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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Dec 08. 2019

내 몸에 피가 흐르면, 나는 살아있음을 느껴요.

자해 속에 숨겨진 마음

  ‘저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면 마음이 올라와요. 초조한 것 같기도 하고, 흥분되는 것 같기도 하고, 여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느낌이에요. 정신이 들고 나면, 이미 팔목을 그은 뒤에요. 아픔이 느껴지지도 않아요. 피가 흐르는 걸 보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가 자해를 할 때 그 주변 이들이 느끼는 가장 흔한 감정은 ‘당혹감’ 이다. 신체에 상처가 나는 일은 대게 두려움을 유발한다. 피 한 방울에도 머리가 어질해지는 이도 많다. 그런데 심지어 자기 자신이 직접 스스로의 신체를 칼로 베거나 날카로운 물건으로 긋는 장면과, 이로 인해 흐르는 혈액의 선명한 붉음이나 얕고 짙은 흉터는 자해가 낯선 이들에게 공포를 동반한 당혹스러움을 야기한다.


  그런데, 막상 자해를 하는 이들은 대게 이러한 행동이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고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불편한 감정을 잊게 해 준다고도 하고, 마치 중독된 것처럼 자해를 하고픈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다고도 한다. 어쩌면 큰 후유증이나 장애를 남길 지도 모르는, 스스로를 해치는 행동을 반복되게 하는 숨은 마음은 무엇일까.


  우선, 생물학적으로 자해는 마음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물질을 분비한다. 우리의 뇌는 신체가 고통에 노출되면 자연적인 진통제를 분비하는데, 내인성 아편계 물질 (endogenous opioid) 가 그것이다. 여기서의 아편은 마약의 일종인 그 아편이 맞다. 아편과 구조가 유사한 물질 (opioid)이, 인간이 고통을 느낄 때 뇌에서 분비되어 그러한 아픔을 경감시키는 작용을 한다. 


  오래도록 장거리 달리기를 하며 고통을 느끼다 어느 순간부터 쾌감을 느끼는 러너스 하이 나, 크게 다친 상처의 통증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줄어드는 기전, 마조키즘의 성적 흥분 일부 (전체는 아니다) 역시 이러한 내인성 아편계 물질 분비로 설명할 수 있다. 마음이 너무 힘들거나, 질병이나 외상으로 인해 신체적 통증이 너무 심할 때 자해를 하면 이러한 기전을 바탕으로 고통이 경감될 수 있고, 몸과 마음의 아픔이 자해를 통해 줄어드는 경험을 하면 할수록, 자해 행동에 빠져들 수 있다.


  또한 타인에게 상처나 자해 장면을 드러내는 형태의 자해는 타인의 주의와 관심을 끌 수 있다. 여기에서의 ‘타인’ 은 가족, 연인,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 내게 중요한 사람이다. ‘관심 종자, 관심 병’ 이라 이러한 마음을 폄하하고 희화화 하는 시각이 많지만, 이러한 마음은 단순히 우스갯소리로 넘기기엔 무겁고 절실하다.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다. 타인의 관심과 애정은 다른 사람과 내가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중요한 신호이다. 이러한 신호가 충분치 않은 사람은 이를 갈구하게 된다. 특히, 스스로 자립이 어려운 어린 시절의 대인관계의 단절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경향성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자해 행동은 비일상적이며 보편적으로 두려움을 유발하는 행동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일상적인 수준을 넘어선 특별한 주의를 끌게 된다. 특히 타인과의 교류가 단절된 상태라면, 함께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대화하며 마음을 나눌 만한 상대나 상황이 부족하다면, 몸에 상처를 냄으로써 원하는 사람의 주의를 끌고 타인과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몸에 상처를 냈을 때 이어지는 반응, 비록 불안과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반응일지라도, 이에 대해 내게 중요한 사람이 주의를 기울이며 그와 연결되는 느낌은 자해를 지속하는 큰 이유가 된다.


