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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Sep 07. 2018

더 없이 절망적이라면

좌절에 대처하는 자세와 로고테라피(Logotherapy)

  자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실 때가 있다. 둘러 앉아 서로의 고민을 나눈다. 안주는 기름질 수록 손이 간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은 일들도 종종 술상에 올라 온다. 소주 한 잔에 너의 고난 한 점 하다 보면 위안이 된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든 줄 알았는데 내가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니었구나. 힘내라. 그런데 조금 서글프다. 고작 더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음에, 그것도 내가 아끼는 이가 그러함에 위로를 받는 것이. 그래도 어쩌겠는가. 때로는 내게, 때로는 네게 서로가 위로를 주고 받으며 의지해야지.

 그런데 어쩔 때는 도저히 위로가 안 되는 고통도 있다. 기사로만 겨우 접할 정도의 안타까운 일이 닥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삶의 사건에는 연민이 없다. 때로 삶은 무서우리만치 냉혹하다. 자유 의지에 대한 억압, 파산, 사회적 지위의 추락, 관계의 단절, 가족 상실, 생존 위협 등이 그 예로 떠오른다.

 빅터 프랭클 이라는 이가 있었다. 촉망받는 심리학자이자 뛰어난 정신과 의사였고, 철학 박사였다.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고 저명인사로 강연을 하며 연구를 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이었다. 나치에 의해 게토에 갇힌 뒤 그는 정신과 의사가 아닌 일반 의사로 근무하면서도 자발적으로 마음이 힘든 이들을 돌봤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피하지 못했고 결국 아우슈비츠에 의해 일가족과 함께 수감되었다. 노역자로 부역하다 겨우 살아남았지만 이미 그의 부모, 남동생,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는 가스실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살아남은 여동생과 함께 세상에 다시 던져진다.

 만약 그가 아주 가까운 이 였다면, 그에게 어떤 이야기를 건낼 수 있었을까. 어떤 방식으로도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말없이 함께 걷거나, 어깨를 토닥이거나, 그저 가만히 곁에 있었을 것 같다. 감히 누가, 감히 어떤 말을 무심코라도 던질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줄 메시지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 존경한다.

 사회적 명망, 학문, 재산, 가족,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하루를 스스로의 의지로 채울 수 있는 자유. 내 기준에서는 그는 잃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잃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고 했다. '삶의 의미를 규정하는 자유'

 삶이 신체적 자유를 구속하고, 의지에 반하는 일을 시키며, 시시각각 생존을 위협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삶을 살아가는 내가, 삶을 어떻게 생각할지의 자유, '삶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할 지 의 자유'는 누구도, 무엇도 앗아갈 수 없다. 책에 그가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규정 하였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수용소에서의 생각과 행동, 생존 이후의 삶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것 마저 빼앗긴 채 짐승처럼 떠밀려 수용소에 갇힌다면 어떨까. 비탄과 분노에 빠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거기서 삶의 의미를 생각했다. 의레 평소 우리가 하듯 일상적이고 아름다운 삶의 의미 같은 것이 떠오를 리 없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다른 차원의 의미를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가 삶을 모두 안 다고 할 수 있는가? 삶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인 일부일 뿐이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가 제시하는 예는 백실 실험을 당하는 원숭이 이다. 백신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해 원숭이는 반복해서 주사에 찔리는 고통을 당한다. 물론 원숭이는 자신이 어째서 이러한 고통에 처하는 지 알 수 없다. 원숭이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고난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백신은 수많은 생명을 구할 것이다.

 어쨌든 불쌍한 원숭이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고통이 주어진 것이 아닌가? 맞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사람을 위한 실험에 원숭이가 희생되는 것이 합당하다는 따위의 의미가 아니다. '지금 파악할 수 없는 차원의 삶의 의미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이다. 이 대목에서 마음에 어떤 숭고함이 밀려왔다. 그는 아무리 극한 상황에서도 결코 '삶은 의미 있다.' 는 명제를 놓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러워 모든 것을 놓고만 싶었을 수도 있는 그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

 또한 그는 깨달았다. 누군가가 믿고 있던 삶의 의미를 뭉개버릴 수는 있어도, 그래도 '삶은 의미있다고 믿는 자유'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을.

 실제로 그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깨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했다. 건강한 외모는 가스실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삶은 어쨌든 의미가 있을 것이기에, 살아남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수용소를 뒤로 하고 다시금 삶을 향해 나설 때, 평생을 들여 집필했던 학문 자료들은 모두 유실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오히려 처음부터 시작하였다.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집대성하여 로고테라피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그가 생각 했던 삶의 의미가 이후의 삶의 궤적과 일치 했을 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의미와 감동이 있는 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은 항상 조심스럽다. 누구도 그 자신 만큼 자신의 고통을 정확히 이해하고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나 크고 작은 삶의 굴곡을 경험한다. 하지만 어설픈 격려를 건네기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힘들어 본 사람이었냐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누구보다도 큰 고난을 겪은 이가 이야기했다. 삶의 의미를 정의내릴 수 있는 자유는 어느 누구도, 어느 무엇도 앗아갈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고. 또 지금 알든 모르든, 삶의 의미는 분명히 있다고.

 지치고 좌절했다면, 이 메시지를 꼭 함께 나누고 싶다. 지금 생각하는 소중한 삶의 의미가 있다면 다시 되새겨 보자. 삶에 배신당해 그 의미가 꺾이고 심지어 사라져 버리더라도, '그래도 삶은 의미 있다,' 그 믿음 하나만은 놓지 말자. 조금 쉬고 추스려서 다시 가 보자. 삶의 의미를 향해, 혹은 비로소 의미를 느끼게 될 그 때를 향해.


Ref.)
빅터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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