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지극히 사적인 낱말들 (8)

by 아는 정신과 의사


작가님 이라는 호칭은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선생님, 원장님은 당연하고 익숙한데 작가님은 쑥스럽고 부끄럽다.


이유는 쓰기가 생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 일정은 삶의 우선순위를 알려주는 좋은 지표가 된다. 수면과 식사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8할은 진료와 북리딩, 저널리뷰, 전공 책 번역 같은 진료와 관련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생업의 무게는 엄중하다.




처음 출간을 제의받았을 때의 느낌은 그래! 살면서 책 한 권 꼭 쓰고 싶었는데 잘됐다, 후, 뿌듯하다, 기쁘다, 같은 감탄사의 연속이었다. 이야 내가 작가가 되는구나, 두근두근 신이 날 때의 작가 라는 단어는 책을 내 본 사람, 명함에 제목을 적을 수 있고 책을 명함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란 의미였다. 가벼웠고 그 가벼움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었다.


첫 책을 냈다는 기쁨에 달떠서 아는 모든 지인들에게 연락을 했다. SNS에서 연이 닿는 모든 감사한 인플루언서 분들께 DM을 보내고, 그중 답신을 주시는 감사한 분들 께는 친필 사인 도서를 일일이 우체국 소포 상자에 포장하여 발송도 했다. 각종 유튜브 출연이며 강연도 찾아다녔고, 어릴 적부터 보았던 지상파 방송에 출연할 기회도 있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고 총 5 쇄를 찍었는데, 돌아오는 인세는 참 묘했다. 기댈 곳도 이름도 없이 낸 첫 책인데 이 정도면 대단하지 하면서도 묘했다. 인세로 집을 살 정도의 욕심이 있었던 건 결단코 아니다. 너무도 감사했으나 다른 기준 때문에 그랬다. 글 만으로 먹고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총 인세는 한 권의 책이 되기까지 글이 모인데 걸린 3년, 그리고 낸 후의 1년 남짓한 활동 기간을 충당하기는커녕 몇 달의 생활비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후 세 권의 책과 한 권의 공저, 두 권의 번역서를 더 냈지만 결국 글은 내게 밥이 되진 못했다. 내 글의 역량, 영향력은 이 정도구나. 운과 감사가 모여 책 까지는 이루어냈으나 글 만으로 먹고사는 특권 까지는 무리였구나. 결국 쓰는 것이 아닌 일을 해야 하는구나.


생존을 위한 다른 옵션 없이 글밥만 먹는 이들이 있다. 그 만으로 여유가 넘쳐서 굳이 다른 일이 필요하지 않은 유명은 부럽고,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용기를 내 글쓰기만을 이어나가는 무명은 존경한다. 그들을 일컬어 작가 라 한다. 그런데 쓰기를 통해 살아갈 능력도, 글 말고 다른 걸 내던져 볼 각오조차 없이, 겨우 살아남은 다음의 피로를 풀 듯, 여가를 즐기듯 쓰는 나를 똑같이 작가라 하면 부끄럽다. 너무 과분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부러웠다. 러닝, 커피, 새벽부터 이어지는 5 - 6시간의 집필, 그리고 휴식과 위스키 라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세련된 그의 하루 루틴이 부러웠다. 로망을 따라 제도권 교육 따위는 접어둔 채 땡빚으로 재즈바를 차렸다는 것, 그러다 쓴 소설이 덜컥 상을 타면서 작가,라는 호칭 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부러웠다.


유명작가들은 집필을 시작하면 선인세 만으로 세계 유명 도시 중 한 곳을 골라 숙소를 잡고 집필에 들어간다 던데. 나도 센트럴 파크 좋아하는데. 할랄가이즈 하나 사서 양지바른 벤치며 바위에 걸터앉아 실컷 먹고 노트북을 열면 절로 글이 쏟아질 것만 같은데.


여행이든 수개월 렌트비든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도시 한 복판에 거처를 정할 수 있고, 내키는 대로 바꿀 수 있다는 자유로움. 그 여유가 굳이 다른 생업을 통하지 않아도 마련된다는 편리함. 그 정도의 비용을 선인세로 지급하여도 신작으로 반드시 벌충할 수 있다는 출판사의 확신.


하루키를 부러워했던 것의 수준은 그 정도였다. 그가 매일 일정한 시간 러닝을 하고 일정한 시간마다 기계적으로 글을 쓴다는 일화를 읽고 부러웠던 것은, 뉴욕 메이시스에서 구입한 러닝화를 동여매고 뉴욕 브로드웨이 인근 호텔을 나서 뉴욕 센트럴 파크를 뛰어다닐 것 같은 이미지였다.


사치가 핵심이 아니다. 글로써 생존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그것으로 밥벌이가 된다는 확신 하에 매일 글에만 매진할 수 있는 삶의 형태가 부러웠던 것이다.




하루키의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으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쓰는지, 얼마나 쓰기를 진지하게 대하는지, 표면적인 호응을 이끌만한 깊이가 어디에서 오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모든 일상이 글에 대해 진력을 다하기 위함이라 이야기한다.


