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낱말들 (9)
세월은 이해되지 않던 것을 이해하게 해 주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게 해 준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이별의 경험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전에는 이별 하면 주체하지 못한 감정, 부주의가 부른 치명적인 소홀, 돌이킬 수 없는 무례 같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바보 같은 미숙함의 누적으로,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을 억울한 이별을 만들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장면들이, 사실 서로를 거부하는 무의식으로 말미암아 실수와 비의도를 가장하여 서로의 역린을 건드린 것임을 안다.
마냥 아름다워 보이던 외모의 결점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존재하는지도 모르던 습관의 거슬림이 점점 커져가는 것, 다른 식성을 맞추기가 진절머리 나는 것, 그런 것들은 단지 표면적인 현상이다.
그 현상은 수치스럽고 감추고 싶은 내면이 건드려질 때나 상대가 나의 판타지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나온다. 혹은 상대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데 지쳐 버렸을 때, 관계를 통해 그리는 미래가 원하지 않는 방향이라는 확신이 강해질 때도 나온다. 그러한 불안과 좌절, 무력과 분노가 표현되는 반사적인 자기 방어의 칼날이다.
타인을 감내할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 무한한 사람은 없다. 강화유리는 웬만한 충격으로는 깨지지 않고 티도 남지 않는다. 그러다 충격이 충분히 응축되면, 특별한 추가적 파손 없이도 급작스레 산산이 부서진다. 이별이 일견 비논리적이고 급격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헤어질 논리가 차근차근 누적될 때는 땅 속으로 스민 빗물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에는 이별의 씨앗이 있다. 피어난 꽃을 보며 이를 키운 빗물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이미 핀 꽃이 질 수는 있어도, 다시 봉우리로 오므리게 할 수는 없다. 피어나버린 이별도 마찬가지다. 본능적인 아픔과 별개로 존재하는 필연을 이해했다면, 그래도 덜 아프진 않았겠지만, 그 아픔이 조금은 덜 두려웠을 것이고 덜 헤매었을 것이다.
이별을 대하는 가장 좋은 자세는 이별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최근 출간한 공동 저서의 저자 선생님들은 나보다 연배가 높다. 자녀들이 이미 청소년이거나 입시생이다. 이제 다섯 살인 둘째 딸이 아빠를 찾는 이야기를 하니 지금 충분히 기억해 두라고들 하신다. 허그는커녕 대면을 거부당하는 시기가 곧 찾아온다는 것이다. 뽀뽀는 꿈도 못 꾸겠네요, 하니 “뽀뽀요~?”라고 기겁하시던 동료 선생님의 뜨악한 표정이 여전히 기억난다.
아이가 나의 퇴근 만으로 덩실덩실 춤을 춰 주고, 아빠랑 자야 하니 모두 나가달라고 하고, 퇴근해서 잠깐 밥을 먹는 순간을 기다리기 힘들어 밥을 다 먹었는지를 수 십 번 묻거나, 당근 스틱을 직접 먹여주겠다 숟가락과 젓가락 사이로 안겨드는 귀찮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첫째를 키울 때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 이러한 사소한 이별의 시기를 예측할 새도 없이 와 있었다. 이제는 한 번 해 보았기에 남은 시기가 어느 정도 가늠이 된다.
아이와의 예정된 이별은 지금까지 경험한 어떠한 이별들과도 이질적이다. 이루어질 것으로 예정되어 있고, 스스로 이를 바란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진료실에서는 수많은 부유하고 콧대 높은 부모들이 자기 확신의 그늘에서 아이를 놓아주지 못해, 결국 함께 증오로 고여가는 과정을 너무도 많이 본다. 그들의 삶을 감히 폄훼하는 것은 아니나, 그 자녀들의 주치의로서는 그들의 사랑이 서로를 위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은 두 가지다. 그것이 필연임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서로에게 더 나은 삶이 될 것을 믿는 것. 아이가 나를 거스르고, 거부하고,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하고, 적절한 거리를 요구하는 것은 관계의 파국이 아닌 아름다운 일단락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래서 잘 준비해야 한다. 나의 사랑이 너를 잘 위하도록.