  그리고 오래도록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일상 속에서 공허함에 시달린 이에게, 자해를 할 때의 고통과 피가 흐를 때 느껴지는 일련의 자극적인 감각들은, 마치 살아있음을 깨닫는 감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아무런 의미 없는, 마치 죽은 듯한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스스로를 상처내고 다치게 하는 행위, 죽음으로 가까워지는 행위로 인한 자극이 역설적으로 살아있다는 자각을 되살려 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해는 자기 처벌의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자기 처벌의 욕구란, 깊은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스스로를 비난하고 처벌하고 싶은 마음을 의미한다. 삶이 잘못되어 간다고 느낄 때, 스스로가 스스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심한 죄책감에 시달릴 때, 그러한 이질감들의 원인이 내게 있다고 간주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벌하고 싶은 마음을 느낀다. 이러한 마음은 이성으로 마주하기엔 지나치게 아프기 때문에, 보통 무의식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다. 자해는 스스로를 벌하고 싶은 충동으로 인한 불안을 줄여주고, 그 은밀한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자해가 옳은 행위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옳고 그름의 잣대를 벗어나,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선뜻 납득하기 힘든 스스로를 상처 내는 행동, 그 아래에 숨은 마음에 대해 논하고 싶었다. 또한 옳고 그름으로 자해를 접근하는 시각 그 자체 때문에 한 번 더 힘겨워 하는 많은 이들, 그들을 위해 글을 쓰고 싶었다. 


  ‘쟤는 괜히 관심 끌려고 저러는 거야.’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저래.’ ‘진짜 이상한 애야. 무서워.’ 라는 시선 아래에서 한 번 더 상처를 받는 이들의 마음을 좀 더 깊게 이야기 해 보고 싶었다. 자해를 하는 이들의 깊은 마음 자체는, 자해를 하지 않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고, 타인과 이어지고 싶고, 때로 받아들이기 힘든 스스로를 질책하고 싶은 마음에 이루어지는 행동인 것이다.


  만약 당신의 곁에, 조절할 수 없는 자해로 힘들어하는 이가 있다면 섣부른 조언 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아래 숨은 깊은 공허함을 알아주고, 다독여주기를 권한다. 눈에 띠는 행동 그 자체 보다는, 그 라는 사람과 그의 마음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그가 어느 부위를 언제, 어떻게 다치게 하는지 보다는 그가 언제 외로운 지를 살피면 좋겠다. 자해하는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는 대신, 그의 하루가 어땠는지를 묻기를 권한다.


  그리고 당신이 스스로 조절하기 힘든, 스스로를 다치게 하는 행동으로 힘들다면, 그러한 행동 자체가 아닌 그 행동을 부르는 깊은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바란다. 상처를 낼 때, 그 찰나의 안도감과 쾌감이 아닌, 진심으로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이 이상하거나, 비정상인 것이 아니다. 다만 자해를 하고 싶은 생각이 뿌리내리고 있는,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다. 


  도움이 필요하다 느낀다면 정신건강의학과의 문을 두드려도 좋다. 두려움이나 주의를 요하지 않는 진심어린 관계를 쌓기 위해 대화를 시도하는 것, 내가 원하는 삶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실현해 나가며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것, 이를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내게 의미 있는 일을 시작하는 것은 찰나의 자해를 통한 안도보다 한결 깊은 만족을 줄 것이다. 그 평온함은, 일시적인 충동 해소와 그 이후의 기나긴 죄책감과 후회를 부르는 자해 행동보다 더욱 따스할 것이다. 


  마음의 평안과 행복,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느끼고 또 얻기 위해 자해보다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고 불편하지만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을지 모른다. 조절하기 힘든 자해로 좌절하기 보다는, 견뎌내기 힘든 충동에도 불구하고 더 어렵지만 의미 있는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스스로를 격려하며, 조금씩 진정으로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 보시기를 권한다. 그리하여 당신이 자해를 하고 그렇지 않고 와 무관하게, 진심으로 원하는 삶의 모습에 다가가기를 기원한다.



(사진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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