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는 정신과 의사 Mar 04. 2020

슬픔을 통제하려는 마음은, 그 자체로 슬픔이다.

마음의 문제를 통제하고 제거하려는 노력이 ‘실제로’  삶에 미치는 영향 

 

  (이번 글은, 평소 글들 보다 분량이 깁니다.)


  글에 앞서,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이 있다. 만약 지금 누군가가 갑자기 당신을 칼로 위협하며 ‘빨리 뛰어, 안 그럼 찌를 거야!’ 라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달릴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마!’ 라고 말하면 가만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당신의 마음을 읽는 기계를 당신에게 연결한 후 ‘지금부터 절대 불안해하지 마! 조금이라도 불안해한다면 바로 찔러 버릴 거야!’ 라고 이야기한다면, 당신은 어떨까.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정신과 진료실을 찾아온다는 것은 수많은 문턱을 넘는 일이다. 요즘엔 많이 개선되었다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정신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편견, 낙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힘들다는 걸 인식한 이들은 정신과를 방문하기 전에, 우선 나름의 방법을 모색한다. 휴식을 취하고, 심리 서적을 읽거나 전문가들의 강연을 듣는다. 친구와 고민을 상담하기도 하고 여행을 떠나보기도 하며, 술 한 잔에 의지를 하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힘들 때 ‘스스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법’ 을 시도해 본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거나 아픔을 애써 외면하기로 마음먹은 이 조차도, 처음부터 아무런 시도를 해 보지 않았다기 보다는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대로 힘든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 포기해 버린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때, 막다른 길에 몰린 것만 같은 막막함에 짓눌릴 때 내담자들은 진료실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대개 기대한다. ‘비록 오만 가지의 방법들을 시도해 보았지만, 아직 나는 내 문제를 통제하고 고칠 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한 걸 거야.’ ‘진료를 보고, 만약 운이 좋아 내게 적합한 방법만 찾는다면 내 문제도 금세 고쳐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거야. 그러면 삶도 자연스럽게 좋아질 거야.’

 

 그런데 만약 진료실에서 만난 정신과 의사가, 내가 원했던 대로 마음의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대신 ‘마음의 슬픔을 통제하고 없애려는 생각 자체가 슬픔의 씨앗’ 이라는 말을 한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 것인가. ‘엥, 이게 무슨 소리야?’ 라는 생각이 들진 않을까. 이는 바로 수용전념치료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ACT)를 처음 접했을 때의 나의 느낌이었다.


  ‘슬픔을 통제하고 없애려는 생각이 슬픔의 원인이 된다.’ 는 말에 낯선 느낌이 드는 것은, 우리 모두가 확고히 가지고 있는, 마음의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 떠오르는 생각, 그리고 경험을 ‘좋은 것’ 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데 익숙하다. 그리고 마음에 ‘좋은 것’을 늘리고, ‘나쁜 것’들은 ‘문제’로 바라보고 이를 통제하거나 없애려 한다. 그리하여 마음에 좋은 것, 이를 때면 즐거운 느낌, 자존감, 스스로가 유능하다는 인식, 누군가와의 좋은 관계 등이 가득 찰 때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즉,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들은 나의 삶이 잘못되었다거나 내 마음이 고장 나고 병들었다는 증거로 바라보고, 이러한 것들을 문제로 간주하고 바로잡거나 제거하는 것이 행복,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한 첫 단추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우울함, 불안함이 완벽하게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연히 너무도 후련할 것이다. 다만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슬픔을 통제하고 없애겠다는 생각, 혹은 전략으로 우리가 행하는 행동들이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는가?’ 마음의 고통을 피하거나 없애겠다고 마음먹고 시도하는 행동들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문제를 상정하고, 이를 분석하고 우리의 의도대로 조작하여 해결하는 것은 우리가 ‘외부세계’를 대하고 삶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취업 전략을 분석하고 이에 따라 노력하여 취업이라는 ‘문제’ 를 해결하고, 대화를 나누며 대인관계 갈등이라는 문제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이러한 ‘문제 해결 모드, 문제 통제 모드’는 꽤나 유용하게 작동한다. 입시를 마치면 취업을 준비하고, 취업을 해서는 승진을 바라보며 노력하기도 하고, 혹은 이를 그만두고 창업을 하기도 하며 주어지는 수많은 과제들을 해결해 나가며 살아간다. 내가 원하는 결과들을 축적하고, 원하지 않는 결과들을 제거하거나 통제해 나가는 것이 행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에 익숙한 우리들은 우리의 마음에도 같은 공식을 적용한다. 기쁨, 즐거움, 낙관, 높은 자존감, 의욕 같은 좋은 것들을 마음에 축적하려 하고, 슬픔, 우울, 불안, 좌절감, 두려움, 그 밖의 수많은 힘든 감정들을 ‘문제’ 로 보고 마음으로부터 이들을 도려내려 한다. 문제는 이러한 시도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도가 ‘현실에서와는 달리 내적 세계에서는 잘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 이다.


