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함

지극히 사적인 낱말들 (7)

by 아는 정신과 의사


스마트폰도 없이 여행책과 지도를 가지고 여행을 다니던 시절, 책자에서 본 고성의 모습에 이끌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했다.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걷고 싶어 졌는데, 이유는 그냥 그러고 싶어서 였다 (이상하게 그냥 그러고 싶은 일들에는 이유를 대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보통 트램으로 이동하는 거리를 일부로 걸었다. 왕복으로 대여섯 시간쯤 걷느라 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성 이외 원래 들리려 한 명소들을 꽤 포기했다. 지금도 걸었던 거리의 이름이나 바라보았던 건물의 용도는 알지 못한다. 구태여 찾아보지도 않았다.


호객 없는 상인과 손님의 진지한 흥정 모습, 중세와 근현대의 건물 외벽은 그대로 유지한 채 현대적인 인테리어를 멋스럽게 살린 식당이며 카페 같이, 관광지스럽지 않은 정경이 좋았다. 한참 걸으니 작은 아치가 무지개처럼 반복되는 붉은 벽돌 다리가 나왔다.


그곳이 유독 마음에 들어 다리 곁 강가 벤치에 앉아 이것저것 썼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걸어 비로소 본디 목적지였던 보수되지 않은 성벽을 만났다. 허물어져 가는 모습을 그대로 둔 듯한 그 위에 서서 다시 지나온 강가, 다리, 거리를 보았다. 유럽 여행 중 기억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들이다.


그 외 몇몇 나라의 유명한 미술관, 성당, 박물관, 동물원 등지를 갔었는데 이름이나 인상에 대단히 남아있는 것은 없다. ‘난 그때 이런 걸 했어.’ 라 할 만한 것이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를 언어로 표현하면 대개 설득력이 없는 것처럼 거기까지 가서 뭘 했느냐, 왜 고작 그런 게 생각나냐 하면 딱히 할 말도 없다. 강가 벤치에서 썼던 글귀들이 꽤 괜찮았던 것 같은데 썼던 다이어리를 잃어버린 지, 뭘 썼었는지도 잊은 지 오래다.

단지 적당히, 아주 좋았다.


적당히 좋은 것도 나쁘지 않은데 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최선이 아닌 순간들에서 느끼는 정서가 있다.




최선의 여행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안락한 숙소와 침구, 화려한 발코니 전망, 질이 좋은 식재료, 온난한 기후, 덜 기다릴 수 있는 방법 같은 것들 일까. 익숙지 않은 경험이 주는 영감이 내게는 여행의 본질인데, 어떨 때는 좋은 것은 좀 뻔한 반면 불편함이 외려 다채롭다는 생각이 든다.


애써 나쁜 것을 찾겠다거나, 같은 돈을 지불하고 손해 보는 것이 좋다는 마조히즘이 아니다. 살면서 몇 번 없는 큰 출혈을 감수하는 가족 여행이라면, 특히 아이들을 동반한다면 몇 달 전부터 가구 모서리가 둥근 숙소, 가습기와 침대 가드의 사용 가능 여부, 무리되지 않는 이동동선과 교통편, 미리 예약이 필요한 액티비티를 알아보고 연령 제한까지 확인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단지 평생을 고3 수험생처럼 살 수는 없는 것처럼 매 주말, 매 여가마다 ‘가장 좋아야 한다는 것’이 부담일 때가 있다.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주말이라면 더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싶다. 24시간, 1년 365일이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세상의 억압에 소심한 반항을 하고 싶다.


쉼 마저 ‘잘’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천 원짜리 라면을 먹어도 만족스러운 게 식사인데 식사비로 만 천 원을 지불했다면, 그 만 원은 온전히 생존이 아닌 여흥을 위해 쓰인 것이다. 진료실에서는 급작스레 실직했거나, 돌아오는 채무 이자를 갚기 버거워하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자녀 교육의 기회를 포기하는 사람들을 매일 만난다.


세상에 여전히 또 분명히 존재하는 절대적인 빈곤을 애써 외면하고 살다가도, 그런 장면들이 상기될 때면 상대적 만족의 우열을 따지는 것에 문득 죄책감이 든다. 쓴 비용에 비해 아쉽다며 불평을 할 수 있고, 이러한 것들에 당연함 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자체가 특권임을 잘 안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잘 기억하고, 그 당연하지 않음이 지금 내게는 당연함에 최선을 다해 감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사익을 모두 내려놓고 공익만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을 정도의 성인은 아닌 나의 최소한의 윤리선이다.




오래 준비한 시골 여행지 숙소의 안락함이 퍽 실망스러웠고 방문할 만한 식당은 모두 휴무인 상황. 편의점 털기로 저녁을 때우자 계획을 바꾸어 다 같이 차를 몰고 삼각김밥이며 컵라면, 햇반 덮밥 따위를 사러 나섰다.


드라이브 길에 포플러나무가 죽 이어선 풍경, 그 뒤로 지는 노을 이 참 괜찮았다. 갓 데워 김이 모락 한 레토르트 치킨마요 덮밥을 아이들이 곧잘 먹는다. 오래간만인 사발면과 삼각김밥의 궁합도 훌륭하다.


“거봐, 맛있다고 했지. 다음에는 등산을 가보자. 산 위에 올라가서 바다도 보고 (고향집 뒷산 정상에 오르면 기가 막히게도 억새밭, 바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대교가 한눈에 보인다.) 김밥도 먹고 콜라도 마시면 엄청 기분 좋아져.”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좋아, 좋아~ 한다.


너희들이 그런 것들이 주는 즐거움을 아는 아이가 되면 좋겠다. 그럴듯한 것들보다 훨씬 자주 마주하게 될 적당한 것들이 선사하는 귀함과 감사가, 앞으로 살아가며 겪을 수밖에 없을 바람과 파도를 맞아 낼 뿌리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 일상은 대개 적당하다. 이를 대단한 것들에 비해서는 모자라다 갈급해할 수도 있고, 그 자체로 경이롭다 정의할 수도 있다. 나는 특별함에만 특별함을 부여하기보다는 적당한 것들의 경이를 잘 깨닫고 느끼기로 선택한다.


더 나은 것을 갈구하거나, 적당한 것들이 어떻게 부족한지를 설명하기란 쉽다. 그러나 좋은 것은 당연히 좋을 테니 어쩌면 여행의 만족도는 적당한 것, 어쩔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능력에 비례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에게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허락될지는 우리에게 달리지 않았고, 우리는 적당한 것들을 더 자주 만날 것이다. ‘적당한 여행’을 사랑하는 과정은 불완전한 삶을 사랑하는 연습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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