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와인
200X년 봄, 늦은 밤 A에게 전화가 오면 가슴부터 철렁했다. 대부분 울먹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00이가..."로 시작되는 하소연을 가만히 듣다가, 그 새끼 미친 거 아니냐고 화를 냈다가, 그래도 이러 저러한 정황을 보았을때 그 아이도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 다독이는 걸로 통화는 늘 끝이 났다. 그런데 그 날은 심했다. 빈말로라도 남자친구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당장 때려쳐, 그 꼴을 왜 보고 앉았니? 어디야? 집으로 갈게.
나도 이미 취했고, 소주는 안주가 필요해서 귀찮은데 맥주는 배 부르고... 와인을 사가자. 무슨 와인을 사지. 붉은건 카베르네소비뇽이요 하얀건 샤도네이다, 품종 이름만 겨우 읽던 시절. 마주앙, 옐로 테일, 무똥까데, 빌라엠...편의점 진열대에서 만 원 안팎으로 살 수 있었던 와인들을 고민고민하며 살폈다. 잘 팔리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앉은 이 와인(자취생들에게 와인은 그 얼마나 사치인가) 중에 낯선 게 있었다. '블루 넌', 파랗고 미끈한 병. 예쁘다. 그럼 됐지.
A는 어제부터 한 숨도 못잤다고 했다. 푸석하고 까칠한 얼굴. 초점없는 눈동자. A는 '더 사랑하는 죄'로 부당한 학대를 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 누가 A를 지킬 수 있겠는가. 오직 스스로 벗어나기를 기대할 밖에. 으이그 이 년아, 걔는 발 뻗고 자고 있을텐데. 한 잔 하고 얼른 자! 밥 말리의 CD를 틀고, 와인잔에 블루넌을 따랐다. 과하지 않은 달콤함, 입 안을 자극하는 미세한 탄산감. 아르마딜로처럼 등을 구부리고 쪼그리고 앉았던 A도 와인을 마시면서 조금씩 풀어졌다. 걔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네가 다 받아줘서 그렇지. 나를 엄마라고 생각하는 걸까? 엄마한테도 그보다는 잘 하겠네...야 근데 이거 맛있다. CD 하나를 다 들었을 때 쯤에서야 A는 배시시 웃었고 나는 와인 한 병을 더 사러 나갔다.
블루넌은 독일 와인이다. 라인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통칭명 '리프라우밀히'(Liebfraumilch)를 수출업자 Peter Sichel이 이름을 고쳐 수출하면서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한다. '파란 수녀'라는 뜻의 '블루 넌(Blue Nun'은 단지 외국인이 발음하기 쉽도록 궁리한 결과다.(네이버 용어해설 참고)
이 날 이후 종종 블루넌을 일부러 사 마신다. 흔히들 떠들썩하게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달콤하면서도 탄산감이 있는 이런 술을 마시지만, 내 경우는 정반대다. 화 낼 힘조차 없이 무기력할때.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날. 혼자 있고 싶은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누구에게라도 위로받고 싶은 순간. 집에 술이 없어도 여느 편의점에서 살 수 있다. 마개도 손으로 휙 돌려 따면 그만이다.(안그래도 힘 없는데 혼자 와인 마개 따느라 낑낑댈때면 어찌나 짜증이 나는지) 적당한 달콤함에 기분이 좋아진다. 창백했던 얼굴도 알코올 덕분에 발그레 해진다. 볼터치 한 효과인지 취해서인지, 거울 속 내 얼굴도 조금 더 예뻐보인다. 억지로 웃어 본다. 그렇게 힘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