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낱말들 (4)
신간 북토크를 다녀왔다. 겨울날 남쪽 지방에 살다 서울역에 내리면 미묘하게 더 춥다.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은 아직 일상의 연장선 같다. 기차에서 내려 서울의 서늘한 공기를 들이쉬면 비로소 반나절 짜리 일탈의 시작을 실감한다.
여행이든, 모임이든, 강연이든, 학회든 서울까지 올 일이라면 보통 특별한 일이다. 그래서 서울에서의 이동은 대개 다음 일정에 대한 설렘을 동반한다. 서울역 특유의 삼중 에스컬레이터를 중 하나를 골라 지하철역으로 하강할수록 기분은 들뜬다.
그 들뜬 기분을 처음 느꼈던 건 실습 차 명동의 학교 병원 찾아가던 20대 학부 때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4호선 지하철을 타러 걸을 땐 종종 그때의 기억이 난다.
서울에서의 추억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창덕궁 후원이다. 명동 성당이며 고궁들을 혼자 돌아다니다 이곳을 방문하고는 이곳만 몇 번이고 다시 찾았다. 처음 와 본 곳에서, 아주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그곳에 겨우 돌아온 느낌을 받았다.
학습부족에 대한 꾸지람과 인격 모독의 경계가 모호했던 몇 전공의나 교수들의 질타에 지칠 때면 이곳을 찾았다. 계단이며 난간에 걸터앉아 부용지를 바라보았다. 나처럼 혼난 궁녀도 있지 않았을까, 연인 대신 상상의 친구를 벗 삼아 위로를 나누곤 했다.
그렇게 궁을 한 바퀴 걷고 궐 문을 나서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은, 올 때와 같은 길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느낌이 달랐. 손과 발, 어깨에 온기가 감도는 그 걸음의 느낌을 좋아했다. 해가 밝을 때 궁에 들어서 그 느낌을 얻고서는, 돌아가며 어스름한 노을을 보는 걸 좋아했다.
어리고 불안 가득했던 그때의 걸음과 그런 불안을 치유하는 것을 업으로 삼게 된 지금의 걸음이 포개진다.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는 것이 좋다. 새로운 오늘에서 익숙하고 그리운 때가 떠오르는 경험이 좋다. 여러 번 살 수 없는 우리에게 단지 허락된 것은 한 번의 소중한 순간을 여러 번 경험하는 것이다.
다시 떠올리기 위해서는 잘 기억해야 한다. 잘 걷는 것은, 잘 기억하는 좋은 방법이다.
하루 전체를 휴진해서 북토크만 소화하기는 아쉬웠는데 예기치 않게 인터뷰 일정이 추가로 잡혔다. 기자님과의 만남은 기대보다 좋았다. 글을 가까이하고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눌 수 있는 감정선과 마음의 속도가 있다. 그들은 삶을 차근차근 살고, 되새김질하고, 이를 단어를 벼려 표현한다. 그 속도를 이해하는 사람과의 소통이 좋다. 연락 주시고 책을 깊게 읽어주신 기자님이 감사했다.
그 기억을 되새기며 북토크에 나서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만남 이후 다른 만남을 위해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걸음은 대개 하나의 중요한 일에서 다른 중요한 일을 이어주는 가교다.
북토크를 위해 함께 책을 쓴 선생님들, 글을 모아주고 매만져준 편집자 선생님, 이를 세상에 알리려 고군분투하시는 마케터 선생님들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글을 좋아하고 글의 힘을 믿으며 힘을 모아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우리와, 그런 글과 우리를 아껴주시어 바람이 세찬 영하 6도의 날씨를 뚫고서 자리를 메워주신 독자분들. 애쓰지 않는 웃음과 공감, 따뜻한 위로들이 긴 시간 내내 유리창에 서린 김 처럼 자욱했다.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막차 즈음한 시간임에도 카톡알림이 계속 울린다. 찍었던 사진, 시시한 이야기, 가벼운 유머 아래 흐르는, 서로를 달가워하고 아끼는 마음들이 오르내린다. 내려가는 기차는 마무리하기 아쉬운 일탈의 끝자락이다. 내일 출근이 걱정되는 피로가 밀려오지만, 그럼에도 그 끝자락에 조금만 더 머물고픈 마음에 기차가 한 시간 정도는 연착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새벽을 걸어 역에 도착했었고, 자정께 다시 도착해 역을 걷는다. 오래 두고 보고 싶은 하루가 저문다. 잘 기억하고 싶을 때는 성큼성큼 보다는 차근차근 걷는 것이 좋다. 한 발 한 발 여유를 두고 깊이 디디며 발자국마다 기억에 남는 장면 하나, 문장 하나를 눌러 담아본다.
무심코 지나가는 기억도 곱씹으면 새로이 보이고 느껴진다. 체하지 않으려면 급히 먹지 않고 꼼꼼히 씹어 삼켜야 한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라면 꼭꼭 씹어 느끼고 이해하고 담는 것이 좋다.
걷는 시간은 기억을 되새기기 좋은 시간이다. 걸음은 기억을 정제한다.
P.S
후에 이 순간을 다시 떠올릴 그때는 언제일까. 나는 그때 어떤 걸음을 옮기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