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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Aug 31. 2023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

by 실비아 플라스

태생적으로 저는 못하는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사실은 더 많을 것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컴퓨터 게임을 못하고, 열정은 있지만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합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롤 경기를 보며 밥을 먹고,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종종 지치다고 느낄 때면, 연필과 조그마한 스케치북을 꺼내 이것저것 그려봅니다. 참 늘지 않아 답답할 법도 한 게임 실력과 스케치 능력은 어느 정도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고 그저 잘하시는 분들을 보면 부럽기만 합니다.


2011년 런던으로 출장 갔을 때로 기억을 합니다. 일이 예정보다 일찍 끝났고 하루 반 정도의 시간이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처음으로 와본 곳이기에 이곳저곳 홀로 걸어 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관광객으로 즐기고 있을 때, <메이어 갤러리>에서 반가운 이름이 보였습니다. 다름 아닌 실비아 플라스라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그 이름을 딴 전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의 시, 소설, 일기만 알았지 그림을 그렸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호기심으로 들어가 구경을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 그녀의 딸과 영국의 한 출판사에서 드로잉집을 출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가웠습니다.


그림을 잘 모르는 저는 사실 이게 잘 그린 그림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사실적인 그림이나 실물과 같은 그림보다는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좋다.”, “잘 그렸다.”라고 말이 나오는 느낌이 드는 그림들을 좋아합니다. 아주 뛰어난 화가라는 생각은 들지는 않았지만 글도 잘 쓰면서 그림도 어느 정도 잘 그리는 그녀가 마냥 부럽기만 했습니다.


이 책은 일기의 날짜가 적혀있는 것처럼 시간순으로 실려있고 전시회의 원본 그대로의 색감이라 감동도 있습니다. 흑백의 선이 주는 울림도 좋았고 그녀의 글이 더해지면서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녀가 그린 드로잉 46점과 편지와 일기가 이 책에는 실려 있습니다. 전시회에서 봤던 모든 그림이 아닌 얇은 분량인 이유는 오직 1956년도의 작품들만 있기 때문입니다. 1956년은 그녀가 남편 테드 휴스와 결혼한 시기였고 그와 함께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행한 때입니다. 이 책에 실린 작품은 다 그때 그리거나 쓰인 글입니다. 낯선 곳에서 공부를 하던 중에 만난 테드와 비밀리에 결혼 후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그녀가 펜과 잉크로 그려낸 드로잉입니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그녀는 그렇게 무언가를 그리고 쓰는 것을 놓지 않았습니다.



P : 테드와 이곳저곳 다녔는데 내가 펜과 잉크로 세밀화를 그리는 동안 테드는 옆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때로는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어. 내가 그림 그리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는 게 좋대. 내 그림도 좋아하고. 내가 펜을 움켜잡고 재빨리 스케치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좋아하는데. 베니돔에서 그린 그림, 보고 싶겠지만 엄마, 조금만 기다려. 내 생애 최고의 걸작들이야.


P : 1958년 3월 22일 외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머니는 열정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예술적 원천을 찾았어. 바로 그림이야. 앙리 루소나 고갱, 파울 클레, 데 키리코처럼 원초적 기운이 넘치는 작가들. (매주 청강하는 ‘현대미술사’ 시간에 교수님이 추천하는 대로) 미술 도서관에서 빌려온 아름다운 책들이 책상에 가득 쌓여 있어. 일 년 동안 간헐 온천수를 병에 꼭꼭 담아놓았던 것처럼 참신한 생각과 영감이 마구 샘솟고 있어.”



그녀를 생각하면 의문이 들었던 게 있었습니다. 그녀의 삶을 돌이켜 봤을 때 과연 그녀는 행복하던 때가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 그녀가 남긴 기록들을 보면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림에 대해 만족하고 확신에 차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이제 막 결혼한 사람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드로잉집은 시와 다른 그녀의 감성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행복한 때의 기억들과 예술적 열정을 기록했던 그녀의 생애의 한순간을 보면서 죽음 때문에 각인되었던 회색빛 이미지로만 그녀 전체를 덮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충분히 그녀는 행복을 느끼며 이처럼 더 많은 예술적 영감과 함께 더 좋은 시들을, 그림들을, 소설들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생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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