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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Oct 06. 2023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

by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20세기 초 식민지 조선에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읽히던 책은 투르게네프, 이광수, 톨스토이 이 세 작품입니다.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특히 윤동주 시인은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를 탐독하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가 남긴 <투르게네프의 언덕>은 당시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중 가장 인기를 끈 <거지>라는 작품을 오마주한 것이었습니다.


1918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투르게네프는 포악하고 전제적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열아홉 살 때 첫 번째 시집을 출간했으며 베를린 대학으로 떠나 2년 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서 모스크바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첫사랑>, <아버지와 아들> 등 19세기 러시아의 사회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 투르게네프의 소설들은 지금 현재까지도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한편 그는 자신의 문학적 경력을 시로 시작한 시인이었고 오늘 소개해드리는 이 책은 거장이 남긴 마지막 작품들입니다. 투르게네프 특유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시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 환상적인 이미지, 이 모든 것들이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거지


거리를 걷고 있노라니.... 늙어빠진 거지 하나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눈물 어린 충혈된 눈, 파리한 입술, 다 헤진 누더기 옷,

더러운 상처.. 오오, 가난은 어쩌면 이다지도 처참히

이 불행한 인간을 갉아먹는 것일까.


그는 빨갛게 부푼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듯 동냥을 청한다.


나는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는 모조리 뒤지기 시작했다.

지갑도 없다. 시계도 없다, 손수건마저 없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거지는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내민 그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리고 있다.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라, 나는 힘없이 떨고 있는

그 더러운 손을 덥석 움켜 잡았다.


“용서하시오, 형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충혈된 두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파리한 두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쳤다....

그리고 그는 자기대로 나의 싸늘한 손가락을

꼭 잡아주었다.


“괜찮습니다, 형제여" 하고 속삭였다.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


나는 깨달았다.

나도 이 형제에게서 적선을 받았다는 것을.



그의 산문시에서는 인생을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막바지에 전할 수 있는 삶의 체념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표현합니다. 한편으로는 바로 그것이 선물처럼 다가 올 화해와 용서에 대한 기대감 또한 보냅니다. 러시아의 가혹한 농노제 아래 일어났던 어두운 현실을 고발했던 리얼리즘 소설 대가로서의 면모를 이 산문시집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투르게네프의 언덕


윤동주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새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 병,간즈메 통, 쇳조각, 헌 양말 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록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덜너덜한 남루, 찢긴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하면서 고개를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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