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하나 맥주 두 개 주세요.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최근 1년간 가장 자주 반복해서 한 말이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폭탄주를 마셨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술자리는 업무의 연장이다. 나의 취향이나 주량은 이 업무에서 전혀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 '병권'을 쥔 사람이 한꺼번에 제조해서 분배하면 공평하게 마시는 폭탄주. 병권이 나에게 왔을 때 거창한 건배사를 하는 것은 이 업무의 중요한 스킬이다. 이렇게 유쾌하고 즐거운 자리를 마련해주신 존경하는 000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오늘 이 밤을 함께하는 우리의 아름답고 끈끈한 우정은 영원히 계속되길. 이 멤버 리멤버!
지금보다 술을 더 마셨으면 더 마셨지 덜 마시지는 않았던 대학생 시절에는 절대 폭탄주를 마시지 않았다. 맥주는 맥주고, 소주는 소주지, 고유의 맛을 왜 굳이 섞어서 해치는가. 너네가 안 마셔도 나는 홀짝이고 싶은데 왜 '병권자'가 술잔을 제조해주지 않으면 마실 수 없는가. 무엇보다 폭탄주 마신 다음날의 숙취가 한 주종만 마신 것보다 심하기도 했다. 이런 걸 구구절절 직장 상사에게 투덜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에게 폭탄주란 사회생활의 동의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7시에 출근을 하고 12시에 점심을 먹고 7시쯤에 퇴근 준비를 하듯, 식당에 가면 처음처럼 한 병과 카스 두 병을 시키는 거다.
이렇게 마시는 술은 무효다.
비가 오는 날에는 고소하게 부쳐진 빈대떡과 서울막걸리를 마셔야 한다. 사우나처럼 푹푹 찌는 한여름에는 하얗게 얼린 잔에 가득 담긴 생맥주를 마셔야 한다.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날이면 캡사이신 맛이 잔뜩 나는 매운 닭발에 소주를 한 잔 하거나 새빨간 훠궈에 고량주를 털어 넣어야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후배에게는 약간 비싼 이자카야에서 사케를 한 병 대접해야 하고, 집안의 우환으로 고민이 많은 오랜 친구와는 바에 나란히 앉아 수정처럼 하얀 얼음에 싱글몰트 위스키를 살살 녹여가며 홀짝여야 한다. 날마다 달라지는 온도와 습도에 옷차림을 바꾸듯, 매 순간에 필요한 술 역시 다채로워야 한다. 성인이 된 뒤 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들에는 늘 거기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술이 있었다.
그 술들에 대한 기억을 기록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