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를 설계하는 디렉터 JOHN의 창업현장노트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그 무엇보다 메뉴판을 가장 먼저 확인한다.
메뉴판은 나에게 지도이기 때문이다.
도착지까지 길을 스스로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아닌, 직접 길을 찾아 나서야 하는 지도다.
메뉴판을 보면 클라이언트가 생각하고 있는 매장의 정체를 알 수 있다. 카페인지, 레스토랑인지, 일반 식당인지, 아님 복합 매장인지. 매장의 정체성은 메뉴판에서 나온다. 그리고 메뉴를 보면 주방의 규모가 예측이 된다. 뿐만 아니라 주방과 홀의 균형을 살펴보면서 매장이 어떤 분위기일지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다.
메뉴판 하나를 가지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은 정말 많다.
메뉴판을 보면서 잠시 상상을 해본다.
이 매장에 들어가 메뉴들을 고르고, 주문한 메뉴들을 먹고 있는 상상을 한다. 내 주변으로는 포장해 나가는 손님들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메뉴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도 있다. 어떤 음악이 나오고, 분위기는 어떻고... 이 모든 것들을 짧은 시간이지만 상상을 해본다.
이런 상상이 가능한 이유는 메뉴판이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 디자인 업무를 빨리 진행하고 싶으면 난 메뉴판을 확인하자마자 함께 일하는 주방팀에 자료를 보낸다. 커피 및 음료를 만드는 주방을 제외하곤 주방팀에서 자료를 확인하고 가장 이상적인 주방 설계안을 내게 공유해준다. (커피 및 음료 주방 설계는 내 몫이다.) 1차 주방 설계안을 받으면 난 면적을 확인하고 홀과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다.
여기서 주방과 홀 사이의 관계란, 주방이 적극적으로 오픈되고 전면으로 나와 손님들과 소통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후면 쪽으로 빠지고 차단되어 손님들은 홀 분위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어떤 매장이건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권의 특성과 공간의 형태 또는 조건에 따라서 잘 어울리는 주방 모습이 있다. 나는 최상의 주방 설계안을 확정해 나간다.
클라이언트가 구상해 온 메뉴판이 어느 경우엔 공간의 규모보다 메뉴가 너무 방대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과연, 이 규모에서 이 메뉴들을 전부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실제로 2021년 맡았던 프로젝트에서 한 카페 오너가 가져온 메뉴판이 그랬다.) 그럴 땐 클라이언트에게 직설적으로 조언을 한다.
사실 여기서 가장 어려운 점은 경험이 없는 상태의 창업자를 설득하는 것이다. 실제 경험이 있는 경우 내가 체크한 사항들을 들으면 이해를 쉽게 한다. 하지만,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는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게 맞다고만 믿는 창업자들이 은근히 많다. 마치...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 내가 부정적이거나 잘 모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메뉴에 따라서 주방 위치가 먼저 결정될 때도 있다.
길과 바로 소통하는 테이크아웃 전용 창구가 있어야 할 땐 공간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붙여야 하고, 매장 입구에서부터 오픈 키친의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한다면 입구 쪽에 주방을 붙이되 안이 잘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직사각형 형태가 필요할 때도 있고, 정사각형 형태가 필요할 때도 있다.
메뉴판만 확인하면 이 모든 것들을 초반에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기업의 경우라면 전문 셰프가 이미 주방에 대한 고민을 해 놓기도 한다. 나는 인테리어 전문가로서 셰프의 생각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또는 더 좋은 설계안이 있는지 피드백을 주면 되는 상황이다. 그리고 경험이 있는 오너 셰프나 오너 파티셰, 오너 바리스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미 충분히 메뉴와 주방에 대한 고민이 선행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많은 프로젝트 중 극히 일부가 그렇고 대부분은 오너 혼자 고민을 해야 한다. (경험 없는 창업자가 고민하기엔 거의 불가능하다.) 오너 대부분은 창업이 첫 경험이다. 그래서 더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경험이 많은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정말 엄청 크다.
모든 일이 경험을 통해 시행착오를 겪고, 그렇게 성장을 해 나가면 좋은데 창업만은 시행착오로 경험하기엔 너무 리스크가 크다. 그래서 난 클라이언트에게 이런 면에 있어서 직언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클라이언트가 얼마나 수용하는지는 그다음 문제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메뉴판을 기준으로 최대한 객관적인 생각을 정리해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메뉴판을 가장 먼저 확인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