만 그녀가 적어도 가족들과 캠핑을 하는 천금같은 주말 시간 만큼은 그 전날 그의 어머니와 통화한 내용을 끊임없이 반추하는 것을 멈추는 연습 부터 해 보기로 했다. 해결하지 못한 채무가 가슴을 조여올 때, 이를 보며 좀 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언니와 그녀를 어머니가 비교하며 한탄을 하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잘 살아가고 있는 지를 애써 항변하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단지 끊임없이 지금의 현재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러한 현재가 누군가에게는 숭고한 종교적인 목소리를 듣는 순간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한 번 뿐인 삶에서 꼭 이루어내고픈 성취를 추구해나가는 과정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한적한 바닷가 앞에서 느끼는 바닷내음의 여유에 빠져드는 순간일 수도 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지금의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이었다.
친정엄마와의 통화 이후 찾아드는 불안과 두려움을 애써 괜찮다며 억지로 다독이려는 대신, 그저 그 불쾌함과 불안을 그대로 그 날 저녁에 아이들을 픽업하며 나누는 대화에 몰입하거나, 혹은 주말에 모처럼 교외로 나갈 시간을 고민하기로 했다. 괴롭히지 말아달라는 절규 대신, '괴롭혀지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돌아보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진료실을 방문했다. 어머니가 가련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통화를 하고 만날때마다 불안과 압박, 반감을 쏟아내는 어머니를 보며 문득, 엄마는 단 한 번도 내가 주말에 가족들과 느끼는 느낌에 온전히 머무른 적이 없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나보다 두 배는 더 긴 세월을, 나도 그토록 못견뎌했던 불안 속에서 지내온 것이 나의 엄마구나.' 라는 통찰이었다.
어느 명절 날 가족들이 모였다. 늘 그렇듯 그의 형제 자매들은 자녀들의 학벌로, 새로 이사간 아파트의 시세로 은근한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걱정을 가장한 우월과 열등이 뒤엉키는 대화의 틈바구니에서 그녀는 빗겨섰다. 여전히 그 굴레에서 내려오지 못한 가족들과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는 그녀의 모습. 마치 한 발 물러나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관람하는 관객처럼 세련되게 느껴졌다.
더 이상 그녀는 구구절절 자신의 삶을 친정 가족들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오늘, 지금 여기에서의 그 자신의 삶으로 깊이 몰두해 갈 뿐이다. 그녀는 종종 '이런 느낌으로도 삶이 이어질 수 있네요.' 라 내게 이야기한다.
모든 면이 평균인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당신은 분명 어떠한 면에서 일반적인 부분을 벗어날 것이며, 그것은 제각각 다른 존재로 태어나면서도 사회로부터 배척받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러한 면에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은 모두 사회로부터의 이방인이다. 타인에게 조언을 할 때, 성숙한 이들은 이러한 본질을 되새기며 듣는 이의 입장에서 어떤 것을 시도해 보고 또 개선할 수 있을 지를 함께 고민하는 관점으로 이야기한다. 자신의 삶에 충분히 만족을 하고 또 그에 몰입하는 이는 구태어 자신의 잣대로 타인을 재단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안한 이들은 자신의 시각으로 보면 무엇이 잘못되어보이는 지를 타인에게 이야기하며 자신의가치관에 타인이 동화되기를 강요한다. 인간은 타인이 자신이 떠올리는 행복의 도식에 벗어나 있을 때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삶과 가치관에 의구심과 불안이 가득한 이들은, 그 흔들리는 불안과 초조를 타인에게 투영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잘 살아가고 있는 지를 확인하려 한다.
예컨대 어떤 이가 인생은 돈이 전부라 생각한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도식을 강요하고 싶어지고, 권력이 전부라 생각한다면 타인도 그가 소유한 사회적 지위에 대해 압도되기를 바란다. 같은 원리로 애매하게 좋은 학교를 나온 이들이 조카의 대입 결과를 묻고, 가족 간의 갈등으로 힘들지만 꽤 많은 연봉을 받고는 있는 어른들이 취업 여부를 집요하게 캐묻고 또 훈계한다. '너는 나처럼 생각해야 해, 이것이 맞는 인생이야' 라는 편협한 시선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당신을 비난하거나 당신의 삶을 부정할 때, 그에 대해 무작정 논쟁하거나 분노하기에 앞서 당신에게 그러한 관점을 전달하는 이의 기저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를 먼저 헤아려 보기를 제안하고 싶다. 그들의 불안이므로 당신이 대처할 것은 없다. 단지 그 이야기들 속에 논리적으로 통찰을 주어 거둘 것이 있다면 감사히 거두고, 그렇지 않고 나의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당신은 나를 충분히 알지는 못하시는 군요.' 라 속으로만 생각하고 쓴웃음을 지을 뿐이다.
당신보다 결코 당신의 삶을 잘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당신의 삶이 펌훼받고 있다면 단언코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은 그의 불안이라고. 완벽할 수는 없으나 나름대로의 최선을 이어가는 당신의 삶을 함부로 누군가가 재단하여 어떻게 문제인지를 반복하여 강요하려 든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논쟁이 아니라 빗겨서는 용기다.
당신의 삶을 증명하거나 항변하지 말기를. 대신 당신의 삶과 당신만이 알 수 있는 행복의 원리를 추구해 보기를, 그저 지금, 여기의 당신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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