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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Mar 14. 2020

문제는 불안일까, 불안을 피하려는 마음일까

진료실 스케치; 두려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회피의 '실제' 영향


  한 청년이 사람이 두렵다며 진료실을 찾았다. 어릴 적 한 차례 따돌림을 경험하였는데, 그 때 이후로 사람들 앞에만 서면 가슴이 뛰고 초조하여 사람들을 피하고만 싶다고 했다. 타인이 곁에 있으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만 같고,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두려움, 그로 인해 포기해야 했던 만남들, 기회들, 스스로도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셨군요. 만약 그런 생각이 든다면 저라도 사람들을 피해버리고 싶을 것 같습니다. 다만, 같이 한 번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 진료실에 오기까지 마주쳤던 사람들을 떠올려 볼까요?”

  “네. 음... 가족, 직장 동료, 친구, 지하철에서 지나친 사람들...”

  “지금 제가 이 질문을 드리기 전에, 그 분들에 대한 생각을 하고 계셨나요?”

  “네? 아. 아니요... 그러고 보니”

  “우리 마음이 그래요. 환자분뿐만 아니라 저도 그렇고, 모두가 ... 다들 남의 삶에는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죠.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은 가십일 뿐, 우리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진 않지요.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지' 에 대한 고민이 마음속에 가득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늘 타인이 나를 의식하고 나에 대해 생각하고 평가할 거란 상상에, 거기에 사로잡히곤 한답니다.”


  아 그런 것 같아요, 환자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도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나쁘게 볼 것 같다는 걱정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라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고 했다. 문제는,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이 이성을 따라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라 했다.


  “저도 이 두려움이 이제는 제 마음 안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머릿속에서는 이해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막상 사람 앞에만 서면 온 마음이 불안에 휩쓸려 버려요. 그래서 머릿속이 하얘져 버리고, 그냥 도망치게 돼요. 이 감정이 해결이 안 되면 저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어요.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네. 그러셨군요. 충분히 그 마음이 이해가 되네요.”

(중략)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사람 앞에 섰을 때 불안해 지는 것은 문제일까요?”

  “네. 아주 큰 병이에요.”

  “그리고 그 병이 해결되어야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구요.”

  “네. 바로 그거에요.”

  “네. 그럼 조금 다른 질문을 드려볼게요. 예전 따돌림 때의 기억이 너무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이니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또 그렇게 힘들면 어떡하지 란 걱정과 불안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 같구요.”

  “네 선생님... 상상도 하기 싫고, 사람이라면 곁에 가기도 싫어요.”

  “네, 이해합니다. 아까 그런 불안을 병이라고 하셨는데, 그 때 그렇게 힘드셨다면,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음... 그건 그렇죠...?”


  불안이란 우리 마음 속 위험 신호다. 길을 건너는 데 시속 100km로 트럭이 돌진해오고 있다고 하자.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오며 우리를 빨리 그 자리에서 피하게 만들 것이다. 이렇듯 불안은 이를 유발한 위험한 상황을 회피하게 만들어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형성된 감정이다.


  인간의 학습능력은 뛰어나고, 두려움은 강렬한 감정이기에 불안을 일으키는 상황에 대한 학습은 매우 강력하게 형성된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는 속담의 신경 생리적, 심리학적 근거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러한 학습이 무분별하게 일어나, 실제 불안의 기능인 ‘위험의 회피’ 와 전혀 동떨어진 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랑이를 만나면 울리도록 만들어진 알람이 있고, 알람이 울릴 때 마다 눈을 감고 전력을 다해 도망치기로 했다고 하자. 그런데 알람의 설정이 잘못되어서 고양이과 동물 모두에 알람이 울리게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근처에 귀여운 길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릴 때 마다 알람이 세상을 뒤집을 듯 울리고, 나는 그 때마다 호랑이가 나타난 듯 눈을 감고 도망쳐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청년의 이야기에 이 예시를 대입해 보면, 그는 따돌림으로 인해 크나큰 아픔을 겪었고, 이러한 경험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를 피하기 위해 불안이라는 알람을 설정했다. 문제는 그 알람의 대상이 '모든 사람' 이 된 것이다.


  “맞아요... 저는 이제 사람들을 모두 피해야만 해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물론 저도 안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선생님, 안 그러려면 이 불안이 안 울려야 하는 게 맞잖아요. 그러면 이게 문제가 맞고 이걸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어요. 그 불안이란 것은 그만큼 힘든 것이니까요. 단지 제가 이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그 불안이 환자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죠?”

  “끝도 없어요. 사람도 못 만나게 하고, 아무것도 못하게 하고, 집에만 있게 하고...”

  “아, 그것은 불안으로 인해 발생한 '행동' 인 것 같아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불안이 생길 것이라 예상되는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행동으로 인한 결과들이죠. 두려운 느낌, 심지어 곧 죽을 지도 모른다는 그 불안, 그 자체로 인한 영향은 무엇일까요?”

  “네? 음... 선생님 말씀을 잘 이해하기 힘들어요. 그게 다른 건가요?”