 앞서 괴한이 나를 칼로 위협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뛰거나, 혹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외부 환경의 조절은 우리의 의도대로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불안해하지 않기’ 와 같은 마음과 관련된 부분은 어떠한가? 잘 되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해하지 않으려 할수록 우리의 가슴은 더욱 더 뛰고, ‘우울하지 말아야지’ 라 생각할수록 더욱 더 깊은 슬픔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느낌마저 든다. 우리의 감정, 생각과 같은 마음 작용은 ‘잘만 풀어내면 사라질’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우리 마음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정적인 감정이나 경험을 애써 ‘좋게’, 혹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다. 힘들었던 것은 힘들었던 것이고, 억울한 것은 억울한 것이며, 화나는 일은 화나는 일이다. 힘들었던 일을 ‘좋게’ 생각하기로 애써 마음먹는다고 해서 그 일이 더 이상 ‘안 힘든’ 일, 좋은 일로 마음속에서 인식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내 마음에서 슬픔이나 두려움이 올라올 때 마다, 모든 일을 제쳐 두고 이런 마음들을 없애는 데만 골몰했던 시도들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내 삶을 힘들게 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러한 시도에 매진해 왔던 이유는 ‘이러한 방식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고, 이는 내가 원하는 삶으로 향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단계’ 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이러한 접근은 우리에게 안식을 가져다주지도 않았고, 심지어 (불안 때문에 중요한 면접을 포기하거나, 우울함이 심하거나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할 것이란 걱정에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기도 하고, 성과에 대한 부담감으로 업무 자체를 미루거나 다른 사람에게 양보기하기도 하는 등) 삶에서 소중한 기회들을 잃게 만들어 장기적으로 우리의 삶을 더욱 뒤엉키게 하고, 이는 또 다른 마음의 고통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를 우리가 원하는 삶으로 인도해 줄 태도는 ‘결과’를 잘 살펴보는 태도이다, 지금까지 내가 행했던, 그리고 지금 내가 행하는, 혹은 앞으로 행할 행동들이 내게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지를 차분히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을 대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만남을 피하는 이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통상적으로 이러한 생각의 흐름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즉 ‘불안을 해결하는 것이 행복이다.’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라는 생각들이 무의식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대개 ‘나는 도대체 왜 그럴까, 어릴 때 사랑을 못 받아서 그럴까.’ 라며 부정적인 마음의 원인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 그러나 보통 이러한 행동 패턴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고, 오히려 ‘관계의 단절’ 이라는 다른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만약 그에게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가치라면, 이는 더 큰 슬픔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회피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사람에 대한 불안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일시적인 이점이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사람들로부터의 단절을 유발한다. 내가 원하는 궁극적인 삶이 ‘불안하지 않는 삶’ 이라면,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서라도 불안하지만 않으면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사람과의 만남을 회피한다고 해서 과연 불안하지 않을 것인가도 생각해 볼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의 대부분은 ‘사랑하는 삶, 가치 있는 삶’ 을 원해서, 이러한 패턴으로는 ‘크게 불안이 좋아지지도 않고, 어쩐지 계속 불행한 삶’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 


  꼭 ‘이러한 불안을 이겨내고 누군가를 만나야 해.’ 라는 강요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생각의 관점을 제시하고 싶을 뿐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것도 아니고, 나의 잘못된 행동 을 찾아내어 교정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게 찾아오는 마음, 그리고 그에 따라 행하는 나의 행동이 내게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 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객관적으로 따져보자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우선 통제하고 제거하려는 시도는 대게 우리의 삶을 더 힘들게 하는 결과로 돌아오곤 한다. 그렇기에 ‘힘든 감정을 없애고 싶어, 여기서 달아나고 싶어!’ 라는 강렬한 집착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고, 정말로 이에 다가가는 행동은 무엇인지를 차분히 생각해 보면 어떨까, 라는 관점을 이 글을 읽는 모두와 나누고 싶을 뿐이다. 


