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발음이 가능한 당신이 부럽다
후배들한테 오디오 교육을 시킬 때 강조하는 건 크게 두 가지였다. 복식호흡, 그리고 정확한 입모양. 30cm 거리의 옆사람에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얕은 숨으로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대충 흘리듯이 말을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어차피 상대는 당신과 한 공간에 있고, 대화 주제도 피차간에 알고 있는 내용이니까. 하지만 방송기자는 어떻게보면 시장통의 장사꾼 같은 존재다. 나를 모르고 관심없는 사람들 귀에,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때려 꽂아야' 한다. 그러려면 소리를 크고 안정적으로, 정확하게 뽑아내야 한다. 그러니 발화(發話)의 연료와도 같은 공기를 충분히 내 몸 속에 담아두고, 조음기관의 시작점인 입술을 충분히 가동시킬 필요가 있다. 오디오가 약하다고 특히 지적을 받는 후배들에게는 '가갸거겨고교구규..' 한글 자음모음표를 출력해서 혼자 수시로 읽으라고 조언하곤 했다. 제일 흔하게 보는 케이스가 입을 대충 움직이는 습관이다. 'ㅏ' 소리를 낼 때 'ㅓ'만큼만 입을 벌린다든지 'ㅗ'나 'ㅜ'를 낼 때 입을 충분히 오므리지 않으면 당연히 'ㅙ' 'ㅟ'같은 겹모음 소리도 뭉개져서 들린다. 왠지모르게 어린애처럼 미숙한 느낌을 준다.
거울을 보고 아에이오우를 해보다가 문득, 어두운 오디오룸에서 후배를 붙잡고 거의 뮤지컬 배우처럼 과장되게 아에이오우를 해보였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00아, (복화술하듯) 입슬만 이르케 대층 음직이지 말고, 볼이랑 광대까지 써서 더 크게 벌려봐 ㅏㅏㅏㅏ" 지금의 나는 그때와 정반대로, 최대한 입술을 덜 움직이려 애쓰고 있다. 'ㅗ' 'ㅜ' 를 할 때 오른쪽과 왼쪽이 아직 대칭으로 오무려지지 않아서 'ㅓ' 정도로만 입을 살짝 모아야 한다. 평소 습관처럼 활기차게 움직이는 건측 입술을 억지로 붙잡아가며, 오려다 마는 환측 입술과 대칭이 되도록 만든다. 안면마비 회복 운동의 기준은 환측 움직임이다. 환측 근육의 가동 범위가 안정적으로 늘어날 수 있도록, 아주 조금씩 천천히 정확하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 건측과 환측이 비대칭인대로 그냥 얼굴 근육이 익숙해져버리면 그 방향으로 계속 굳어져서 갈수록 교정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알면서도 사실 쉽지 않다. 얼굴 근육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해온 세월이 벌써 40년+a니까. 특히나 그중의 절반 가량은 최대한 쫙쫙 늘려가며 살려고 애써왔었고.
발병 만 2년을 넘어서면서 이제는 안면마비 사실을 종종 까먹을 지경이 되었다. 그냥 오른쪽 얼굴+목+어깨+두피 전반에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잔잔한 불편감에 익숙해졌나보다. 그래도 치과에서 발치하는 날 마취주사 맞고 갓 2시간 정도 지난 듯 했던, 꽉 찼던 얼얼함이 이제는 6시간 정도 지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전보다는 확실히 움직임이 부드러워진 것 같기는 하다. 징하다. 2년이나 됐는데 겨우 이정도라니!
그래도 회복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어디냐. 나를 도닥이고 싶어 오랜만에 브런치 창을 열었다. 그리고 나의 이런 경험을 읽으며 누군가는 위로를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다. 천가지 만가지 다양한 이유로 슬프고 괴롭고 우울했겠지만, 오직 마음껏 얼굴 근육을 쫙쫙 낭비해가며 아에이오우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당신을 부러워하는 인간이 여기 있다. 당연하다고 여겨서 제대로 눈여겨보지도 않았던 당신의 일상을 감사하며 만끽하기를 기원한다. 요즘 고민 상담을 해오는 지인들에게 늘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스트레스 받다가 나처럼 입 돌아가는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