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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Sep 22. 2023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by 에밀리 디킨슨

군대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정호승 시인의 긍정의 시에서 위로를 받을 때가 있었고 나태주 시인의 시를 읽으며 어쩌면 저도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갖던 때도 있었습니다. 시라는 매력적인 짧은 글에서 감정의 소용돌이를 묘하게 느끼게 되며 매력을 알고 있을 때쯤 알게 된 이 작가는, 무척이나 쓸쓸합니다. 그녀만큼 치열하게 고독을 택한 시인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금은 처절해 보이는 시를 많이 남겨놓았습니다.


그나마 조금 밝은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시는 그녀에게 사랑은 자신이 경험한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그 세상은 자기 그릇만큼의 크기였고 절대 과장되지 않게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아마 그 그릇만으로 충분했기에 남의 그릇이나 남의 사랑을 흉내 내지 않아도 되었고 그저 자신의 그릇에 담긴 사랑에 만족했습니다.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여기서도 디킨슨의 사랑은 부족한 사랑, 미약한 사랑이라고 느껴집니다. 혹자는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남의 의견은 사실 중요하지 않은 듯합니다. 세상은 절대적 사고, 이분법적 사고를 강요하지만 사랑은 흑백논리가 아니기에 완벽하지 않다고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할 순 없을 것입니다.



널빤지에서 널빤지로 난 걸었네.


널빤지에서 널빤지로 난 걸었네.

천천히 조심스럽게

바로 머리맡에는 별

발 밑엔 바다가 있는 것 같이.

  

난 몰랐네 - 다음 걸음이

내 마지막 걸음이 될는지 -

어떤 이는 경험이라고 말하지만

도무지 불안한 내 걸음걸이.



이 책에서 가장 와닿았던 시입니다. 널빤지 위를 걷는 그녀의 걸음은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머리맡에는 별이, 발 밑엔 바다가 있는데 자칫 천 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한번 내디딘 걸음을 중도에 멈출 수 없고 그렇다고 가던 길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이 한때 저의 모습 같기도 해서 눈에 더 들어왔습니다.

  

에밀리는 마운트 홀리오크 여성 신학교에 다녔던 에밀리는 신앙고백을 거부해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영혼은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던 그녀는 “지옥을 피할 수 없다면 견딜 것”이라는 각오를 다지고 그때부터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책을 읽고 시를 쓰며 지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단 일곱 편의 시를 지역 신문에 발표했고 가족들에게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홀로 자신의 방 안에서 글을 쓰는 에밀리 디킨슨의 모습은 마치 고립을 자처한 작가의 운명과도 같았습니다. 삶이 고독하고 쓸쓸하기만 했을 그녀에게 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평생 글만 쓰면서 살았을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세상을 등지지 않았습니다. 살아생전에는 7편만 알려졌지만 사후 발견된 시는 1800여 편 넘었고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도 약 1100통에 이르렀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시는 넓은 세상에 띄우는 편지와도 같았습니다. 그렇게 쓴 시들을 자신의 손으로 44권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아버지가 교회에 가자고 할 때마다 에밀리는 집에서 자신만의 안식일을 지키며 시를 쓰고 편지를 보내고 좋은 작품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1886년 그녀가 세상을 떠났고, 서랍 속의 시들은 세상으로 나올 준비를 마쳤습니다. 4년 후, 에밀리 디킨슨의 첫 시선집이 출간되었지만 절판되었고 1955년에야 시 전집이 출간되고 나서 19세기와 20세기를 연결하는 시인으로 온당한 평가를 받기 시작합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글을 썼고 모두가 잠든 시간에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글을 쓴 탁월한 시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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