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브라운

지극히 사적인 낱말들 (6)

by 아는 정신과 의사


맥모닝이라는 메뉴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걸 팔겠다는 걸까 싶었다. 제대로 된 패티며 소스도 없는 손바닥 만한 빵에 감자튀김도 주지 않는 구성. 외국에서는 몰라도 한국에서는 곧 사장되지 않을까 했다.


역시 다국적 기업의 석학 식품공학자와 일류 마케터의 안목은 다른가 보다. 이름도 생소했던 머핀과 베이컨의 조화가 생각보다 괜찮다 싶더니, 이제는 교외로 주말에 나들이를 떠날 때 맥모닝이 없으면 허전하다.


음료는 아이스커피 큰 걸로 변경, 마일리지도 적립하고 삼성페이로 결제하면 음식이 나오기까지 2분이 채 안 걸린다. 짭짤하고 바삭한 해시브라운과 담백하고 고소한 머핀을 꾸역꾸역 커피 한 모금 없이 다 먹은 다음, 일부러 참고 기다린 아이스커피 한 모금으로 목맥힘을 시원하게 내려버리면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 없다. 평소엔 간헐적 단식으로 저녁만 먹는데, 그래서 그런지 주말에 가족 나들이나 여행, 중요한 강연을 떠나기 전 일탈처럼 맥모닝을 먹는 것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빵봉투를 건네받으면 반드시 뜨거운 해시브라운 한 입을 먼저 베어 물어 그날 허락된 최선의 바삭함을 즐긴다. 갓 튀겨 나온 겉은 까실하고 속은 포슬한 것과, 한 김 식고 김을 먹어 눅눅해진 것은 아예 비교가 불가한 다른 음식이다. 그 빠삭함을 최고급 일식집의 튀김이 주는 관능과 구별할 수 있을지, 매 번 먹을 때마다 자신이 없다.




튀긴 감자의 바삭함이 내게 올 때까지의 허들을 생각해 본다. 커피를 라지로 바꾼 세트가 5천 원가량. 간식이라고 생각하면 비싸지만 한 끼 식사에 커피까지 따라오는 것으로 생각하면 상당히 합리적으로 보인다. 쉽게 쉽다고도 어렵다고도 이야기하기 어려운 가격이다. 맥도널드까지 이동할 수 있는 차량의 유지비나 대중교통비 까지도 모두 비용이다.


가격보다 높은 허들은 건강이다. 기름에 튀긴 탄수화물에 소금 간을 세게 한 것이니 혈당이나 체중, 혈압이나 신장기능에 유의해야 한다면 부담스럽다. 맥도날드까지 이동할 수 있는 거동 능력 자체도 너무 중요하다. 걷는 능력은 늘 당연하여 체감하기 어려우나 노년기에 접어들수록 삶의 질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건강의 요소다.


건강에 육체적 요소가 전부는 아니다. 건강한 수준의 식욕은 신체와 심리가 무언가를 지향하는 힘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식욕을 실제로 수행할 활력도 해시브라운을 만나기 위해 필요하다.


심지어 감자 작황이 좋지 않아 재료 수급이 안되어 갑작스레 판매가 중단되는 경우도 몇 차례 있었다. 흔한 해시브라운 하나에 쉽지 않은 허들이 잔뜩이다. 쉽다 착각하는 것들에 익숙함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이 실은 얼마나 어렵고 고마운 일인지.




진료를 하다 보면 인간의 몸이 얼마나 기구하게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부터도 4촌 이내의 직계 가족 중 암을 진단받은 사람이 벌써 다섯을 넘어가고, 그중 기대 여명이 한참 남은 이들을 잃었다. 진료실에서는 자주 갑자기 팔, 다리, 눈, 심장, 신장, 뇌가 고장 난 이들을 만난다. 저절로 고장 나기도 하고, 외부적인 충격의 후유증으로 고장 나기도 한다. 그 막막함에 압도될 때는 신의 멱살을 잡고 이딴 것이 당신의 설계인지, 그 의도는 무엇인지 따져보고 싶어진다.


그 앞에서 우울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의 진단기준을 읊을까, 약의 효능을 설명할까, 우울함에는 운동이 좋다는 권고를 할까. 내가 논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필사적으로 그들만의 해시브라운 한 입을 찾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어떤 것이 그런 특별함을 주는지, 그러한 것이 도무지 없다면 어떤 상상을 해 볼 수 있을지, 상상조차 어렵다면 상상이라도 할 수 있기 위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정신과 진료란 그 ‘한 입’에 대한 무한한 탐구다.


이런 면에서 나는 아주 집요하다. 각기 다른 이유로 우울하고 불안해해도, 그 우울과 불안의 필연적인 귀결인 ‘그러니 이제 저에게는 그딴 것들이 존재할 리가 없어요!’라는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1년이고 3년이고 그딴 것이 있겠느냐고, 있어도 무슨 소용이겠느냐고 환자가 반복하여 주장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종종 결국은 내가 이긴다. 그들은 절망을 딛고 기어이 구직을 하거나, 재활에 성공해 여행을 떠나거나, 인연을 찾거나, 스스로를 위해 요리를 만들어 먹거나 한다. 승리의 비결은 내가 아닌 그들에게 있다. 그래도 우리의 마음은 실은 사소한 행복을 좋아한다는 덕분이다.


반대로 나를 찾게 만드는 아픔은 대개, 그 사소한 행복이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버겁게 느껴진 나머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미리 두려워함에 있다. 혹은 추구하다 실패한 경험이 트라우마로 쌓여, 그래서 되지 않을 것이라면 원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 게 낫겠다는 오해에서도 기인한다.


그러니 부디 그런 위악을 부르는 거창한 것 말고 해시브라운 한 입 크기만큼만 떠올리고 먹어보자 한다. 첫 한 입이 어렵다. 그것이 두 입이 되고 머핀과 아이스커피로 이어지는 과정을 함께 하다 보면, 그다음은 순리대로 흘러간다.




내일 세상이 망한다면 굳이 사과나무까지 심을 필요가 있을까. 망할 날 새벽에 깨어나 허기를 느끼며, 모두 도망가고 점원이 없는 맥도날드에 들어서는 상상을 한다. 혼자 기름을 올리고 적당한 온도를 기다렸다가 갓 튀겨낸 해시브라운 한 입을 우선 베어 물 것이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이어질 것이다.


건강 문제든 경제적인 어려움이든 전 세계 기후변화로 인한 감자 작황의 문제든, 기어이 이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행복마저 뺏기는 날도 올 수 있겠지. 그때는 별 수 없이 그때 허락되는 또 무언가를 찾아야겠지.


어떡하겠는가. 지금은 해시브라운 한 입, 혹은 그만한 다른 무언가면 충분히 되었다. 이는 적당한 타협이나 포기가 아닌, 충분한 것을 충분하지 않다 오해하지 말자는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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