  만약 당신 역시 우울이나 불안, 외로움 같은 당장의 힘든 감정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 이를 충동적으로 회피하기 위한 방법들, 이를테면 외면하기, 회피, 음주, 잠자기, 일회성 만남 같은 행동들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럴 때 마다 왜 내게 그러한 감정들이 찾아오는 지 과거를 분석하여 원인을 찾고 그러한 감정들이 들 때마다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저 천천히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그러한 행동들이 ‘지금, 여기’에서의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 좋은 영향은 어떤 것이고 나쁜 영향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때때로 찾아오는 힘든 마음, 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는 무관하게, 당신이 다가가고 싶은 삶의 모습, 가치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아무리 사소할 지라도, 이를 향하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한 걸음은 어떤 것인지.


  혹, ‘내가 원하는 삶이 있지만, 지금 내 현실은 그것과는 너무 멀어. 내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떠오르지만,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어.’ 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변화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 혹은 이를 향하는 걸림돌에 대해서는 정신과 의사의 조언을 구해도 좋다. ‘어떻게 하면 힘든 마음으로부터 벗어날까.’ 라는 생각의 사로잡힘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삶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면, ‘일단 우울과 불안을 없애고, 삶을 살아가는 건 그 다음’ 이란 확고한 믿음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당신의 마음속에서는 슬픔의 통제라는 안개를 뚫고 ‘원하는 삶으로 다가가는 행복’ 이라는 싹이 조심스레 돋아난 것이다. 





  어릴 적 삼촌으로부터 성적인 학대를 받은 한 젊은 여성과 치료자의 대화 중 일부로 긴 글을 끝맺을까 한다.


  치료자: 밤에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당신의 남자친구가 다가오면 불안은 최고조에 이른다고 말씀하셨죠. 두려움도 느끼고, 당신 삼촌이 당신에게 저지른 일이 기억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내담자: 불안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리를 피해서 산책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잠드는 거예요.


  치료자: 정말 힘들겠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당신은 근본적으로는 억지로 남자친구를 떠나야만 하는데, 남자친구는 당신에게 아주 소중한 대상입니다.


 내담자: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당신은 몰라요! 저는 정말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남자친구나 저 때문에 아주 실망하기 때문에 저 또한 기분이 안 좋아요. 그는 심지어 각자 다른 방에서 자자고 제안을 하기도 했고, 주중에 자기 집에서 자는 횟수를 더 늘리는 것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어요.


 치료자: 다른 말로 하자면 이 관계에 대한 당신의 희망을 포기해서 불안 제거를 이루어 냈다는 이야기네요, 그런가요?


 내담자: 네, 제 이슈가 이 관계를 파괴하도록 두고 있다는 이야기로 들려서 슬픕니다.


 치료자; 당신 이슈가 여기서 유감스러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들리지는 않아요. 실제 문제를 일이키는 것은, 당신의 이슈가 나타나는 바로 그 때 ‘당신이 하는 행동’이 이 관계를 파괴하고 있어요. 당신의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당신은 침실을 떠납니다. 당신이 겪고 있는 희생을 고려해볼 때 당신 불안을 통제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중략)


  치료자: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신속하게 거기서 나오지 않는다면 더 나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계속 분주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그 방을 떠나는 것은 심지어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


  “ 다음에 대해 여쭈어볼게요. 여기서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침실에서 불안하지 않는 것인가요, 아니면 소중한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지키는 것인가요?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불안하지 않는 것’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저는 알고 싶습니다. ”


(Steven C. Hayes 등, 수용과 참여의 심리치료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시그마 프레스, 2018, p.224, 225 中)





함께 읽기를 권해드리는 글)

https://blog.naver.com/dhmd0913/221764257535

https://blog.naver.com/dhmd0913/221535737237

https://blog.naver.com/dhmd0913/221541469504

https://blog.naver.com/dhmd0913/221795730142



(사진 출처: pixabay.com)

매거진의 이전글 두려움 앞에 머리를 박는 타조에 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