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의미와 힘을 잃은 당신에게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장인어른은 팥을 좋아하신다. 경주 황남빵처럼 팥이 유명한 음식이 보일때는 종종 사다 드리는데, 그럴 때 마다 첫째 손에 들려서 전해드린다. '팥이 좋아 보여서 사 봤습니다.' 라는 투박한 사위의 말 보다는 '할비 단팥빵 사왔어요~' 라고 손주가 직접 안겨드리는 빵 봉투가 훨씬 달가우시지 않을까 하는 아내의 생각이었다.
몇 번 그랬더니 어느 순간부터 처가에 갈 때 마다 첫째가 '할비집 갈때는 단팥빵 사가야 해.' 라고 먼저 말한다. 아이의 마음 속에도 '외할비(외조부에 대한 아이의 애칭)' 가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귀여운 정성과 센스가 싹튼 모양이다.
때때로 피치 못하게 귀한 주말 동안을 아이를 맡아 주시라 부탁하는 것과, '할비 단팥빵 드세요~' 라며 빵봉투를 안고 다섯살박이 손주가 찾아오는 것은 다른 느낌일 것 같다. 그 정도 애교로 감히 그 노고에 대한 감사를 온전히 되돌려드릴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같은 상황이라도, 일상에 작은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더할 수 있는 세심함과 배려에 대한 이야기다.
무뚝뚝한 집안 내력 상 결혼 전의 나는 이런 사소한 배려를 챙기는 센스가 너무도 부족하고 또 어색했다. 그에 비해 아내는 이러한 부분에 대한 애살이 남다르다.
아이들이 어려 뾰족하고 딱딱한 트리로 크리스마스를 장식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아쉬웠다. 그래서 코스x코 가서 소품이라도 몇 개 사볼까 이야기를 꺼냈었다. 아내가 알아서 하겠다고는 이래저리 찾아보더니, 이브날 밤 대뜸 풍선을 불라고 했다.
지팡이 같은 기둥 풍선과 머리띠 같은 나뭇잎 풍선들을 차례차례 합체하니 훌륭한 트리가 되었다. 아이들이 아무리 만지고 그 위로 넘어져도 전혀 다치지 않고 안전하다. 뜨개실과 부직포로 만들어진 메리크리스마스 가랜드 (이 용어도 결혼하고 처음 알았다)에서는 포근함이 물씬 배어난다. 베란다 창에 문구와 루돌프 얼굴을 붙이고 풍선 트리와 산타 풍선을 곁에 두니 10여분 만에 훌륭한 파티룸이 되었다.
같이 주문한 루돌프 머리띠를 아이들에게 씌워 주고 사진을 찍는다. '동생 손 잡아줘~' 라고 어른들이 이야기를 하니 서로 안아주고 뽀뽀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 거실 가득 크리스마스가 내린다. 돌아오는 기쁨과 행복에 비해, 요즘 물가를 생각한다면 여기에 든 비용과 수고는 너무도 사소한 것이다.
추석 연휴 때 코로나 이후 첫 해외여행을 일본으로 다녀왔다. 이후로 일주일 만에 계란을 후라이로 20개는 구워먹었고 그만큼 체중도 증가했다. 범인은 여행가서 사온 달걀 전용 간장과 나만의 비법양념이었다.
평소 나만의 비법양념이 있는데 바로 참기름 + 맛소금 + 후추다. 육회를 너무 좋아해서 여러 맛집을 먹어보고 인터넷 레시피를 보며 나름대로 분석해보니 많은 양념 필요없이 참기름 + 맛소금 (msg가 포함되어 있어 매우 중요) + 후추면 충분했다. 우둔살을 육회용으로 잘라 (사먹는 육회보다 배 이상 싸다.) 이렇게 양념을 하여 먹었더니 충격적으로 맛있었다.
소고기 뿐 아니라 그냥 밥을 비벼 먹어도 좋고 돼지고기를 구워 찍어 먹어도 맛있다. 원래 간장계란밥을 정말 좋아해서 일주일 내내 먹으래도 가능할 정도였는데, 갑자기 이 비법양념이랑 계란전용 간장을 조합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맛소금으로 msg를 보충하여 기름을 많이 둘러 튀기듯 계란을 구워냈다. 흰자는 타기 직전 수준의 노릇함이지만 노른자는 절반 정도의 반숙 상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라이 스타일이다. 밥에 올리고 노른자를 터트리면 함께 어우러지도록 간장도 노른자 주위에서 흐르게 뿌려준다. 참기름을 두르고 마지막에 충분히 향이 날 정도로 생후추를 그라인더(그라인더는 다이소에서 2000원, 통에 든 후추보다 국내 업체들도 파는 열매후추가 대량으로 구입하면 더 싸다. 후추 원가가 워낙 싼 탓에 가공 포장비가 더 비싸서다.) 에 갈아 뿌린다.