그러고 보니 이 이별도 그리 이질적이지 않다. 모든 이별은 지금의 고인 관계 보다 더 나음을 추구한다는 성장의 증거이며, 서로가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변화의 과정이다.
부모와 살을 맞닿은 품, 가치관의 한계에서 벗어난 아이와 나의 관계는 곰팡이와 출아한 포자처럼 재정립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성인 과 성인 이 될까.
아이를 보다 보면 태어날 때부터 아빠로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것만 같다. 짜증과 피곤에도 성실함의 하한선을 지켜내는 인내를 통해 밥벌이할 능력을 갖추고, 사회에서 아이들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역할을 수행하는 연속이었다.
아이가 없는 아침에 일어난 나는 무엇을 할까. 우선 무엇을 하기 전에, 확실히 일은 많이 줄일 것이다. 곧잘 바다가 보이는 곳에 책과 노트북을 가져가 읽고 쓸 것이다. 산책이나 운동도 나서 보고, 이도 저도 아닌 날에는 커피를 한 잔 내리고는, 그다음은 커피를 한 모금하며 생각할 것이다. 거대한 공허는 그대로 둔 채.
아이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점부터 나는 좀 더 나태해지고, 좀 더 사람들로부터도 숨고, 좀 더 사소하고 하잘 것 없는 즐거움을 즐기게 되지 않을까. 비로소 주어지는 더 대단해지지 않을 자유다.
읽히기 위한 글 보다 쓰고 싶은 글을 쓴다는 정도의 방종. 생존을 위해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나 스스로를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선에서 좀 더 나의 내면으로 돌아올 수 있는, 퇴행의 자유.
그 자유의 힘을 빌어 평생 지금을 그리워할 작정이다. 그리움을 수용하되 꽁꽁 숨겨둘 것이다. 참지 못한 그리움이 미련이 되어 아이를 잡아먹지 않도록 잘 동여매어 속으로만 간직할 것이다. 잘 이별할수록, 아이는 행복하게 잘 자립하는 것이다. 그 의미가 조금이나마 덜 아프게 그리움에 머물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딸아이의 말투는 참 귀엽다. 잠결마다 동화뮤지컬을 들어서인지 “아~니야, 고~마워~”처럼 만화주인공 같은 억양과 목소리를 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어리광이지만 부모는 분명히 다른 아이들과 구분해 낼 수 있는, 번잡한 주말 코스트코에서 다른 코너에 있어도 우리 아이가 이 너머에 있구나 알 수 있는 그 말투.
그 특별한 억양과 리듬이 너무 고맙다. 세월이 지나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네 성대가 신체와 함께 변화하고, 그에 따라 네가 나를 애틋해하는 정도도 달라져 우리가 이렇게 살가웠다는 기억마저 의심하게 되더라도, 그때도 이 소리와, 그 소리를 품은 이 장면만큼은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늦은 운동을 다녀온 새벽녘 혹 아이를 깨울 까 안방에 누워서 쉰다. 잠결에 아이는 아빠의 부재를 느낀다.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 이후에, 이내 콩콩쿵쿵 발길질하듯 달려오는 아이의 소리가 안방문에 가까워지면 혼자 몰래 보던 유튜브를 끄고 벌떡 일어난다. 눈을 뜨지 못하는데 어떻게 안방을 찾아왔는지 모를 아이를 안아 올릴 때 내의에 잠내음이 듬뿍 묻어난다.
이부자리를 정돈한 후 아이를 뉘이고, 아이의 등뼈에 내 배의 굴곡을 맞추어 함께 웅크린다. 이따금 아이가 돌아 누우면 갓 구운 모닝빵처럼 동글고 반질한 코 끝에서, 이 조그마함으로 어떻게 생명이 유지되는지 신기한 미약한 김이 오고 간다. 그렇게 돌아누운 아이의 이마는 내 코에 닿게 되는데, 그때의 아기쥐 같은 포유동물의 털내음에 빠져든다.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시작되어 버린 그리움에 아이의 등을 배에 조금 더 끌어 본다. 뽀뽀, 어유 꿈도 꾸지 마세요~, 란 동료 선생님의 다시 말씀이 떠오른다. 꿈을 놓는 것은 역시 잘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