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자리를 얼마나 빌린 채로 살아왔을까

by happy

나는 이 자리를 얼마나 빌린 채로 살아왔을까

연말 오후였다.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던 날.
조직개편 이야기가 조용히 오르내리던 시기였고, 옆자리 동료는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간 앞에 서 있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마음속에서 지나간 말들이 굳이 입 밖으로 나올 필요는 없었다.

며칠 뒤, 그의 책상이 먼저 변하기 시작했다.
서랍이 비워지고, 파일은 상자에 담겼다.
늘 그 자리에 있던 머그컵이 종이봉투 속으로 사라졌다.
PC는 전원이 꺼졌고, 반납 스티커가 붙었다.
조직은 아직 그대로였지만 그의 자리는 이미 정리되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일했다.
회의실로 나란히 걸어가던 시간도 있었고, 서로의 성과를 의식하던 순간도 있었다.
어떤 날은 협력이었고, 어떤 날은 조용한 경쟁이었다.
나는 이 자리 안에서 버텼고, 다음 단계를 기대하며 애써왔다.
그런데 한 사람의 선택만으로 이 공간의 공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자리가 비워진 뒤에도 사무실의 틀은 그대로였다.
출입증은 여전히 작동했고, 회의 일정도 평소처럼 흘러갔다.
나는 그 안에 남아 있었다.
같은 층에서, 같은 방향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자리를 떠난 사람과 자리에 남은 사람의 차이는 결정이었을까, 아니면 시선이었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이 책상도, 이 컴퓨터도, 이 자리도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우리는 잠시 빌린 도구로 일하고, 잠시 허락된 자리에 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무엇을 이렇게 오래 쥐고 있었던 걸까.

요즘 회사 생활 속에서 자꾸 같은 질문이 돌아온다.
나는 아직 이 안에 있으면서도 밖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 안에서 보이는 풍경을 전부라고 믿고 있는 걸까.

당신은 지금,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그리고 이 자리를 얼마나 오래 내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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