눈감고 먹으면 타마고 간장을 산 일본 온천 여행지 근처의 풍경이 떠오른다. 마치 간장계란밥만 100년 팔아온 아주 오래된 일본의 노포에서 먹는 듯한 착각이 주는 만족감과 감칠맛이 밀려온다. 한 번에 네 개를 구워도 식사 시간이 너무도 짧아 아쉽기만 하다.
얼핏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들, 없어도 당장 살아가는데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디테일들이다. 먹고 살기 팍팍한데 트리 없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면 어떤가. 처가에 굳이 귀찮게 팥 빵을 사가지 않아도, 그걸 누가 전해드려도 먹고 사는데 무엇이 문제일까. 간장계란밥 따위 간편하게 먹으려고 하는건데 뭐가 그리 거창한지, 바빠 죽겠는데 대충 한끼 때우면 그만이지 않을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상관없음', 조금 더 풀어 이야기하면 '작은 것들에 대한 냉소' 야 말로 행복으로 가는 길목의 함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위로하는 것들은 늘 작은 것이나, 인생의 큰 것들을 이어가는 압박과 두려움은 우리가 그들과 접촉하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당면한 문제들이다. 입시, 구직, 결혼, 육아, 자녀교육, 건강, 노후대비 ... 그 막막한 삶의 쳇바퀴 속에서 우리는 작은 행복 따위는 허락할 여유가 없는 압박을 느낀다. 사소한 기쁨 같은 건 사치, 배부른 순간이 된다. 아직 내게 그러한 순간은 이르다, 나는 자격이 없다, 그런 감상에 빠질 틈이 없다며 우리의 불안은 끊임없이 우리를 몰아세운다.
나를 찾아오는 이들은 이러한 삶의 외줄타기에서 떨어져 마음을 다친 이들이다. 그런 그들을 치유하는 건 대단한 것들, 엄청난 인생의 반전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래도 살아야지, 하고 손을 잡아주는 언니의 따뜻한 손, 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눈빛 같은 것들이었다.
이러한 형태의 행복담론은, 그런 것들을 느끼고 추구할 만큼의 여유가 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비웃음받기 일쑤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힘들면 내려놓으면 된다, 여유만 가질 수 있으면 인생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감상론으로도 결코 빠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충분히 치열하다. 수험생들은 공부를 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고, 직장인들은 스스로의 미래, 혹은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서 하루의 대부분을 하고 싶은 일 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하며 보내고 있다. 다만 정말로 치열하게, 더 할 나위 없이 최선을 다하더라도 삶은 우리의 기대와 노력을 곧잘 배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고, 살아내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이 왜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분석, 무엇을 더 치열하게 해 나가야할 지에 대한 노력 담론이 아니라 우리의 최선을 이어갈 힘과 의미였다. 꾸준히 살아 나갈 수만 있다면 또 다른 시기가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막막한 그 때 그 때 마다의 최선을 묵묵히 이어갈 수 있는 의미와, 하루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먹고 살기 팍팍할 수록, 사회가 말초적이고 배금주의적인 가치를 지향할 수록 곧잘 냉소받고 천대받기 일쑤인 디테일들이 내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삶의 의미요 힘이다. 아마도 당신의 일상 속에도 분명히 녹아 있을, 그러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버릴 사소한 소중함들이다.
돌이켜보면 '이제는 앞으로 걱정할 것 하나 없으니 마음껏 행복해도 돼' 라는 순간은 살아오는 내내 단 한 번도 없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고민하던 것들이 생각대로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행복으로 이어지는 경로는 직관적이고 본능적이나 우리의 삶에 존재할 수 없다. 애초에 우리의 마음은 이만하면 되었다는 지점에 도달하는 데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쾌락은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것들에 대한 보상 자극이기 때문에, 유발될 수록 오히려 큰 자극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행복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형성된 우리의 본능은 늘 삶의 소소한 기쁨 보다는 불안과 고독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욕구를 무한히 충족시키는 형태의 행복' 이 어려운 이유다.
그렇기에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부,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힐 필요가 없는 압도적인 권위, 만나는 사람마다 대단하다고 우러러봐줄 만한 명예 같은 것들을 통해 행복해지기 어렵다. 그럼에도 매스컴과 SNS는 그런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극소수의 사람들과 삶이 마치 보편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치라 이야기한다. 행복이란 그런 것들을 이룬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사치로 이해되면서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는 늘 결핍을 느끼며 산다.
부의 축적, 도박이나 성적자극과 같은 행위, 술이나 마약같은 물질들을 통해 공허함과 불안을 일시적으로 잊고 만족을 추구함에는 한계가 없다. 이전에 경험한 자극이 크고, 일시적인 고독으로부터의 도피가 홀가분했을 수록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고통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먹고사는 걱정은 하나도 없을 유명 스타나 재벌가 자제들이 한강이 보이는 멋진 거실 한 구석에서 마약을 하고 말초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삶의 형태. 그것이 이 사회의 철학이요 지향점은 아닐지 섬득할 때도 있다.
