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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Nov 26. 2023

남아있는 나날

by 가즈오 이시구로

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는 영화와 비슷하게 앤서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의 실패한 로맨스로 단순하게 읽었습니다.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어낸 글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이 느끼는 복잡하면서도 촘촘한 감정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책도 저와 같이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이십 대에 보였던 단순한 것들이 이렇게 복잡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습니다. 담담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인지 아니면 좀 더 되짚어 보고 싶었는지 유려한 문체로 구성된 이 책을 다시 잡았을 때, 막힘없이 읽어 내려갔고 책을 덮은 후에는 다른 책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책의 첫 장을 다시 열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한 권의 책이 떠올랐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인데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나치 부역자가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 책입니다. 그는 우리가 상상했던 악마가 아니었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그저 묵묵히 일하다 괴물이 된 경우였습니다. 성실하게 일상을 반복했지만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무사유의 죄악” 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 스티븐슨은 영국의 한 저명한 저택에서 집사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그는 주인을 성심껏 모시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직원들을 일사불란하게 진두지휘합니다. 그는 그냥 집사가 아니라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인물이었고 일을 위해서라면 아버지의 임종도, 동료직원과의 소중한 인연도 기꺼이 희생하고 날려 보냈습니다. 인자한 주인 덕분에 생애 첫 여행길에 오른 스티븐스는 지나온 자신의 인생을 회상합니다.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치렀던 이 모든 희생이 가치가 있었던 것일지 그는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모신 주인이 나치 지지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성심껏 준비한 연회들도 결국 히틀러에게 이용당한 모임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연회의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외면했습니다. 위대한 집사가 되는 데는 성공했을지언정 위대한 인생을 사는 데는 실패한 것일지 아니면 잘못된 인생, 허망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을지 그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P : 떠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저기 바깥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고 관심도 가져 주지 않는다는 현실을 절감하고 있는 내 모습만 떠올랐어요. 그 수준이에요, 나의 고상한 원칙들을 다 합쳐 본들 그 정도밖에 안 되죠. 나 자신이 너무나 수치스러워요. 하지만 끝내 떠날 수없었어요, 스티븐스 씨.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P : 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스티븐슨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주어진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려는 위대한 집사가 아니었을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스티븐슨처럼 각자의 여행에서 어느 날 문득 지나온 인생의 나날에 대해 혼란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스티븐슨도 우리도 아직 기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남아 있는 나날이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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