  우리는 감정과, 그 감정에 이어지는 행동들의 영향을 종종 혼동한다. ‘모든 사람을 피한다.’ 는 것은 대인관계 불안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결과’ 가 아니라, 그러한 불안을 피하기 위해 ‘내가 택하는 행동’ 이다. 불안이란 감정이 너무도 강렬하고, 그 두려움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도 너무도 당연히 또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회피를 위한 행동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이러한 불안이라는 감정과 그 행동을 은연중에 하나로 연결시켜 생각한다.


  엄밀히 따져보면 불안은 일종의 신호일 뿐, 내게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불안의 발작적 극한이라 할 수 있는 공황 발작이 닥치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밀려온다. 이를 경험하는 것은 말 그대로 죽을 것처럼 힘이 들지만, 결코 나를 죽이지는 못한다. 화재 경보가 울릴 때 위험한 것은 ‘화재’ 이지 ‘경보’ 가 아니다. 실제로 불이 나지 않았다면, 화재 경보는 어떠한 물건도 태우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이 밀어닥칠 때마다, 마치 불이 난 것처럼 행동을 하게 되고, 이러한 ‘행동’ 이 우리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곤 한다.


  청년은 어릴 적 따돌림을 받았고, 이로 인해 또다시 그러한 고통에 시달릴 까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은 ‘사람을 마주칠 때 마다 느끼는 불안’ 을 만들어냈다. 이 불안 자체는 아직은 그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불안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감정이 발생하리라 예상되는 상황 (이 청년의 경우, 사람을 만나는 모든 상황)을 회피하는 것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친구와 어울리지 못하고, 학원을 다니지 못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하고, 취업 면접을 가지 못하는 것, 지금 그의 하루를 어렵게 하고 그로 하여금 좌절감에 빠지게 하며 미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불안이라는 신호 그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불안을 피하려는 회피행동 들이다. 


  그가 겪었던 따돌림의 경험은 분명 너무도 절실한 아픔이고 상처였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으로 인해 다시금 그런 아픔을 겪고 싶지 않다는 마음인 불안이 밀려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불안이 주는 고통을 피하고자 두려움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되는 모든 상황을 피해버리는 것은 내 삶에 또 다른 아픔을 만들 수 있다. 그 중에,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꼭 필요한 많은 일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안을 피하려는 것이 잘못된, 혹은 틀린 생각이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실제로 그러한 생각이 내 삶에서 잘 작동하고 있는지, 혹시 그러한 생각으로 인한 행동들이 더 많은 삶의 고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는지.’ 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안을 비롯한 감정은 한 번 발생하면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 까지는 그 고통이 끝까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정점에 다다랐다가 다시금 소진되는 특성이 있다. 그리고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것이라 예상되는 상황에서 실제로는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때, 우리 마음속의 두려움은 점점 줄어든다. 그러나 미리 두려움을 가지고 그러한 상황을 사전에 회피해 버리면, 우리는 실제로 나의 불안을 줄여주고 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할 기회와의 ‘접촉’ 을 상실하게 된다. 


  “선생님,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음, 이 질문을 드려보고 싶어요. 환자분께서 그리시는, 원하는 삶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요?”

  “저는 이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네, 그러실 수 있죠. 그래도 여기 진료실에서는 한 번 떠올려 볼까요? 어려우실 수도 있지만, 만약 그러한 마음이 전혀 없다면 어떤 삶의 모습이 떠오르세요? 막연해도 괜찮아요. 이렇게 살면 좋겠다, 이런 삶이라면 행복할 것 같다.”

  “음...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사실 저는 좋은 가정을 꾸리고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

  “네. 좋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직장을 가지고 싶어요. 월급이 많진 않아도 돼요. 꾸준한 수입을 얻고 싶고...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고 싶어요.”


  ‘어떻게 우울함, 불안함, 두려움을 없앨 지’ 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 추구하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 에 대한 생각, 지금 내가 고민하는 마음의 고통에 대한 몰입을 잠시만 멈춰 두고 찬찬히 내가 원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이에 다가가기 위해 지금 해낼 수 있는 작은 한 걸음을 알려준다. 작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용기를 내 하루를 이 걸음걸음으로 채우는 것은, ‘어떻게 불안하지 않을 까 란 생각’으로 가득 차던 하루를 조그만 시도, 그로부터 주어지는 보람으로 채워준다.


  잘 되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모든 일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만은 풀려 나가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쁜 마음을 없애고 피하는 데 집중하느라 ‘점차 원하는 삶에서 멀어지고 있던’ 내가, 조금씩, 다시금 내가 원하는 삶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생님, 사실 제가 두 달 전에 영어 학원을 등록했었는데, 한 번도 가질 못했어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그런데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을 만나면서 또 상처를 받는 건 아닐까요?”

  “네. 좋습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과 잘 지낼 수는 없고, 사람과 만나다 보면 아마 또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아픔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은 결코 아니에요. 다만, 우리는 아프지 않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내게 아픔을 줄 것인가, 아닌가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의 기준으로 하루를 보내자 마음먹으셨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아주 큰 변화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 지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머릿속으로 미리 상상만 해 보는 대신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되는 지 지켜보기로 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힘든 부분을, 언제든지 함께 이야기하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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