나는 그보다 좀 더 보편적이고 사소하며 지속 가능한, 그러나 어느 무엇보다도 따뜻한 형태의 행복과 위로를 제안하고 싶다.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닌, 그러나 스스로의 삶을 아끼며 들여다볼 약간의 관심은 필요한 것들. 그렇지만 이를 추구하기 위해 생업을 내려놓거나 애써 긴장을 풀어야 할 필요 까지는 없는 것들, 잠깐의 관심과 수고로도 얼마든지 더 큰 의미로 돌아오는 것들이다.
어차피 전할 단팥빵이라면 아이가 전해드리도록 센스를 발휘하는 것, 일년에 한 번 돌아오는 크리스마스라면 풍선 트리를 주문하는 것, 간장 계란밥 하나에도 여행지의 풍경을 떠올릴 수 있는 간장을 넣고, 아무데나 뿌려도 되는 후추를 그라인더로 가는 운치와 향을 기억하는 것. 그 정도가 나에게는 딱 맞다. 누구에게도 추천할 수 있고, 누구와 나누어도 부담이 없는 기쁨들이다.
바람이 있다면 아이들도 그러한 행복을 알게 되면 좋겠고, 그런 작은 것들의 힘과 의미를 기억하고 나눌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다. 나아가 망상적인 수준의 이상이지만, 이러한 소중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나와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좀 더 따스함으로 가득해지면 좋겠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는 상투어의 유래는 불분명하지만, 업무나 관계에서 디테일한 것들을 놓치면 사소한 일로도 큰 재앙이 유발될 것만 같은 압박과 두려움이 담긴 문장이다.
그런데 그 근원이 '선한 신은 디테일에 있다' 라는 서양 속담이라는 것을 아셨는지. 그냥 지나쳐도 아무 문제 없는 것들, 바쁜 삶에 쫓기다보면 잊기 쉬운 작은 소중함과 재미들,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는 사소한 노력들이 너무도 크고 깊은 감동으로 돌아올 수 있는 진리를 담고 있는 이야기다. 악마 뿐 아니라, 행복을 선사하는 천사도 디테일 속에 있었다.
야간 진료 날, 조금이라도 환자가 밀리면 면담을 하는 정신과 특성상 1시간 오버타임도 훌쩍이다. 10시가 다 되어 귀가하는 날도 흔하다. 환자도 직원들도 지쳐 미안함에 원장은 늘 애가 닳는다. 정신없이 진료를 마치고 나면 온 몸에 남은 기력이 하나도 없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시간이 늦어 전혀 생각지 않았는데 날씨가 춥다는 이유로, 아내가 두 아이의 옷을 챙겨입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10분 걸을 거리를 차로 애들을 태워 데리고 왔다. 두툼한 패팅에 곰돌이 모자를 쓴 큰 아들을 안으니 온열 기능이 있는 솜이불에 몸을 묻은 듯한 포근함이 밀려온다. "사랑해, 훈이도 아빠 사랑해?" 라고 묻는 말에, 딴에는 제법 컸다고 쑥쓰러워하면서도 "사랑ㅎ~"라고 말을 흘리는 아들의 콧망울이 새삼스레 너무도 귀엽게 둥글다.
태어날 때 부터 늘 내가 재웠던 딸은 새벽녘 잠이 깰때면 아빠의 손을 찾는다. 그 감촉과 정수리, 발의 냄새, 부위별로 다른 꼬순내면 오늘도 기꺼이 출근할 힘을 얻는다. 이렇게 오늘도 나는, 일년이고 십년이고 꾸준히 삶의 무게를 견디게 하는 천사를 만났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올해의 카톡 프사들을 본다. 누가 들어도 대단하다 할 만한 성취 같은건 없다. 다만 장면만 봐도 그날의 계절과 시간, 온도와 목소리, 그 전날 있었던 일 까지 고스란히 떠오르는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있다. 이 순간 만큼은, 그 찰나 만큼은 살아있어서, 그러한 순간들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시간들이었다.
나는 삶을 그러한 기억들을 쌓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새해에도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또다른 그러한 시간들을 마주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오늘만큼의 어른으로서의 고민과 노력을 이어갈 것이다. 고통을 잊거나 버티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애써 삶을 긍정하기 위한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순간들 자체가 삶의 본질이었고, 삶의 고단함 역시 그러한 순간들을 만나러가는 과정이었다.
죽기전에 삶을 돌아본다면 어떤 것들이 떠오를까. 아마도 이 사소한 순간들이지 않을까. 삶에 그러한 장면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이들을 만나고 사랑할 수 있어서 이번 생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올 한 해 당신에게는 어떤 순간이, 그래도 살아있어 좋다는 느낌을 선사했을까. 그 속에 당신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와, 고된 삶을 이어갈 힘이 있었을 것이다. 조금의 관심을 기울여야 만날 수 있는 순간들. 새해에도 그러한 당신만의 '디테일의 천사' 가 자주 깃드는 일상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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