하루 정한 만큼 기계적으로 써내고, 퇴고를 하고, 글을 다시 매만지기 위해 글과 잠시 이별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전력을 다해서 완성해 내는 것.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작품의 완성도, 이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아니었다.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는 느낌이 보람의 본질이라고 했다. 그는 어떤 작품에서도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라는 느낌은 없다고 했다.


나와 내 삶의 깊이가 쓰기에 충분한 지 부족한 지는 모른다. 다만 역량과 시간이 부족할 뿐 노트북 앞에서 자판을 두드릴 때만큼은 그와 내 마음만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계속 써도 된다는 안도가 되었다가, 이내 수치감으로 바뀌어 밀려왔다. 부러움의 얄팍함이 수치스러웠다.


나는 고작 러닝, 휴식, 위스키 따위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쓰기 와는 하등 상관없는 것들을 부러워하며 애꿎은 글의 부족함을 탓하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일깨워준 깨달음이 있다. 무엇을 하든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다면, 어쨌든 ‘한 인간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며 쓰는 상태’라는 것만은 여느 유명 작가든 나든 같지 않을까.


나 역시 절대적인 시간은 적지만 삶을 더욱 들여다보고, 의미를 캐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전해 보고, 읽는 이의 화답이 돌아오는 과정을 이어갈 수 있고 이어가고 있다. 하루의 대부분을 밥을 벌며 가족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더라도, 한 시간 일찍 일어나고 한 시간 늦게 자며 점심을 먹지 않는 한 시간을 더하면 세 시간은 읽고 쓸 수 있다.


하루키는 하루의 대부분을 쓰는 것을 이어가는 특권을 얻었지만,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하여 부러워하는 것이 맞을까. 상대적인 열등감을 경계해야 한다 진료실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조금의 졸림과 노곤함을 이겨내는 정도로 무려 세 시간을 글과 함께 보낼 수 있다면, 그것 역시 대단한 특권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작가에 대한 부끄러움을 넘어 삶의 고통을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는 자체를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독자의 반응이든, 인기든, 돈이든 글로서 주어진 것은 그러한 글을 써 가기 위한 원동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순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이를 전업작가라고 하나 보다. 나에게 돌아오는 것에 비록 생존을 위한 금전적인 보상은 결여되어 있으나 그것은 생업으로 벌충할 수 있다. 그럼 ‘전업’은 빼고, ‘작가’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부끄러운 것은 작가,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그 표현에 대한 잘못된 이해였다.




첫 아이의 등교 준비 시간은 나의 출근 시간보다 두 시간 빠르다. 생선을 구워 밥을 먹이고 버스를 태워 보낸 다음에는 책을 읽는다.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 고요함은 곧 분주함으로 바뀌고, 열심히 밥을 벌며 사는 게 쉽지 않다 환자와 함께 이야기하고, 달빛 자욱한 퇴근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나를 찾는 목소리를 사랑하지만 조금 일찍 자 주면 좋겠다. 일찍 자 준 만큼의 시간을 쓰기로 치환할 수 있어서다.


그 시간 동안 쌓이는 영감들이 나머지 일상의 고됨을 지탱한다. 지탱된 일상에서 느끼는 것들이 있다. 바로바로 다이어리에 쓰거나 노트북으로 쭉 이어서 글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워하며 급한 대로 진료 사이사이, 세무 업무를 처리하는 중간에 떠오를 때마다 ‘나 와의 카톡’에 마구 쓴다.


나중에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왜 이런 단어와 문장을 나열해 뒀는지 모를 단어와 문장 천지지만, 최대한 언어라 할 만한 형태로 되살려 남겨본다. 경이는 조용하여 모든 삶에 존재하지만 묻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찾아내고 쓰며, 공감하고 나누는 기쁨과 따뜻함을 알아버렸다. ‘뭘 이딴 걸 글이라고, 책이라고 썼어.’라는 책망 앞의 부끄러움도 그 기쁨이면 감내할 만하다.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의 깜냥을 파악하고 이를 받아들이며, 그것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감사할 것에 감사하는 데에 능숙해진다. 허락된 만큼 읽고 허락된 만큼 쓰기로 한다. 간혹 신작을 내고 조회수도 얼마 나지 않는 글을 완성될 때마다 블로그며 SNS에 옮기는 정도인데, 그것 만으로도 이름만 들으면 헉, 할 베스트셀러를 낸 출판사에서 연락이 온다.


이미 4권의 책을 냈어도 유망주인 척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지금 쓰는 글들을 차기작으로 엮어 볼까 기존의 편집자 선생님과 이미 이야기를 나눈 터라, 그다음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 되었다. 그것들이 진행될지, 잘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일단은 계속 쓸 수 있다.


대가들의 고귀한 글을 읽으며 쌓이는 동경에 압도되어도 꾸준히 쓰고 내보이는 용기를 내는 이를 작가로 규정하기로 한다. 오늘도 용기를 내긴 했다. 신작 출간 제의, 강연 메일 서두의 작가님 이라는 호칭에 대해 그래, 전업을 뺐잖아, 쓰고 있잖아,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자, 나와 이름 없는 모든 쓰는 이들을 격려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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